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말에 어머니와 상봉하는 형님들 가족과 누님을 위한 별채. 노출콘크리트와 멀바우만으로 마무리된 미끈하고 사색적인 집이다. 언덕 위에 자리한 이 집이 땅을 위압적으로 누르게 될까 걱정한 건축가는 건물 높이, 특히 2층의 높이를 최소화했다.
2 이 집에 살게 되면서 이재관 씨(오른쪽)는 스님들이 왜 아침마다 마당을 쓰는지 알게 됐다. 딱 그 마음으로 아침마다 마당에 물을 뿌린다. 집 지으면서 이 집 식구가 됐다고 자랑하는 건축가 구만재 씨와 이 집의 터줏대감 진돗개 몽이.
3 별채의 주인인 누님과 형님 가족.
4 언덕 위에 자리한 이 집은 둔각의 ㄴ자로 다리를 벌린 채 슬쩍 틀어 앉았다. 그래서 ‘양평’이 주는 온기, 바람, 냄새를 흠뻑 들이마실 수 있다. 집주인이 사는 큰 집과, 주말이면 모이는 가족을 위한 별채가 덱으로 연결되어 있다. 두 채를 보호하고 같은 기운으로 묶어주는 건 바로 큰 집 지붕의 ㄱ자형 구조물.
홀로 된 50대 남자, 꺼슬꺼슬 마른 수염이 돋기 시작한 중학생 아들, 손자를 자식처럼 돌보는 팔순 노모, 집안을 살뜰히 챙기는 50대 누님, 자식 같은 개 네 마리. ‘이미 거기에 먼저 도착해버린’ 결핍의 풍경이다(세상의 잣대로 보자면). 이들은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뒹굴고 함께 잠을 자는 관계, 가족이다. 주말이 되면 세 형님이 식솔을 이끌고 어머니가 계신 이곳으로 온다. 이들도 역시 가족이다. 인연과 우연이 아닌 필연과 운명적 선택이 있어야 가능한 집단, 가족.
촘촘한 세상의 그물이 치워진 곳, 양평 용문사 가는 길에 이 집이 있다. 낮은 언덕에 조용히 웅크린 사색적인 건물이다. 서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막내아들이 가족이 다시 모이는 풍경을 그리며 이 집을 지었다. 네모꼴 건물 두 채가 이어져 있고, 그 ㄴ자 건물은 한옥처럼 마당을 품고 있다. 집은 멋쟁이 집주인처럼 참 미끈하게 생겼다. 동남향의 큰 집엔 상주하는 가족 세 명이 산다. 남서향의 작은 집은 누님과 형님들 가족의 세컨드 하우스 겸 게스트하우스다. 이들이 한 프레임 안에서 만들어내는 풍경은, 역시 가족이다. 때로는 짐이고, 때로는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한 자리일 뿐이고,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쓴맛도 씹어 나누게 되는 존재, 가족. “몇십 년 동안 따로 살다 이제 겨우 주말에만 살 비비는 가족들인데, 한공간에서 복닥거리며 살라는 건 폭력이죠. 본가의 분위기가 주말 가족들 때문에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1 자작나무 구조물의 일부분을 파고 박스형 수납장으로 꾸며 실용성을 더했다.
2 역시 계단실. 이렇게 어느 순간 깊어지는 공간 때문에 이 집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풍경이 꽤 많이 잡힌다. 3 자작나무로 만든 계단실. 묘한 각도로 둥글려져 있는 이 구조물 덕분에 이 집 식구들은 마음먹기에 따라 시선도 동선도 서로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 계단실의 문 안쪽은 부엌의 잡동사니 처리용 창고다. 그 뒤쪽으로는 자작나무로 만든 천장 구조물이 보인다. 바닥은 모두 이어지지만 천장은 따로 노는 풍경이다. 이렇게 각각의 공간이 구별되길 건축가는 바랐다.
4 집주인 이재관 씨만을 위한 공간인 2층의 계단실. 천창이 뚫려 있어 햇빛을 흠뻑 빨아들일 수 있다. 무뚝뚝한 느낌의 벽에는 그가 베트남에서 1백 달러 주고 사 온 무명 화가의 그림을 걸었다. 불협화음 속의 협화음이다.
.” 건축가 구만재 씨는 그래서 건물을 나눴다. 독립적인 자기만의 공간을 바란 집주인 이재관 씨를 위해 큰 집의 2층을 온전히 내주고, 모자지간처럼 살아온 할머니와 손자에게 큰 집 1층을 함께 쓰게 했다(놀라운 건, 예민한 사춘기 총각 방엔 화장실이 없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살았던 손자는 할머니 방을 통해야만 화장실에 갈 수 있다. 손자는 이제 할머니의 보호자, 관찰자인 것이다). 서울 나들이가 잦은 누님은 작은 집 2층의 별당 마님이 됐고, 캐노피 침대로 방을 꾸며놓았다. 주말에 어머니와 상봉하는 형님들 가족은 작은 집 1층의 주인님 겸 손님이 됐다. 이 두 집은 바닥이 붙어 있지만(데크로 연결되어) 몸채는 떨어진 엄연한 별채다. 두 채를 사이에 두고 물길이 흐른다. 언덕 위에서 흘러내려온 물은 데크의 중심을 파고들며 흐르다, 축대 밑의 우물로 떨어지고 다시 배관을 타고 언덕 위로 올라온다. 가족이 모두 모이면 이 물길을 등 뒤에 둔 채 덱에서 상추쌈도 싸 먹고, 바비큐도 굽고, 개밥도 준다. 이슥한 밤이 되면 제각각 흩어져 자신의 공간으로 숨어든다.
헤쳐 모여 한 가족들의 공간은 들여다볼수록 우리 옛집을 닮았다(고대광실 기와집이나 한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최근까지 살았던 그냥 그런 집). “옛집들은 그랬어요. 한눈에 집 안 풍경, 소리가 모두 드러났지만 식구들은 그게 부담스럽지 않았어요. 몰래 <선데이서울>을 보는 내 등짝도 안 가려지고 방음도 하나도 안 됐지만 그게 또 장점이기도 했어요. 식구가 함께 사는 집이니까.” 그래서 이 집은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그런 집이 됐다. 뭐, 이런 식이다. 거실에서 주방을 내다보면 훤하게 툭 터지지 않고 시선에 따라 가려지고, 주방에서 거실을 건너다 보면 또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먹기에 따라 동선도 시선도 마주치지 않으니, 가장 사적인 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다가 또 마음만 먹으면 참견도 하고 딴죽도 걸고 소통도 하는 그런 공간이다.
1 흩어져 살던 가족이 새로 모인 둥지. 이 둥지의 중앙엔 물길이 흐르고(사진에선 정말 유심히 봐야 보인다. 두 건물 사이로 길게 파인 물길), 그 위로 마당 같은 데크가 자리한다.
2 부엌이 넓은 편이고 천장고도 높기 때문에 상부장을 달지 않고 대신 큰 사이즈의 타일을 붙여 넓은 느낌을 강조했다. 주방 수납장의 일부를 레드 컬러로 도장해서 밋밋한 주방에 시각적인 악센트를 주었다.
3일인분의 고독, 일인분의 독립을 바란 집주인을 위한 서재 겸 침실. 타일로 마감한 침대 헤드보드가 인상적이다. 이 침대에 누우면 딱 그 시선의 높이쯤에 가로로 긴 창이 나 있다. 그 창으로 양평의 자연이 주는 온기, 바람, 습기를 관찰하고 느낄 수 있다.
4가족들이 상주하는 큰 집의 거실. 멀미 나게 화려하지 않아 더 좋은 공간이다. 이런 집에선 창밖을 내다보며 자연의 움직임, 시간의 흐름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자작나무로 만든 천장 구조물, 그리고 그 안의 몬드리안풍 패턴은 한참 두고 봐야 보인다. 인위적인 디자인 대신 자연을 먼저 즐기라는 건축가의 배려다.
드러내고 감싸이는 묘미는 외부로 나가도 이어진다. 사는 사람은 밖이 훤히 내다보이지만 외부에선 적나라하게 다 보이지 않는다. 건물이 둔각의 ㄴ자로 펼쳐진 채 슬쩍 틀어 앉은 덕이다. 주방 옆의 한갓진 공간, 후정도 비슷하다. 이 후정은 이 집에서 가장 사적이고 내숭스러운 공간이다. 주방 가까이 다가가야 겨우 그 속살을 드러낸다. 우산처럼, 액자 프레임처럼 집을 두른 ㄱ자 지붕 구조물도 같은 맥락이다. “양평의 지형상 건물 서쪽으로 붙은 면은 태양에 너무 많이 노출돼요. 쓸모없는 덩어리 같지만 이 녀석이 서향의 햇빛도 막고, 2층 욕실의 통유리창도 좀 가려주죠. 주인이 산그림자를 바라보며 목욕할 수 있을 만큼은 열려 있어요.”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오면, 바닥은 이어져 있지만 천장으로는 주방과 거실과 계단실이 모두 따로 논다. 거실 천장엔 자작나무로 된 몬드리안풍 패턴이, 그 사이 계단실엔 둥글려진 구조물이, 주방 천장엔 역시 자작나무로 된 칸딘스키풍 패턴이 유쾌하게 따로 논다. 따로 또 같이 노는 식구처럼, 이 집처럼.
이 집은 사진발이 안 받는다. 처음엔 구석구석 살뜰히 채우고 꾸미는 안주인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싶었다. 자세히 둘러보니 이 집엔 ‘찐한’ 마감재 하나 없고 남들 다 쓰는 화려한 샹들리에 하나 매달려 있지 않다. 대신 흙냄새 나는 재료 ‘노출콘크리트’와 나무 냄새 나는 재료 ‘멀바우’ ‘자작나무’가 맨송맨송, 무뚝뚝하게 자리를 꿰차고 있을 뿐이다. 그조차도 세련되게 다듬으려 애쓴 티가 안 보인다. 그건, 양평이기 때문이다. 이런 동네, 이런 집에선 식탁 앞에서, 덱에서, 침실에서, 욕실에서 밖을 내다보고 살기만 하면 된다. 집 안을 어슬렁거리며 자연의 움직임, 시간의 흐름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건축은 어차피 자연과 놀기 위한 소도구에 불과하다.
1 가족의 회귀, 새로운 세컨드 하우스의 모습을 보여준 양평 주택 ‘메종 5911’(59-11번지에서 이름을 따왔다). 천천히 내리는 평화, 저 풍경의 중심에는 어머니가 있다.
2 한량처럼 잘 놀고 멋도 아는 집주인 이재관 씨.
3 주방의 중심이자 이 집의 중심인 할머니. 그리고 아들 같기도 하고, 손자 같기도 한 건축가 구만재 씨.
건축가 구만재 씨는 이 집을 지으면서 한식구가 됐다고 자랑했다. 어머니는 막내아들 같은 그를 위해 쑥을 캐 쑥떡을 쪘다. 또 그 막내아들이 지은 집이 잡지에 잘 나와야 한다면서 어머니는 아침부터 옷을 세 번이나 갈아입었다(제일 처음 입었던 옷은 한복이다). “그렇다고 뭐 깊은 정신적 교류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에요. 식구 사이에 그런 게 있진 않잖아요. 식구는 그냥 식구일 뿐이죠.” 그러고 보면 가족이란 한집에 사는 서로 다른 사람일 수도, 운명 공동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구조가 아니라 관계인 것 같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구만재 씨도 이 프레임 안에 한 풍경으로 잡히는 가족이 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요모조모 식구들에게 딱 맞춰진 이런 집을 어떻게 지었을까. 들 위의 집들이 따뜻한 불을 켜기 시작하는 때, 할머니는 얼갈이 배추를 씻고, 누님은 쌈장에 두부를 으깨어 넣고, 막내아들은 참숯을 피웠다. 허해진 위장을 위해 바비큐 파티를 앞에 둔 저녁, 형과 형수도 막 도착한 참이다. 카메라 프레임 안에 이 풍경을 담는다. 헐겁기도, 도탑기도 한 그 이름, 가족이 보인다. 세상이 점점 변할수록 이런 집, 이런 세컨드 하우스, 이런 게스트하우스가 많아질 것이다. 이건 새로운 가족의 터전이니까. 그 중심엔 우리 어머니가 서 계신다.
* 경제학도였다가예술학도로, 다시 건축으로 배움을 넓힌 구만재 씨는 ‘사는 이의 체취가 담긴 집’을 지으려고 노력한다. 그에게 집을 짓고 싶다면 르씨지엠 (02-583-7024)으로 연락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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