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해외 생활을 접고 염곡동에 집을 지은 박태성・소현숙 부부. 화이트톤의 실내 공간이 고가구와 전통 가구, 페르시안 카펫을 조화롭게 품는다.
거실에서 다이닝룸을 향해 바라본 풍경. 계단을 반 층 오르면 곧장 다이닝룸이 나오고, 방향을 틀어 올라가면 주방과 연결된다. 이처럼 가족의 공용 공간은 스킵 플로어 구조로 설계해 공간 활용도가 높고, 소통이 자유롭다. 거실 창문을 열고 나가면 곧장 테라스와 정원이 연결된다.
틈품집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틈을 품은 집’이다. 의아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집을 보면 이내 고개가 끄덕여진다. 주택을 하나의 매스(덩어리)가 아닌 부실별 매스로 구성해 공간과 공간 사이에 틈이 생기고, 땅에서 솟아오른 담장과 공중에 떠 있는 담장 사이, 담장과 매스 사이에도 크고 작은 틈이 존재해 외관부터 굉장히 독특해 보인다. 이곳은 일평생 무역업에 종사해온 박태성·소현숙 부부와 장성한 두 아들 박주형·박주인 씨까지 네 식구가 사는 집. 직업 특성상 20년 이상 해외에서 생활한 부부와 그곳에서 나고 자란 형제는 7년 전 한국으로 돌아와 대치동 아파트에서 생활하다가 작년에 염곡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가족 모두 건축과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아요. 모스크바와 LA, 시드니, 뉴델리, 프랑크푸르트로 옮겨 다니면서 생활했는데, 우리 집이라면 어떻게 꾸밀지 상상의 나래도 펼치곤 했지요.” 하지만 타향살이는 여행과는 엄연히 달랐다.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주거 환경도 제각각이어서 데커레이션이 크게 의미가 없었다던 소현숙 씨는 훗날 집을 짓는다면 스타일이나 디자인보다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주택을 짓겠다고 다짐했다. 부부는 양재 IC를 비롯해 각종 편의 시설과 가까우면서도 개발 제한 구역이어서 전원 느낌이 충만한 염곡동에 330㎡(약 99.83평) 규모의 필지를 구입했다. 그리고 차곡차곡 정리해둔 스크랩북을 들고 에이엔디의 정의엽 소장을 찾아갔다.
공간이 층층이 연결되어 단조로운 구조에서 벗어나고 공간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이 스킵 플로어 구조의 가장 큰 묘미. 특히 집 안의 한가운데에 배치한 주방에서는 모든 공간이 한눈에 보인다.
다이닝룸의 창 너머로 정원이 보이는데, 소현숙 씨가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뷰로 꼽은 곳이다.
각각의 침실은 전용 드레스룸과 욕실을 갖추었다.
주방 아일랜드는 바 타입으로 제작해 간편하게 식사할 때도 요긴하다.
담장을 지나면 펼쳐지는 반전 매력
“우연히 한 잡지에서 정의엽 소장이 설계한 건축물을 발견한 뒤 과거에 진행한 건축 포트폴리오를 빠짐없이 살펴봤어요. 사고가 굉장히 깨어 있고, 창의적으로 디자인하는 건축가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우리에게 근사한 집을 지어줄 거란 확신이 있었습니다.” 정의엽 소장은 필지 위에 건축면적 160㎡(48.4평), 연면적 240㎡ (72.6평)로 건폐율 48.74%, 용적률 55.22%의 2층 주택을 설계했다. 밖에서 보면 담장과 그 위에 또 다른 담장이 떠 있고, 주택은 그 뒤에 감춰진 형세다. 얼핏 담장도 주택의 일부처럼 보인다. “보통 담장 안에 이 정도 크기의 주택이 들어서면 마당을 조성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틈품집이 마당과 외부 테라스를 둘 수 있는 이유는 매스를 입체적으로 쌓았기 때문이지요. 넓고 시원한 마당은 없지만,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작은 마당이 있어요.” 담장은 옥상보다 높지만 중앙 부분이 탁 트여 있어 외부에서 봤을 때 위압감이 들지않고 채광과 통풍이 좋다. 한여름에는 직사광선을 막아주며, 옥상에 설치한 태양광발전설비까지 완벽하게 가려준다. 또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주고, 담장의 창 프레임 너머로 선택된 풍경을 집 안의 내밀한 공간까지 끌어오니 그야말로 담장 하나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집을 지을 때 가족 구성원 간의 독립과 소통을 위한 장치를 설계하는 것은 건축가라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 정 소장은 부부와 장성한 형제를 위해 각자의 침실은 되도록 멀리 떨어지게 배치하고, 공용 공간에 해당하는 거실과 주방, 다이닝룸, 엔터테인먼트룸은 계단을 중심으로 수직으로 연결하는 독특한 구조(스킵 플로어)를 택했다. 각각의 방은 호텔 객실처럼 디자인해 작은 슬라이딩 도어를 열면 드레스룸과 욕실이 있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고, 창 너머로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첫째 박주형 씨의 방. 천장의 높낮이를 달리해 공간에 재미를 더했다. 창과 담장의 틈새 너머로 염곡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사계절 내내 푸른 정원. 담장에 크고 작은 개구부를 두어 빛과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든다.
1층에 위치한 부부의 침실은 커튼을 걷으면 정원 풍경이 펼쳐진다.
집의 뒤쪽에서 바라본 전경. 이중 담장이 있지만 크고 작은 틈새로 아름다운 뷰를 즐길 수 있다. 대나무 정원은 창을 가려주는 근사한 파티션이 된다. ©류인근
집이 지닌 천 가지 표정
장관은 방에서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복도를 지나다니면 시시때때로 등장하는 작은 창을 통해서도 다채로운 뷰를 감상할 수 있다. 딱 아름다울 만큼만 보여주는 그 적당함이란! “이 집은 밖에서 보면 한눈에 읽히는 공간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내부에서도 창에 따라 뷰가 제각기 다르지요. 실내에서 걸어 다니다 문득 고개를 돌려서 보면 다채로운 풍경이 스쳐 지나갈 겁니다. 같은 뷰도 날씨와 시간에 따라 다른 그림으로 보일 거고요. 진정으로 살아 있는 거주 공간이라 할 수 있지요.” 정 소장의 말처럼 오전에서 오후로 갈수록 빛이 집 안 깊숙이 스며들어 낮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눈이 올 때나 비가 올 때, 석양이 질 때마다 집 안 풍경이 달라지니 온종일 있어도 좀처럼 지루할 틈이 없어요. 모든 풍경이 아름답지만 하나만 꼽으라면 주방에서 다이닝룸 너머로 바라보는 정원의 뷰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대나무와 소나무를 심은 정원은 계절에 관계없이 초록의 싱그러 움을 보여준다. 철판으로 제작한 담장에는 타공을 뚫고 창 프레임을 내 장식 요소로 활용하며 통풍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거실·다이닝룸·주방 바닥은 회색 타일로, 벽은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하고, 방은 나무 바닥재에 화이트 컬러 페인트로 마감해 따뜻한 느낌을 입혔다. 공간에서 사람과 가구가 돋보이려면 배경은 한걸음 물러나줘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엿보이는 부분. 그래서일까? 오래된 페르시안 카펫과 가죽 소파, 시어머니의 유품인 고가구와 자개장이 한데 모여 있어도 분위기가 무겁지 않고 어우러짐이 좋다(오히려 콘크리트와 고가구의 대조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또 집은 외단열 기법을 사용했는데, 당시로서는 기준보다 강화한 단열재와 삼중 로이유리를 사용해 에너지 효율성이 높고, 무엇보다 안락하고 쾌적하다. 이곳을 설계하는 내내 정의엽 소장에게 영감을 준 기사가 있었다.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사망한 뒤 그의 미망인을 인터뷰한 기자가 있었습니다. 기자는 부인에게 이곳에 혼자 살기 외롭지 않냐고 물어봤지요. 부인은 집에 좋은 추억이 담겨 있고, 매일 새롭게 나에게 말을 걸어준다고 대답했습니다. 해가 뜰 때든, 비가 올 때든 당신의 감성을 건드려주어 외롭지 않다고 했지요. 이처럼 좋은 집, 좋은 건축은 사람에게 언어 이전에 다른 감성으로 말을 건넵니다. 틈품집이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는 따스한 안식처
가 되었으면 합니다.”
건축가 정의엽은 인하대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토론토 대학 건축대학원에서 석사를 받았다. 미국의 모포시스 아키텍츠Morphosis Architects와 캐나다 엠제이엠 아키텍츠MJM Architects, 그리고 한국의 공간건축에서 다양한 문화적 맥락과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2010년부터 에이엔디AND를 설립해 건축, 인테리어, 가구를 비롯한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주요 작업으로는 지형부향집(Topoject), 표피공간 스튜디오(Skinspace), 루버월(Louverwall) 등이 있다.
- 염곡동 틈품집 틈새로 비치는, 그 적당한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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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를 지키면서 빛과 풍경을 끌어들이고, 가족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적당한 틈은 어느 정도일까? 내부가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경계를 쌓은 틈품집의 담장 안으로 들어가보니 ‘기분 좋은 적당함’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