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에 자리한 카멜리아 힐. 최근 오픈한 향산기념관은 40여 년간 동백 언덕을 일군 양언보 회장과 임태순 여사의 설립 계기와 가치·철학을 나누는 공간으로 사랑채와 다실, 중정 등 별채와 외부 공간을 여유 있게 구성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했다. 안채를 중심으로 집을 좌우로 넓게 벌려 경관을 품을 수 있도록 구성한 한옥은 대한민국 한옥 공모전 대상을 수상한 황두진 건축가가 설계하고 정영수 대목장이 시공했다.
해발 250m의 척박한 황무지. 모자를 쓴 중년 남성이 허허벌판에 서 있다. 남자는 이곳에 피어날 동백꽃을 상상한다. 이른 봄 분홍 참꽃을 시작으로 은은한 치자 향으로 물든 여름을 지나 하얗고 붉은 꽃망울의 추백秋栢을 맞는 시간. 제주의 돌과 바람, 물과 조화를 이루는 동백 언덕의 사계는 언제나 출발선으로 되돌아가는 남자의 인생 좌표와 같다.
움트는, 봄
‘카멜리아 힐Camellia Hill’은 말 그대로 동백 언덕이다. 6만여 평의 동산에는 가을부터 봄까지 시기를 달리해서 피는 동백나무 6천 그루가 자연 모습 그대로의 숲을 이룬다. “일본 출장길에 우연히 동백꽃을 봤는데, 어린 시절 고향 대평리 언덕에서 보던 꽃이 떠올랐어요. 흔히 피어난 새빨간 동백꽃이 봉오리째 뚝뚝 떨어지고, 하얀 눈밭에서 또다시 붉게 피어나는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죠.” 1960년대 고구마 전분 공장을 시작으로 과수원, 건설업체를 운영하며 사업가로서 탄탄히 내실을 다져온 양언보 회장은 1984년 과수원의 감귤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동백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당시 감귤나무는 두 그루만 있으면 자식 대학 공부를 시킨다고 할 정도로 수익성이 좋던 수종이라 그의 결정을 두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동백에 대한 열정은 쉽게 잠재워지지 않았고, 1998년부터는 아예 건설에서 조경으로 업을 바꿔 지금의 카멜리아 힐을 본격적으로 조성해 나갔다. 처음 동백나무를 심은 감귤밭을 중심으로 부지를 확장하고, 섬 전체를 돌며 특이하고 오래된 동백나무를 구했다. 국내에는 동백 전문가가 없을뿐더러 관련 서적이나 논문도 찾기 힘들어 일본, 중국, 유럽 등을 다니며 자료와 품종을 모았다. 그리고 2009년 온 세상의 동백을 다 모아둔 수목원 카멜리아 힐이 문을 연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맨주먹으로 30년간 사업을 하면서 한길을 걸었으니 또 다른 길도 필요하지 않을까?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할 건지 고민하기 시작할 즈음이던 것 같아요. 동백은 사군자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줘요. 겨울에도 푸르고, 눈 속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강인함이 있죠. 게다가 꽃이 질 때마저 아름다워요. ‘피어날 때는 힘겹게, 떨어질 때는 아름답게’, 동백처럼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게 꿈입니다.”
리빙룸 역할을 하는 안채의 대청. 기둥, 보, 도리, 서까래 등 대부분의 목부재는 강원도 삼척 지방의 육송을 사용했다.
입식으로 설계한 부엌과 다이닝 공간.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벽면은 스터코 도장으로 마감했다.
여덟 가지 동백꽃 장식이 소담한 매력을 더하는 꽃담.
자개장과 에그 체어가 색다른 조화를 이루는 침실. 편백나무 재질이 포함된 천연 벽지, 삼베로 만든 한식 바닥재 등 친환경 재료를 다채롭게 활용했다.
향기로운, 여름
가브리엘 샤넬은 향기도 가시도 없는 카멜리아의 절제미에 매료됐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 유배 시절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붉은 동백꽃의 아름다움에 빗대어 표현하곤 했다. 우리는 동백을 향기가 없는 꽃 또는 흰 눈 속에 피어나는 붉은 꽃으로 알고 있지만, 동백 언덕에서 마주한 동백은 이러한 통념에서 한참 벗어난 팔색조의 매력을 품고 있다. 먼저 동백은 겨울 꽃의 여왕으로 불리지만 겨울에만 피는 것은 아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꽃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하백夏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나눈다. 하얀색, 분홍색, 노란색까지 꽃잎의 색도 다양하다. 하얀색만 해도 족히 50종은 찾을 수 있다. 향기가 없다는 것도 잘못된 정보다. 카멜리아 힐에는 전 세계의 향기 나는 동백 8종 중 6종을 식재해 달콤하고 매혹적인 동백 향기에 취할 수 있다. “카멜리아 힐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서식하는 2천여 종의 동백 중에서 제주 땅에 적응해 살아남은 5백여 품종을 만날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하백이 가장 힘든데, 덴마크 수종의 노란색 동백을 몇 번 가지고 왔는데 모두 실패했어요. 대신 9월 말부터 피는 동백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육성한 주황색 ‘무궁화 동백’까지…우리 동백 고유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지요.”
카멜리아 힐의 동백나무는 그냥 보고 즐기는 것을 넘어 뿌리부터 잎과 꽃, 열매까지 버리는 게 하나도 없다. 전통적으로 미용 재료로 쓰인 동백 오일을 활용한 화장품과 동백꽃차(동백은 차茶과 나무다)를 선보이는 것은 물론, 원료 재배부터 제조까지 직접 맡아 한다. 관광객을 위한 굿즈는 젊은 여행객에게 인기가 높다. 이른바 1차 산업부터 6차 산업까지, 부가가치 높은 작물과 관광·문화 콘텐츠가 결합된 ‘동백’의 비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6만 평의 부지에 열여섯 코스의 수목원 관리가 녹록지만은 않다. 동백 언덕의 하루 일과는 아침 7시에 시작한다. 전직원이 6시 40분에 출근해 10분간 ‘동백사랑운동’ 체조를 한 뒤 관람객이 입장하기 전까지 7백여 종의 꽃과 나무, 돌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체크한다. 그 정성은 관람객이 가장 먼저 알아본다. “손님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무더위에도, 비바람에도 힘이 솟지요. ‘눈이 모자라서 다 못 보겠다’며 달뜬 목소리로 감탄하는 분도 계시고, ‘친구들 다 데리고 올걸’ 하며 아쉬워하는 분도 계세요. 좋은 향기는 만리를 간다고 하잖아요. 동백의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은 제마음처럼 좋은 건 나누고 싶은 마음이 통通한 거지요.”
매일 아침 명상하고 책을 읽는 누마루. 창을 열면 멀리 산방산과 마라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양언보 회장의 조부모와 부모가 살던 전통 초가집을 옮겨 지은 ‘망해초당’. 손자 정지성 군, 양윤서 실장(딸), 박혜란 차장(며느리), 양정우 이사(아들)와 카메라 앞에 섰다.
다실 ‘다정’은 설립자와 관람객의 소통 공간이다. 추위를 이겨내고 맺은 동백나무겨우살이는 차로 즐기면 은은함이 일품이다.
무르익은, 가을
가을은 50분 코스로 체험할 수 있는 동백 올레길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계절이다. 1년의 기다림을 끝으로 동백나무는 하얗고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고, 맥문동과 억새는 보라색과 황금색으로 들판을 수놓는다. 치자 향 가득하던녹색 숲은 서서히 단풍으로 물들면서 계절에 깊이를 더하고, 자연 그대로 제주 화산의 얼굴이 담긴 검은 돌은 있는듯 없는 듯 눈길을 끈다.
“동백 언덕의 주인공은 동백이지만, 보물은 바로 초가삼간이에요. 귤밭을 갈아엎고 가장 먼저 저희 조부모와 부모님이 사셨고, 제가 나고 자란 전통 초가집을 옮겨 지었어요. 이곳에서 아내와 20년을 지냈습니다.” 답은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허허벌판에 초가집을 옮겨놓고 매일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빛과 바람을 관찰하며 나무를 한 그루, 두 그루 심었다. 밭을 일구는 데 학위는 필요 없다. 땅의 섬세한 소리에 귀 기울이면 그만이다. “나의 스승은 자연이고, 토양입니다. 자연은 절대 정복하는 게 아니죠. 기념관을 지을 때 콘크리트 건물이 아닌 한옥을 선택한 것도 같은 이유예요. 제주의 좋은 자연과 어우러지는 집으로 한옥만 한 게 또 있나요?”
카멜리아 힐의 사계. 제주를 상징하는 분홍 참꽃, 벚꽃, 철쭉, 튤립 등이 동산을 화려하게 수놓는 봄을 지나 여름에는 곱고 아름다운 수국과 보랏빛 맥문동, 은은한 치자 향이 가득한 녹색 숲으로 우거진다. 가을이 오면 억새와 가을꽃 향연이 시작되고 일년의 기다림을 끝으로 동백나무는 하얗고 붉은 꽃망울을 떠뜨린다. 많은 이들의 포토 스폿이 되는 꽃 터널과 떨어진 꽃잎이 레드 카펫이 되는 겨울은 동백 언덕의 가장 찬란한 순간. 추위가 깊어질수록 수십여 종의 동백꽃이 만발해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우아하고 이색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주소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병악로 166 문의 064-792-0088
양언보 회장의 호를 딴 ‘향산기념관’은 동백의 가치와 철학을 나누는 공간이다. 회장 내외가 거주하는 안채와 라이브러리 역할을 하는 사랑채, 다실로 구성한 기념관은 이곳을찾는 관람객은 물론 지인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먼저 대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제주의 바다와 한라산의 백록담을 떠올리게 하는 수水 공간을 지나 안채와 다실이 연결된다. 채와 채 사이의 동선은 꽃담과 징검다리를 활용해 각 채가 서로 독립적 기능을 한다. “습이 많은 제주는 사실 한옥의 불모지예요. 20년 전부터 한옥을 짓겠다는 바람으로 전국의 유명하다는 한옥은 다 보러 다녔어요. 언젠가 지을 한옥을 위해 편백나무를 심었고요, 몇 해 전에는 예행연습 삼아 작은 정자를 지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의 노력이지요.” 한옥 설계는 대한민국 한옥 공모전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황두진 건축가가 맡았다. 제주 민가뿐 아니라 관덕정, 제주목 관아, 대정향교 등 조선시대의 공공 한옥 등을 폭넓게 답사한 황두진 소장은 일반 한옥의 구법과 공간 구성을 적용하면서 현무암 쌓기 등 제주 고유의 재료와 공법을 활용했다. 또한 기와는 건식 공법을 적용하고 기둥 초석에 촉을 만들어 기둥이 밀리는 것을 방지, 추녀는 금속으로 보강했다. “우리 한옥의 백미는 차경입니다. 안채에 오르면 거실, 누마루, 부엌 식탁 어디에서든 제주 앞바다를 볼 수 있지요. 날씨가 좋으면 집 안으로 마라도, 가파도, 산방산이 들어와요. 한라산과 바다를 다 품은 이런 집이 또 어디 있습니까?”
안채에서 바라본 마당. 가운데 수 공간은 중정이면서 동시에 안채와 사랑채, 다실 등 각 동을 적절히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수 공간은 상황에 따라 물을 빼면 일반 마당, 즉 돌의 정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돌담 안에 옹기종기 모인 제주 옹기. 된장, 고추장, 장아찌와 각종 효소, 과일까지 담겨 있는 천연 저장고.
카멜리아 힐의 유니폼을 입고 정원 감독을 나선 지성 군.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는 동백 정신을 이어갈 카멜리아 힐의 미래다.
준비하는, 겨울
매서운 바람이 눈 대신 꽃잎을 땅에 떨구는 멋진 겨울을 만끽해본 적이 있는가. 카멜리아 힐의 겨울은 사계절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다. “누구나, 언제나 봄 속에 살지는 못하잖아요. 겨울에 해야할 일을 제대로 알아야 봄을 맞을 자격이 있지요. 자연에 대입하면 삶의 모든 문제가 단순 명료해집니다.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려면 땅속 뿌리가 단단해야 해요. 적당한 서리는 땅의 흙을 잘게 부수고 해로운 해충을 없애줍니다. 드러나지 않고 묵묵히 건강한 뿌리를 만드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면, 열매를 맺는 것은 다음 세대가 할 일이지요.” 모든 자연이 쉬어 가는 겨울, 하얀 눈밭을 새빨갛게 물들인 동백꽃길은 결승선이 아닌 새로운 출발선이 된다. ‘세상의 동백을 한자리에 모으겠다’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카멜리아 힐을 함께 일구는 가족들이 다시 출발선에 섰다. 그 모습을 보니 열혈 정원가 카렐 차페크Karel Capek의 저서 <정원가의 열두 달> 속 구절이 떠오른다. 한 해는 언제나 봄이고 인생은 언제나 청춘이며 꽃은 언제고 핀다. 가을이 왔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우린 다른 방법으로 꽃을 피우고 땅 밑에서 자라며 새로운 싹을 펼쳐내느라 여념이 없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자들이나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말을 쉽게 내뱉는 법이다. 1년 열두 달, 11월에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존재들은 가을, 겨울을 모른다. 찬란한 여름만이 계속될 뿐이다. 그들에게 쇠락이란 없다. 오직 발아만 존재한다.
- 제주 카멜리아 힐 양언보 회장 동백 인생
-
오전 7시, 목장갑을 끼고 정원 곳곳을 누비며 나무와 돌을 꼼꼼히 살피는 동백 언덕의 터줏대감. 양언보 회장이 40여 년간 일군 언덕은 사계절 피고 지는 동백처럼 시간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