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노경조·송효경 부부. 집 안 중앙에 스킵 플로어로 단 차이를 둔 거실과 주방은 서로 분리되면서도 시각적으로 연결되어 쾌적한 공간을 연출한다.
10년이라는 시간 위를 걷다
노경조 선생이 처음 집을 짓고 싶노라고 디아건축의 정현아 소장을 찾아간 것이 10년 전 일이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어느 단정한 주택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 집의 건축가가 궁금해 직접 찾아가본 것이죠.” 이후로 그들은 이따금 정 소장의 사무실에서, 때로는 부부의 양평 작업실에서 도자와 건축, 나아가 문화와 예술, 인생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집 짓는 일은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어느 날 사무소 직원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대체 왜 만나시는 거죠?” 정 소장은 내심 알고 있었다. 부부가 자신에게 눈높이를 맞춰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서로를 깊이 있게 관찰하며 상대에 대해 신뢰가 두텁게 쌓였을 무렵, 모든 것이 적당한 때가 왔다. 작년 3월이었다. ‘공간을 위한 공간’이 아닌 ‘사람을 위한 공간’이 먼저라 믿는 정현아 소장은 부부의 삶과 닮은 집을 짓고 싶었다. 취향 정도가 아니고 무려 ‘삶’이다. 감히 다 알 수는 없으나 오랜 세월 동안 모아온 단서가 한둘 있었다. 정 소장이 찾은 첫 번째 단초는 노경조 선생의 ‘합’ 시리즈였다. 영국 대영박물관에서도 전시한 바 있는 그의 도자는 소박한 한국적 멋과 모던함을 겸비한 대작이다. (평창동 주택은 멀리서 바라보면 ‘합’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두 번째 결정적 실마리는 아내 송효경 씨가 건넨 박노해 시인의 어느 시구였다. “사람을 볼 때면/ 3단을 생각한다/ 단순한가 단단한가 단아한가.” 듣는 순간 정소장은 무릎을 탁 쳤다. 부부가 살아온 궤적과도 딱 들어맞는 시였다. ‘단순, 단단, 단아’를 합친 ‘3단’이라는 단어에서 평창동 주택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집 내부는 화이트 벽체와 자작나무 마루로 마감해 밝고 단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식탁을 정면으로 보는 두 개의 문은 세탁실과 서가로 이어진다.
건축의 삼단논법
부부가 구입한 평창동 부지는 그 위에 집이 한 번도 들어 앉은 적이 없는 빈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경사가 가파르고 좁아 건물을 올리기에 적합한 조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지의 급한 경사나 까다로운 주택 법규 등 여러 가지 제한이 결국 집의 성격을 결정했다. “땅이 좁고 가파른 대신에 지대가 높아 전망이 좋았어요. 그래서 ‘수직적’으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이에 스킵 플로어 방식을 적용한 천고 높은 집을 구상했다. 바닥을 일반적인 일 층분이 아닌 반 층차 높이로 올리는 스킵 플로어는 바닥의 높이 차로 공간이 분리되지만, 시야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공간감은 한결 깊고 풍부해진다. 구조는 ‘단순’하다. 지하는 자녀 방, 1층은 거실과 다실을 배치하고, 1.5층에는 주방, 2층에는 침실을 마련했다. 1층의 거실이 가족실이라면, 위층의 주방은 유리창 너머로 비오는 풍경을 감상하며 책을 읽거나 손님을 초대해 차를 마시기도 하는 사랑방이다. “우리 부부가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에요. 천고가 가장 높고 시야가 탁 트여 집의 메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죠.” 집 안의 조직 방식이 정해지면서 외관에 대한 구상도 자연히 그려졌다. “산 중턱에 치솟은 바위 같은 ‘단단’한 덩어리를 떠올렸어요.” 벽돌 재료로는 검회색의 은빛 전돌을 선택했다. 덕분에 가파른 산자락과 늠름하게 뿌리 내린 소나무로 둘러싸인 주변 환경과도 잘 녹아든다. 한편 내부는 흰색과 밝은 자작나무 마루를 사용해 ‘단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선생님의 목가구와 도자, 그림이 집 안을 채웠을 때를 상상했어요. 그 사물의 배경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군더더기를 덜어냈죠.” 노 선생이 오래전부터 수집해온 목가구와 직접 빚고 깎은 도자기, 1970년대 유화로 그린 캔버스 그림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자리한다. 이렇게 정현아 소장은 외부는 ‘단단’하고 내부 구조는 ‘단순’하며 분위기는 ‘단아’한 삼단의 집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마지막 벽돌이 올라간 것이 지난겨울이었다.
창호에 한지를 바른 다실은 아름다운 색과 비례를 보여주는 보자기, 오래된 목가구, 소반 등으로 꾸며 한국적 미감을 살렸다.
북한산의 우람한 산세와 구불거리는 소나무 가지 등 주변 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외관 전경. 검회색의 은빛 전돌로 정교하게 쌓아 마치 단단한 암석 조각 같다.
주방에서 계단을 바라본 정면에는 거실과 다실이 나란히 자리한다.
1.5층에서 1층 거실로 시선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가장 위층에 마련한 침실. 박공형 천장과 창문으로 인해 아늑한 오두막집에 들어간 기분이 든다.
노경조·송효경 부부와 10년이란 오랜 인연을 쌓은 디아건축사사무소의 대표 정현아 소장.
입구에서 왼편으로 거실과 다실이 이어지고, 오른편은 계단을 수직축으로 공간이 분할된다.
기꺼이 수형인이 되겠소
어릴 적부터 건축가를 동경해온 노경조 선생은 일흔의 나이가 되어 얄궂은 꿈을 품었다. 바로 건축가가 설계한 집에 철저히 ‘순종하며’ 사는 것. “자기 세계가 분명한 건축가의 시각 속에 한번 빠져들고 싶었다우.” 건축가를 향한 동경은 존중과 존경으로 깊어졌다. “이들이 공간을 구획하고 나눠주면, 나는 그 밑의 수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들이 살라는 방식대로 살아야지.” 단 전제 조건이 있다. ‘건축가의 애정 속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 물론 생활하다 보면 불편한 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는 이마저 건축가가 나름대로 의미를 둔 것이라 여긴다. 이를테면 안방은 이부자리만 겨우 펼 정도로 조그맣다. “좁긴 하지만 동굴 속에 웅크리고 자는 것처럼 아늑한 기분이 들어.” 건축가의 횡포일지언정 충분히 만끽하며 살리라는 노 선생의 말에 정현아 소장은 “사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 말한다. 집은 건축가가 설계한 그대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집도 사람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차츰 변해간다. “주인이 집을 길들이면서 집이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건축가로서 또 다른 즐거움이에요.” 스스로 수인이 되겠노라 말한 노 선생도 자신의 방식대로 집을 점유해가고 있다. 산봉우리가 훤히 내다보이는 코너 창에는 곰 인형이 밖을 바라보고 있고, 그 아래에는 고양이 준이의 보금자리가 자리 잡았다. 햇살과 바람이 드는 곳은 화분에 자리를 내주고, 그 주변으로 책과 연필, 좋아하는 물건이 쌓여간다. 건축가도 예기치 못하는 삶의 동선과 습관이 구석구석에 새겨진다. 건축에 삶의 타래가 엮이면 비로소 ‘단란’한 집이 되는 것이리라.
건축가 정현아는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학부와 대학원,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과 뉴욕에서 다년간 실무 경험을 쌓고 2004년 디아건축사사무소를 설립했다. 한국건축가협회상 BEST 7(2016), 서울시건축상 우수상(2016)과 장려상(2008), 경기도 건축문화대상 금상(2016) 등을 수상했다.
오픈 하우스
정현아 소장이 설계한 노경조 도예가 부부의 집에 독자를 초대합니다. 건축가가 애정 어린 시각으로 지은 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일시 5월 28일(화) 오전 11시
장소 평창동
참가비 2만 원(정기 구독자 1만 원)
인원 5명
신청 방법 <행복> 홈페이지 ‘이벤트’ 코너에 참가 이유를 적어 신청하세요.
- 건축가가 지은 집 단단, 단순, 단아한 평창동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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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고, 단순하고, 단아하다. 이른바 ‘삼단’의 미학을 갖춘 평창동 주택은 노경조 도예가와 그의 아내 송효경, 건축가 정현아 소장의 합작품이다. 건축가의 사고 속에 깊이 몰입하기 위해 기꺼이 ‘수형인’이기를 자처했다는 부부는 이곳에서 호사스러운 형벌을 누리고 있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