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두지 않고 프로젝터로 영상을 볼 수 있는 스크린을 설치한 거실. 컬러감이 돋보이는 김희수 작가의 작품이 담백한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핸드플러스 건축사사무소 김준성 건축가가 설계를, 디자인플레이 이정윤 실장이 인테리어디자인을 맡았다.
우리는 말투나 표정, 옷차림, 혹은 수첩 같은 아주 사소한 소지품에서 그 사람이 사는 세계의 일부를 살짝 엿보곤 한다. 외부와 내면 세계 사이에 난 좁은 틈 가운데 ‘집’은 누군가의 우주로 깊게 진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가 아닐까? 장자크 로니에가 말한 ‘이야기의 매듭’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한사람이 단단하게 맺은 삶의 매듭은 때때로 집에서 하나둘씩 풀리기도 하니깐. 지난해 7월 집을 새로 지은 미메시스 홍유진 대표의 이야기다.
조금 수상한(?) 집
“수상해, 수상해. 이것저것 수상해. 수상해, 수상해. 콩 한 알도 수상해.” 빼뚤빼뚤한 글씨와 그림이 그려진 도화지 한 장이 벽에 붙어 있다. 국내 굴지의 출판사 열린책들의 예술 서적 브랜드 미메시스 홍유진 대표의 집에는 정체 모를 종이가 곳곳에서 포착된다. 바로 첫째 딸 안이가 직접 쓰고 그린 책들의 일부다. 누가 출판사 집안의 손녀 아니랄까 봐, 초등학생이 쓴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구성과 디테일이 살아 있다(심지어 마지막 페이지에는 발행 일자와 출판사 이름 ‘미메시스’까지 적혀 있다!). 홍유진 대표가 아홉 살 딸 안이, 다섯 살 아들 준이 두 아이와 함께 새 출발을 위해 튼 둥지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섰다.
둘째 준이가 좋아하는 로봇 장난감과 동화책으로 가득한 놀이방. 시야가 탁 트이는 넓은 창 덕분에 집에만 있어도 답답한 기분이 해소된다.
홍유진 대표의 첫째 딸 안이가 직접 쓰고 그린 ‘수상해’ 시리즈.
홍유진 대표가 의미 있는 작업물로 꼽은 열린책들 프로이트 전집 특별판과 ‘테이크아웃’ 시리즈.
그의 아버지 홍지웅 대표가 운영하는 열린책들의 구사옥과 신사옥, 미메시스 아트 하우스를 설계한 건축가이자 포르투갈의 세계적 건축가 알바로 시자Alvaro Siza에게 사사한 김준성 소장이 이번에도 설계를 도맡았다. 오랜 인연을 이어온 그와는 다섯 번째 작업이었기에 디자인 설계는 단 2개월 만에 빠르게 완성되었다. 홍유진 대표가 원한 것은 간단했다. 세 식구가 생활하는 각각의 방은 크게, 복도는 좁게 최소화할 것, 그리고 관리가 용이할 것. 관리하기 쉬워야 처음 지은 상태를 오랫동안 잘 유지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에 정원도 따로 두지 않고 테라스 바닥은 돌로 깔았다. 지붕 역시 눈이나 비가 내렸을 때 자연스럽게 쓸려 내려가도록 경사진 형태를 선택했다. “워킹맘이다 보니 집 안을 돌볼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관리하기 수월해야 하는 점이 중요했어요.”
이 건물은 크게 지하, 1층, 2층, 다락으로 구성했다. 지하 현관은 가족만 출입할 수 있고, 외부 손님은 1층 출입구를 사용하도록 출입 동선을 두 곳으로 분리했다. 1년여의 시공 과정을 거치는 동안 가장 힘든 점은 지하를 뚫는 일이었다. “평창동 일대는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북한산이 둘러싸고 있잖아요. 단단한 암반층인 지대를 뚫는 일 자체가 굉장히 힘들었고, 주변 이웃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소음과 진동을 줄이는 무진동·무소음 공법으로 시공해야 했지요.” 공사 도중에는 테라스를 절단해 구조를 일부 변경해야 하는 일도 발생했다. 이듬해 천신만고 끝에 완성한 집은 가족의 오붓하고 안온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거실과 방마다 외부와 맞닿은 큰 창이 나 있어 산줄기의 능선과 동네 풍경이 한눈에 내다보인다. 눈을 뜨면 계절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고, 발이 닿는 모든 공간에 빛이 충분히 내려앉는다. 또한 단독주택이라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다녀도 층간 소음 걱정이 없는 것도 장점이다. “처음부터 제 입맛에 맞게 공간을 계획했기 때문에 가족의 동선과 라이프스타일에 딱 맞아떨어지는 집이 된 거죠.”
홍유진 대표와 두 아이가 함께 쓰는 침실 위에는 안이가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작은 다락방을 마련했다. 안이는 요즘 주인공 남매 잭과 애니가 역사 여행을 떠나는 내용의 책 <마법의 시간여행>에 깊이 빠져 있다.
과 그림을 좋아하는 안이와 로봇과 자동차를 좋아하는 준이. 서로 좋아하는 것이 다르고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우애 깊은 남매다.
나만의 것을 키우는 과정 2006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행복>에서 취재한 아버지 홍지웅 씨의 집 기사에서 홍유진 대표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 당시 진행한 기자가 그에게 “책을 많이 읽느냐?”고 질문하자 “중국집 아들이 자장면 안 먹듯이 책을 거의 안 읽는다”는 재치 있는 답변으로 촬영장을 웃음바다로 만든 것. “제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중학생 때 반항심이 컸어요. 자퇴를 고려했을 정도로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고, 잠시 책과 멀어졌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매진했고, 학생회장도 했을 정도로 학교생활을 열심히 했다. 탕아에서 모범생으로 극과 극의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거쳐 경영전문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출판업에 종사하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일까. 그는 출판업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학창 시절부터 경제·경영서에 심취했고 막연하게나마 자기만의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졸업 후 문구 사업을 시작으로 패션, 대관, 카페 등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펼쳐왔고 유의미한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의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 기업이나 의뢰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디자인하고 납품하는 일을 하다 보니 점차 스트레스도 심해지고 보람이 적더라고요. 내가 하고 싶은 콘텐츠를 보다 적극적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출판 쪽으로 방향을 옮겼고, 지금은 열린책들과 미메시스 출 판 기획에만 집중하고 있지요.”
그가 기획한 책은 해외 문학에 집중한 열린책들에서 출판한 책과는 사뭇 색깔이 다르다. 그중 하나가 단편소설과 일러스트를 함께 소개하는 미메시스의 문학 시리즈 ‘테이크 아웃’이다. 정세랑, 황현진, 손아람 등 한국 작가와 키미앤일이, 소냐리, 변영근 등 일러스트 작가의 컬래버레이션 단편 소설 시리즈로 업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열린책들이 주로 해외 문학을 소개하는데, 저는 한국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국내 작가들의 소설을 내고 싶었지요.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읽기에 부담이 적은 단편소설 한 편을 한 권으로 내는 시리즈를 기획했어요. 작고 얇은 한 권에 일러스트와 함께 볼 수 있는 스무 권짜리 시리즈였는데, 저에게 의미 있는 작업이었지요.” 그가 기획한 것 중 가장 많이 팔린 책은 강주은의 인터뷰 집 <내가 말해 줄게요>이다. 기획부터 섭외, 인터뷰까지 그가 둘째 출산 전까지 진행을 도맡아 출판한 책인 만큼 애착도 깊다. “제가 당시 겪고 있던 소통의 문제에 대해 강주은씨가 명쾌한 대답을 주셨어요. 저에게도 와닿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더 잘 팔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홍유진 대표의 개인 공간으로 계획했지만 아이들의 음악실 겸 작은 서재가 되었다.
정직성 작가의 작품이 회벽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정리는 나의 힘이다
화가이던 할아버지와 출판사를 경영하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예술 문화적 자산이 컸을 터. 홍유진 대표가 부모님에게 영향을 받은 가장 큰 부분은 의외로 정리하는 ‘습관’이다. “어릴 때부터 책을 분류해서 정리하는 법을 배웠어요. 집에 책과 비디오가 엄청 많았는데, 비디오도 장르별· 감독별로 구분해서 정리했고, 영화나 책을 보고 나면 감상을 기록하게끔 하셨어요. 아직도 생각나네요. 빨간색 플라스틱 통에 A, B, C 순으로 인덱스가 차곡차곡 분류되어 있었지요.” 무엇이든지 ‘하는 것보다 관리가 중요하다’는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생활 습관이 되었다. 잔소리처럼 들리던 이야기를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하게 되더라는 홍유진 대표. “첫째 안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되니까 알아서 옷을 정리하더라고요. 분류하고 정리하는 습관이 대를 이어가는 유산 중 하나가 되었네요.”
무엇보다 폭넓은 경험을 하도록 배려해준 부모처럼, 아이들에게도 많은 경험을 누리게 해주고 싶다. 첫째 안이는 책을 읽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하루 종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 여덟 살 때에 동생 준이를 주인공 삼은 ‘짜증 나는 네 살’이라는 책을 열 권짜리 시리즈로 만들기도 했다. “안이가 쓴 책을 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이 이름으로 출판 등록도 해놓았어요.” 둘째 준이는 몸을 움직여 행동하는 활달한 성격이고, 자동차와 로봇에 관심이 많다. “한결같이 자동차를 계속 좋아하면 독일 직업학교에 진학해서 세계적 자동차 회사에서 메카닉으로 일하게 된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각자 좋아하는 것을 발전시켜서 자신만의 기술을 지닌 전문가가 되기를 바라요.”
홍유진 대표의 바이크 취미를 엿볼 수 있는 헬멧과 책을 수납한 장식장.
주방은 권영성 작가의 작품과 모빌을 달아 화사하다.
고전을 젊은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홍유진 대표.
홍유진 대표가 행복을 위해 가장 애쓰는 것은 아이들과의 꾸준한 소통이다. 뜻이 서로 통하는 데는 대화만이 능사는 아니다. “아이들이 크고 사춘기가 오면 자연스럽게 제 품에서 멀어지겠죠. 그럼 더 이상 저와 깊은 대화를 하는 게 어려워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렇게 해서 생각한 것이 바로 운동. 매주 함께 테니스를 하는 루틴을 만들었다. “둘째가 바퀴 달린 차를 계속 좋아하면 제 취미 중 하나인 바이크를 함께 타는 것도 재미있겠어요.”
홍유진 대표는 작게는 아이들, 그리고 크게는 세상과 대화하는 삶을 꿈꾼다. 2021년은 도스토옙스키 탄생 2백 주년으로 현재 표지 리뉴얼 작업이 한창이다. 세계적 대문호의 작품을 지금의 젊은 세대도 계속 읽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젊은 아티스트와 표지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좀 더 밝은 느낌의 도스토옙스키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사랑하는 존재와 일에 대해 끊임없이 알고 싶은 그는 서로 다른 생각과 역사를 지닌 사람과 사람, 세대와 세대 사이를 이어주는 유능한 통역자와 닮아 있다.
- 미메시스 홍유진 대표 집이라는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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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예술가 장자크 로니에Jean-Jacques Launier의 저서 <영혼의 기억>에서 발췌한 한 구절이 떠오른다. “하나의 이야기에는 때때로 어떤 매듭이 있어서, 그 매듭을 잡아당기면… 온 우주가 열리며 잠깐 동안 놀라운 비밀을 드러내주죠.” 미메시스 홍유진 대표가 평창동에 마련한 새 보금자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섬세하게 묶어둔 끈과도 같았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1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