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아공에서 음악 교사를 지낸 주디스 스쿠만 씨는 기타와 피아노 연주는 물론 노래 실력이 수준급이다. 한국에 와서 2년 남짓 배운 그림은 아마추어 수준을 훌쩍 넘긴 상태. 이젤에 놓인 그림은 모두 그의 작품이다.
2 아프리카 자연 풍경을 담은 그림과 흑단 목각상.
한옥 지붕이 보이면 우리 집도 한옥 아닌가요?
주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저는 서울에서도 한가롭고 운치 있기로 유명한 가회동에 자리 잡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산세도 아름답거니와 무엇보다 한옥 보존 지구라는 특성이 말해주듯 낮고 단아하게 펼쳐지는 기와지붕의 스카이라인은 같은 서울에 사는 사람이 봐도 매력적이다. 그리고 이 고요한 아름다움은 저 멀리 아프리카 남단의 드넓은 하늘 아래 살던 60대 부부의 심미안을 비켜갈 리 없었다.
“2년 전 한국에 부임하면서 느낀 서울은 거대한 도시 그 자체였죠. 젊고 역동적인 모습, 그런데 대사관저를 마련하기 위해 집을 구하다 보니 이렇게 거대한 도시에서 박스처럼 생긴 건물에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던 중 가회동에 오게 되었는데, 그동안 봐온 서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어요. 동네를 거닐다 보니 한적한 것이, 독특한 지붕이며 돌담에 뻗은 호박 덩굴의 호박꽃이 그렇게 인상적일 수 없었어요. 정확하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 모든 것이 한국적인 정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왕 한국에 사는 거, 정말 한국다운 곳에서 살자 싶어 선뜻 이곳에 대사관저를 마련했습니다.” 그 후 주디스Judith 씨와 그의 남편 스테파너스Stefanus 씨는 가회동에 있는 단아한 2층 주택을 대사관저로 꾸몄다. 하지만 이들이 가회동이라는 동네만 보고 무작정 이사할 리는 없을 터. 과연 이 집을 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부엌에서 바라본 눈 쌓인 한옥 지붕.
“이곳을 왜 택했느냐고 물어보셨죠? 저를 따라오세요.” 키 큰 회양목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정원이 보이는 거실에서 발길을 옮긴 곳은 다름 아닌 부엌. 다이닝룸에서 문을 열어야 나타나는 독립 공간인 부엌은 어른 셋만 있어도 꽉 찬 느낌이 들 정도로 아담하다. 그리고 곧 부엌에 들어선 순간 그가 왜 이곳으로 안내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싱크대 창밖 너머로 흰 눈이 살포시 내려앉은 한옥 기와지붕이 장관을 이루었고, 이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도 경험하기 힘들 만큼 새로운 세계였다. “꼭 한옥에 살 필요는 없겠지요? 한옥에 살아도 볼 수 없는 풍광을 즐길 수 있으니, 서울살이에서 더 을까요.” 한옥의 매력에 푹 빠져 있는 그는 대사관저 지붕도 기와와 닮았다 좋아하고, 아랫집의 기와 지붕 밑으로 삐죽 나온 붉은색 철제 연통까지 ‘멋있는 컬러 조합’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1 주디스 씨의 어머니가 옐로 트리를 조각해 만든 시계가 걸려 있는 다이닝룸.
2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뤄진 계단 아래 창가에 남아공 전통의 양조 기기가 놓여 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
독일계 조상을 둔, 남아프리카공화국 토박이인 스쿠만 부부는 나이에 비해 외교관 경력은 그리 길지 않다. 부부 모두 고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스테파너스 씨가 정계에 입문한 뒤 시작한 외교관 생활이라 이들 부부에게 서울은 네 번째 부임지다. 영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아메리카 대륙을 제외한 유럽과 아시아에 살면서 주디스 씨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는 것이다.
“남아공은 공식 언어만 11개이고 19가지 언어가 통용되는 다민족 국가로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지요. 흑인 문화와 오래전 남아공에 정착한 백인 문화도 공존하죠. 특히 백인 문화는 처음 남아공에 정착한 네덜란드계에서 시작해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문화 등이 더해져 지금은 그야말로 모던의 극치를 달리고 있습니다. 와인은 프랑스 문화에서, 콜로니얼 스타일의 집과 차 문화는 영국에서, 음식은 네덜란드와 아프리카 스타일이 섞여 있죠. 한마디로 여러 나라의 장점이 혼합된 것이 남아공 스타일인데, 재미있게도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이를 하나씩 발견하게 됩니다.” 주디스 씨가 직접 단장한 대사관저는 호텔 스위트룸처럼 정갈하고 단정한 모던 클래식 스타일. 베이지 톤의 패브릭 소파와 대리석 벽난로가 자리한 가운데, 콘솔과 사이드 테이블 등에는 아프리카 수공예를 비롯해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모은 에스닉 오브제가 포인트로 놓여 있다. 침실 역시 마찬가지. 심플한 침대에 알록달록 패치워크된 에스닉 패브릭이 독특하다. 딱히 어떤 스타일이라 규정할 순 없지만, 포인트로 놓인 원색적인 컬러에 투박한 손맛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나 볼 수 있는 동물이 표현된 패브릭이며 오브제가 ‘바로 이것이 아프리카 스타일이 아닐까’ 짐작케 한다. 그런데 주디스 씨의 ‘고백’이 의외다. “그렇게 보이죠? 하지만 이 베드 스프레드는 인도에서 구입한 것이고, 조각 장식이 독특한 북엔드와 화려한 금속 장식이 있는 앤티크 나무 함은 말레이시아에서 수집한 거예요. 그런데 정말 묘하게도 닮아 있어요. 그래서 제 눈에 띄었는지도 모르죠.”
3 인도에서 구입한 베드 스프레드로 이국적인 아프리카 스타일을 연출한 침실. 검은색 원색 자수 장식 쿠션과 인형은 모두 남아공 수공예품이다.
4 거실 벽면에는 주디스 씨의 남아공 회화 소장품이 가지런히 걸려 있다.
1 베이지 톤으로 모던 클래식하게 연출한 거실. 아프리카 정취를 표현하기 위해 애니멀 패턴 쿠션과 오브제 등을 포인트로 놓았다.
2 결혼한 지 30년이 훌쩍 넘은 주한 남아공 대사 스쿠만 부부의 다정한 모습.
집 안 꾸밈의 에센스는 가족 사랑
“어제는 남아공에 있는 손녀와 통화했는데, 글쎄 학교에서 그림을 잘 그려서 받은 메달을 강아지에게 걸어줬다네요. 며칠 전 정원에서 놀고 있는데 강아지가 뱀을 잡아 자기를 보호해주었으니 선물로 준 거랍니다.” 2남 1녀를 둔 주디스 씨는 젊고 세련된 외모와 달리 벌써 손자 둘에 손녀가 셋인 할머니다. 그가 들려주는 남아공의 가족 이야기는 별세계 같다. 아침에 동물 무리가 쿵쿵거리는 발소리에 잠을 깨고, 농장을 산책하다 발견한 거대한 거미줄을 사진기에 담고, 알코올 성분이 있는 아마룰라 열매를 먹고 술 취해 비틀거리는 코끼리를 보고…. 듣는 이는 흥미롭지만 고향을 떠나 사는 그에게는 그리운 모습이 아닐까. “대신 고향의 정취와 가족을 느낄 수 있는 그림과 사진, 소품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죠.” 단정한 모던 클래식 인테리어를 추구하는 그의 집 안 곳곳을 잘 살펴보면 소박한 손맛과 정성이 깃든 수공예 작품이 눈에 띄는데 이는 다름 아닌 주디스 씨의 어머니부터 아들, 손자들이 그리고 만든 것이다. 다이닝룸과 침실에 놓인 나무 조각 시계와 거울은 91세인 주디스 씨의 어머니가 만들었으며, 강렬한 색감의 회화는 시각 디자이너인 그의 아들이 그린 것이다. 손바닥과 발바닥이 패턴처럼 찍힌 쿠션은 그의 손자, 손녀가 자신들의 손과 발을 찍어 만든 것. 가족의 사랑으로 빚은 오브제는 주디스 씨 부부에게 고향에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물론, 한국 사람들에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서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중에서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어머니가 만든 목각 시계와 거울. 이는 남아공의 대표적인 나무이자 이제는 희귀종이 된 ‘옐로 트리’로 만든 것이라 더 의미가 크다.
1, 2 영국 식민지의 영향을 받아 남아공에서도 차를 즐기는 문화가 보편화되었다. 주디스 씨가 선보인 차는 루이보스 티로 남아프리카 희망봉 고원 지대에서 자라는 아스파라사스 리네아리스Aspalathus Linearis라는 붉은 덩굴 식물의 잎과 가지를 말려 만든 것으로 카페인이 없고 각종 미네랄과 철분이 함유돼 있다. 성장기 어린이에게도 좋을 뿐만 아니라 항산화 작용이 뛰어나 피부에 좋은 차라고. 남아공에서는 밀크 타르트와 함께 즐긴다.
3 수공예가 발달한 남아공에서는 조각과 비즈 공예 등을 취미로 삼는 사람이 많다. 주디스 씨의 어머니가 옐로 트리를 조각해 만든 거울 프레임과 그가 직접 만든 액세서리.
4 가죽 다이어리 커버 역시 그의 어머니가 만든 것이다.
5 구슬과 와이어로 만든 동물 오브제와 고슴도치 가시를 모아 꽃꽂이처럼 연출한 사이드 테이블 장식. 남아공의 정취를 표현한 것이다
봄의 문턱에 들어섰지만 벚꽃처럼 내린 3월의 눈은 주디스 씨를 동심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처럼 기분을 상쾌하게 만드는 눈은 없을 거라며, 빨간 털모자까지 쓰고 눈을 맞은 그는 꽃샘추위를 ‘기꺼이’ 즐기고 있었다.
“한국도 그렇지만 남아공 사람들은 매우 가정적이랍니다.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자연환경 덕분에 주말이면 온 가족이 대자연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거나 스포츠며 각종 야외 활동을 즐기죠. 정원이나 농장에서 바비큐를 만들어 여유 있는 저녁 식사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통입니다.” 지금은 가족과 떨어져 있어 그런 시간을 갖기 어렵지만, 대신 주디스 씨는 한국에서 또 다른 가족과 그러한 기쁨을 나누고 있다. 음악 교사 출신인 그는 대사관과 자매결연 맺은 보육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거나 파주 헤이리 영어 마을에서 커뮤니티 조직위원 및 교사로 활동 중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쉽게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남아공에 대한 환상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한 남아공 대사관저에서 주디스 씨와 함께 보낸 반나절 동안 그의 말마따나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는 것, 특히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동과 가족·이웃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일 수 있어도 상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맑은 햇살이 사그러들 무렵, 창밖에 때 아닌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참으로 묘하다 싶은 날씨에 의아해하는데, 첫 만남에서 내일이 60세 생일이라며 자신의 나이를 알려준 주디스 씨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빨간 털모자를 쓰고 정원으로 뛰어나간다. “와! 정말 잊지 못할 만남이 될 듯하네요. 오늘의 인연이 이렇게 아름다운 선물을 가져다주니 말이죠.” 가장 한국적으로 느껴지는 그의 집, 그의 동네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맛볼 수 없는 한국의 겨울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1 아프리카 부족 줄루족이 사용하는 전통 술 단지는 흙으로 빚고 장작불에 구운 것으로, 단순한 형태가 돋보이는 가운데 부족 특유의 장식이 포인트. 주디스 씨가 가장 좋아하는 오브제이기도 하다.
2 비드를 엮어 만든 인형으로 현대화된 남아공 수공예 디자인이다.
3전통 기법을 이용해 현대적 소재인 와이어로 완성한 줄루족 바구니. 화려한 컬러와 모던한 형태가 매력적이다.
4 장식하지 않은 타조 알은 남아공 현지에서 개당 7천~8천 원, 그림이 그려진 것은 훨씬 비싸다. 이 타조 알 장식은 주디스 씨의 딸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5 솔방울로 만든 타조 인형은 오랫동안 남아공 대사관 사무실에 놓여 있던 것이다.
전통과 모던의 만남, 남아공 수공예 작품의 매력 흔히 아프리카 수공예품이라 하면 나무와 흙, 라피아 등 자연 소재로 만들었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요즘 남아공 수공예품은 현대적 소재와 디자인 감각이 더해져 한층 모던해진 것이 많다. 바구니의 경우 손재주 좋은 원주민들이 전화선을 꼬아 만들기 시작해 새로운 색감과 형태로 태어나면서 와이어 공예라는 한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자연 소재로 만든 것보다 한층 세련된 멋을 느낄 수 있으며 실용적이다. 비드로 만든 인형과 액세서리, 자수 패턴 패브릭 등 젊은 아티스트들이 한층 모던하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선보이고 있다. 이렇듯 세련된 남아공 수공예품은 서던 익스체인지(www.southernexchange.com.au)와 인테리어 숍 피터 까사(02-3785-1700)에서 구입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즐길 수 있는 남아공의 와인&브랜디
남아공은 애주가들 사이에서 제3세계 와인 생산지로, 여러 과실주와 고급 브랜디가 생산되는 나라로 알려졌다. 남아공에서는 1973년 남아공 최남단 지역에 와인랜드를 만들어 정부 차원에서 와인 생산을 장려하고 있다고. 세계 와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맛을 인정받았는데, 품질 대비 가격이 저렴해 인기다. 주디스 씨가 추천하는 남아공의 대표 와인은 바로 ‘니더버그Nederburg’. 풍부한 맛을 인정받으며 매년 와인 경매 행사에 소개될 만큼 고급 와인이다. 또 대중적인 와인으로 약간 드라이한 맛이 나는 라보리Laborie 카베르네 소비뇽은 특히 매운 한국 음식과 잘 어울린다. 남아공의 주류 대표 브랜드인 KWV의 와인과 브랜디도 고급스러운 맛과 향으로 유명하다. 아마룰라 열매로 만든 ‘아마룰라 크림’ 술은 캐러멜 맛이 나는 달콤한 맛으로 여성들이 좋아한다. 남아공 와인은 와인 나라(02-2632-0502)에서 판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