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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라이프 살기 편한 집이 좋지 아니한家!
마음 편안하고 생활하기 편리한 집이야말로 최고의 미덕을 갖춘 집이다. 염의섭·김현주 부부의 보금자리가 카메라 앵글 안이나 밖이나 한결같이 가지런한 비결이 여기에 있다.

촬영팀을 위해 손수 카레를 끓여 상을 차린 살림의 달인 김현주 씨. 화사하고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부엌에는 황규백 작가의 단아한 판화가 걸려 있다.

네 번째 집의 기록
그리움, 그림, 글은 모두 ‘긁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활자 형태로 긁은 것이 글로, 선이나 색을 화폭 위에 긁은 것이 그림으로,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를 마음속에 긁은 것이 곧 그리움이라는 말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세 단어의 낭만적 어원을 들으며 새삼스럽게 ‘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물론 이 단어들의 어원과는 관련 없지만, 한편으로 땅을 긁어 세운 것이 집이라는 생각도 든다. 집은 살아온 사람의 글과 그림이 되기도 하고, 그리움으로도 남지 않는가?

염의섭·김현주 부부의 집은 <행복>에서 이미 글과 그림, 그리고 아련한 추억으로 기록된 적이 있다. 말인즉슨 이 인연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려 27년 전, ‘향기가 있는 집’의 주인으로 이 부부가 나온 이후, 1997년에는 살림 솜씨 좋은 주부로, 2007년에는 빵 굽는 여자로 김현주씨가 소개된 것. 그로부터 14년이 흘러 2021년, <행복>은 다시 한번 그의 집을 찾았다. 30여 년 전부터 솜씨 좋은 살림꾼으로 여러 차례 취재했을 정도로 내공이 남다른 김현주 씨의 새로운 집은 어떤 모습일까?

아르텍 테이블과 의자, 선반장, 다양한 소장품으로 꾸민 서재는 현관에서 들어오자마자 바로 보이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그는 책을 읽거나 간단한 티타임을 즐기곤 한다.
진짜 미니멀리즘이란 이런 것이다
“제 나이가 오십 중반이 되면서 좀 더 간소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사를 준비했지요.” 집의 규모(평형대)도 절반인 곳으로 정했다. 워낙 그릇이며 소품이며 귀하고 고운 살림살이가 가득하던 김현주 씨는 세간 대부분을 과감히 정리했다. 이제 인테리어를 누구에게 맡기느냐가 관건이었다. 1997년 당시 그의 집을 취재한 후로 연을 이어온 김윤수 기자에게 곽현정 실장을 소개받았다.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일한 경력을 바탕으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전업한 곽현정 실장은 무엇보다 ‘이 부부가 컬렉터여서’ 재미가 톡톡했다고 한다. “전시 기획도 빈 공간을 채우는 작업인 것처럼 공간 디자인도 아무것도 없는 흰 바탕에서 그림을 그려나가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이 집은 작품이 어울릴 공간을 먼저 상상해보는 일이 정말 즐거웠어요.”

김현주 씨가 바라는 집의 모습은 단 한 가지. ‘따뜻한 집’이었다. 곽현정 실장은 ‘따뜻한 미니멀리즘’을 콘셉트로 잡았다. “보통 미니멀이라고 하면 냉정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연상되는데, 주로 나무 소재를 사용하고 미색이 도는 화이트 도장을 하는 등 마감재에서 따뜻한 분위기를 내려고 했어요.” 이 집의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콘셉트에 그치지 않는다. 미니멀리즘이란 유지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 부지런하고 깔끔한 성격인 김현주 씨의 집은 촬영을 위해서 급히 치운 것이 아닌, 매일 매시간이 가지런하고 정갈한 상태. 이 집을 보니 라이프스타일이란 어떤 특정 트렌드에 맞춰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닌, 사람의 성향을 반영하는 정직한 생활양식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와닿는다. 진정한 미니멀리즘은 물건 개수가 아닌, 이를 관리하고 돌보는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

김현주 씨를 위한 작업실. 드레스룸 안에 빨래판이 설치된 세탁 공간, 개수대와 다림질 공간을 마련해 집안일을 효율적 동선으로 할 수 있다.

이 집의 가장 큰 자산은 한강이 훤히 내다보이는 시원한 뷰.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을 액자로 담은 듯한 거실에는 그가 30여 년간 모아온 가구와 작품으로 채워 넣었다. 소파 위에는 무조건 큰 작품을 걸어야 한다는 공식을 깼다.
하여튼 집이 너무 편해!
이 집은 크게 거실, 부엌, 서재, 침실, 드레스룸으로 나뉜다. 부부가 단출하게 사는 집이다 보니 공간 구획과 구조변경은 보다 자유로웠다. 곽현정 실장이 가장 먼저 구상한 공간은 현관. 이전에는 현관 바로 맞은편에 방문 두 개가 버티고 있는 구조였다. 답답하고 어두운 것이 문제였다. 곽현정 실장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밝고 환한 기운을 느낄 수 있도록 중문을 없애고, 두 방을 합치면서 문도 모두 없앴다. 덕분에 현관에서도 방의 창문 너머로 한강이 보이고, 채광도 제법 좋다.

구조변경으로 가장 빛을 본 공간은 바로 드레스룸 겸 세탁실이다. 드레스룸과 세탁실의 기능을 결합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은 가구 제작을 맡은 일도노의 고의정 실장이었다. 워낙 집 안을 깔끔하게 가꾸는 안주인의 성격을 고려해 살림하기에 편한 최적의 공간을 마련한 것. 이곳은 살림꾼을 위한 일종의 작업실이다. 드레스룸 한쪽 코너에 세탁기와 건조기를 함께 두고, 다림질을 하고 빨래를 너는 공간까지 마련했다. “옷을 벗어 바로 세탁기에 넣어 빨래하고 건조기를 돌리는 동안 다림질도 하지요. 건조를 끝낸 옷은 바로 옷장에 수납하고요. 한 공간에서 모든 작업이 원활한 동선으로 이뤄지니 이보다 편할 수가 없어요.”

유연한 공간 구획은 화장실에서도 드러난다. 공용 화장실은 샤워 부스를 없애 넓게 사용하고, 안방 화장실은 세면대와 수납장을 밖으로 빼서 욕실을 독립적이고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화장실이 두 개인 집을 원했어요. 공용 화장실은 샤워 부스도 없애니까 좋아요. 하여튼 집이 너무 편해!” 연신 ‘살기가 너무 편하다’고 말하는 김현주 씨의 감탄이 절로 이해가 간다.

두 방을 터서 개방감을 확보한 서재.

신혼 때 장만한 가구와 어머니에게 혼수로 받은 백수백복 병풍이 자리한 침실. 안정감을 주는 녹색 벽지로 마감했다.

거실에서 바라본 부엌. 원래 세탁실이던 창문쪽 공간에 와인 셀러와 커피 머신을 두었다.

컬렉터의 집답게 시선이 닿는 곳마다 작품이 저마다의 무게감을 지닌 채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의 백미는 바로 작품
컬렉터의 집이라 유독 기쁘던 곽현정 실장은 작품의 자리를 먼저 봐두기도 했다. 집에서 가장 먼저 맞이하는 그림은 현관 맞은편 벽에 걸린 윤형근 작가의 작품이다. “처음 들어왔을 때 이곳이 컬렉터의 공간이라는 인상과 주인의 취향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작품 자리로 점찍어둔 또 다른 공간은 부엌이다. 식탁과 아일랜드 너머로 자연스럽게 시야가 머무는 곳은 다름 아닌 황규백 작가의 판화. “살림꾼으로서 사모님의 아이덴티티와 딱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이 벽에 걸자마자 여기다 싶었지요.”

김현주 씨 역시 갤러리스트 출신의 곽현정 실장 덕분에 새로 알게 된 점도 많다. “저는 빈 벽에 갖고 있는 작품을 다 걸고 싶었는데, 또 그게 아니더라고요. 여백이 있어야 그림이 더 눈 에 들어오는구나 알았지요. 또 소파 위에는 무조건 큰 작품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조그만 작품도 너무 잘 어울리더군요.” 과연 소파 위에는 박서보 선생의 초기 작품이 소파, 조 명등과 세트처럼 걸려 있다. 이쯤 되니 그의 작품 보는 안목이 궁금해졌다. 대가의 반열에 오른 박서보, 윤형근, 김창열 작가의 작품 모두 그가 1970년대에 모은 것이다. “친정어머니가 컬렉터였어요. 남편은 저랑 결혼하면서 이런 그림도 돈 주고 사는구나 처음 알았다 하더라고요.(웃음)” 덕분에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남편은 이제 더 열성적인 컬렉터가 되었다고. “그 옛날 월급이 1백만 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어요. 남편이 신입 사원 때부터 조금씩 적금을 들고 만기가 되자 작품을 사더군요. 그게 이만익 작가의 유화 작품이에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작품도 있다. 침대 옆에 세워둔 백수 백복 병풍이다. 장수와 행복을 각각 의미하는 수壽 자와 복福 자를 1백 개씩 어머니가 일일이 수놓아 만든 병풍이었다. “어 린 마음에 ‘무슨 혼수로 병풍이야?’ 하고 생각했어요. 어느 순간 저 병풍이 정말 귀하구나를 알게 되어 이번에 이사하면서 가져왔지요.” 어머니가 쓰던 장을 비롯해 신혼 때 장만한 침 대와 협탁, 거울 등 수십 년간 세월을 함께 보낸 가구와 작품들이 수수하면서도 품위 있게 집을 지켜준다. 병풍은 빛이 바래지 않도록 볕이 들어오는 시간에는 창문을 닫아놓고, 20여 년 동안 쓴 가죽 소파는 매일같이 새것처럼 닦고, 찬장이며 창고며 먼지가 내려앉은 곳이 없도록 보살피는 마음.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답고 따스한 그리움으로 남을 집이다.

글 이승민 기자 | 사진 박찬우 | 디자인 및 설계 스텔라이펙트 | 시공 림앤스페이스(주) | 가구 제작 일도노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1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