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을 병풍 삼아 2천여 평 대지 위에 질서 정연하게 펼쳐진 농암종택. 종택은 사당, 안채, 사랑채, 별채, 문간채로 구성된 본채와 긍구당, 명농당, 분강서원, 애일당, 강각 등의 별채로 이루어져 있다. 농암 이현보(1467~1555)는 종2품 영감(참판)을 지낸 덕망 있는 관료이자 대시인大詩人이었다. 은퇴 후 고향에 내려와 물욕 없는 강호 생활을 즐기며 ‘어부가’ ‘효빈가’ ‘농암가’ ‘생일가’ 등의 시가 작품을 남겨 영남 가단의 모태가 되었다.
늦가을 농암종택에 갔더니 단풍 든 산을 배경으로 비단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 서넛이 뜰을 거닐고 있었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탄복했다. 진회색 기와지붕과 검은 소나무 기둥 사이로 빛나는 가짓빛ㆍ옥빛 두루마기의 자태라니! 일행은 종택에 묵는 손님이었다. 창덕궁 앞에서 병원과 박물관을 동시에 경영하는 분들로, 이 집 주인인 종손 이성원 씨가 쓴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를 읽고 주인과 얘기를 나누고 싶어 일부러 찾아왔다고 했다. 그 풍경의 여운은 오래갔다. 한옥과 한복이 이 땅의 산천과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경탄도 물론 있었지만, 더욱 와닿은 것은 이토록 빼어나게 아름다운 일상을 현재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는 안타까움이었다. 종택은 그냥 커다란 기와집이 아니다. 오랜 세월 전래하는 전통의 의식주를 보존하는 집이다. 나는 이 집 마당에서 치른 차종손의 혼례도 구경했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상례에도 참석했으며, 제사 후의 제삿밥(헛제삿밥 아닌)도 여러 번 얻어먹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아름답고 장엄한 통과의례, 그게 현실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기쁨을 넘은 그야말로 감격이었다.
농암종택 입구에서 바라본 긍구당.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가라’는 뜻을 담은 집이다.1370년경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이 지었고, 농암 선생은 이 집에서 태어나고 돌아가셨다. 편액 글씨는 영천자 신잠 선생이 썼다.
종택의 대부분 건물은 현재 고택 숙박 체험 공간으로 활용한다. 어느 방에서도 문만 열면 산과 강의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종손 이성원 씨가 쓴 책을 읽고 만나러 온 손님들. 이들의 두루마기 자태가 가을 고택의 풍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물 흐르는 소리가 손에 잡힐 듯 아름다운 강각에 선 농암의 17대 종손 이성원 씨.
‘저만치’ 떨어진 강과 집
한옥은 아무 데나 짓지 않는다. 건물 자체가 아니라 자리 잡는 터를 중시한다. 흔히 말하는 배산임수 좌청룡우백호는 기본 원칙일 뿐. 농암종택은 원래 이 자리가 아니었다. 도산구곡 중 4곡에 자리 잡은 분천에 있었다. 하지만 분천은 수몰되었다. 안동댐이 원흉이었다. 1970년대 중반 건설된 안동댐은 도산구곡의 골짜기마다 5백 년 이상 터 잡고 살던 ‘하회마을’ 일고여덟 곳을 물속에 삼켜버렸다(청량산과 낙동강 상류가 만나는 아홉 굽이, 굽이마다 생겨난 소沼와 담과 협과 들과 마을과 그 마을이 만들어낸 인물에 대해서는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살았으며, 위대한 인물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성원 선생의 통찰과 연구를 일독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종택 앞엔 강이 흐른다. 낙동강의 상류다. 사랑채 대청마루에서 강을 내려다보며 종손이 묻는다. “강과 집의 거리는 얼마나 되면 좋을까?” 거기에 대해 오래 고민한 사람만이 정답을 말할 수 있다. “둘 사이의 미적거리는 ‘저만치’야.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저만치, 물소리가 들릴락 말락 하는 저만치! 서로가 서로를 압도하지 않는 저만치!” 이쯤 되면 ‘시詩다!’라고 나는 탄복했다. 이 집은 시가의 집이다. 시가 곧 노래이던 시절, 농암은 학자이자 시인이었고 그의 어머니 권씨가 지은 ‘선반가’란 한글 시도 전해진다. 강변에서 고기 잡고 사는 유유자적을 노래한 농암의 ‘어부가’는 최초의 한글 시가로, 이후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낳게 했다. 종택엔 건물마다 종손이 직접 쓴 안내판을 붙였는데, 시가 한둘씩 나온다. 강각江閣과 애일당愛日堂엔 관련 시가 수십 편이다. 그걸 음미할 줄 알아야 종택을 제대로 구경하는 것이리라. “강에도 유년과 청년과 노년이 있어. 태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봉화를 지나 가송에 오면서 청년이 돼. 물살이 세차지고 여울과 굽이와 소와들과 협곡을 한꺼번에 빚어내거든. 여기 도산을 벗어난 상ㆍ하류 어디에도 이런 지형이 없어. 상류는 협과 굽이는 있으나 소와 들이 없고, 하류는 들은 있으나 소와 곡과 협이 없어. 하회만 가도 벌써 낙동강은 늙은 사행천이 되어 게으르게 흐르잖아. 낙동강 수 천 리에 유일하게 이곳 삼사십 리(20km 정도)만이 이런 모습을 연출해. 이런 지형은 사람을 사색하게 만들어 큰 인물을 배출하지!”
농암의 효행을 알고 선조 임금이 큰 글씨로 직접 써 농암 가문에 내렸다는 ‘적선積善’ 어필이 사랑채에 걸려 있다.
종택이 하드웨어라면 종손・종부는 소프트웨어. 봉제사와 접빈을 책임지는 종손 이성원종부 이원정 부부가 사랑채 앞에 섰다.
돌담 너머 주렁주렁 노랗게 익은 모과가 늦가을 정취를 더한다. 오른쪽 살림채에서 사랑채 문을 열면 저만치 산이 보이고 그 아래로 강이 흐른다. 사진 속에는 한데 모이기 힘들다는 안동의 4대 종가 종손 서애종손, 퇴계종손, 박봉종손, 농암종손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수몰된 고향을 재건하다
안동댐은 그 절묘한 도산구곡 중 여섯 곡을 수장해버렸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이성원 씨도 집과 정자와 서원과 문중을 한꺼번에 잃었다. 낙동강 변 비옥한 땅 70만 평도 함께. 타의로 참혹하게 뿌리를 뽑혀버린 허탈감과 상실감을 견뎌내기 어려웠다. 여자고등학교의 한문선생으로 살았지만, 주말마다 방학마다 강변 마을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잃어버린 부내와 흡사한 땅을 발견했다. 부내가 수장된 지 20년만이었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무인지경이었어. 첫눈에 알아봤지. 바로 여기다! 이튿날 아내와 함께 왔고 그 자리에서 선언했어. 나는 여기에 고향을 다시 만들겠다!” 그다음부터 일사천리였다(어찌 우여곡절이 없었으랴만!). 학교에 사표를 내고 퇴직금으로 땅을 사고, 문화재청에 청원을 넣어 문화재로 등록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정자와 서원들을 이건하고, 종택을 새로 짓고, 진입로를 닦고, 지손들을 모았다.
지금 가송리 농암종택은 완결된 하나의 세계다. 한 사람의 결심과 노력으로 이걸 다 이루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선조 임금이 내렸다는 ‘적선積善’이란 어필이 걸린 사랑채와 가족들의 역사가 사진으로 걸려 있는 안채 말고도 강을 따라 기와지붕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농암의 고조부가 짓고 농암이 태어났다는 6백50년 된 긍구당 肯構堂, 농암 당대에 살림집으로 지은 명농당, 농암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과 사림이 세운 분강서원, 농암 선생이 부모를 위해 지어드렸다는 애일당, 거기에 물 흐르는 소리가 손에 잡힐 듯 아름다운 강각까지! 긍구당도 애일당도 단아하고 소슬한 집이지만, 종손은 새로 지은 강각에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다. “강각은 실제 건물은 사라지고 기록에만 나오던 집이었어. 농암과 퇴계가 이곳에서 시를 쓰며 밤늦도록 함께 놀았다는 기록, 실제 시도 여러 편 남아 있고 1500년대 분강촌을 그린 그림에도 등장하지.” 문화부 지원을 받아 강각을 새로 짓고 현판을 달 때 그만 아는 비밀 하나를 묻었다. 강각이란 현판 하나는 자신이 쓰고 다른 하나는 퇴계 종손 이근필 선생께 의뢰한 것이다. “이로써 ‘농퇴시비(농암과 퇴계 후손 사이의 시비)’의 오랜 갈등이 해소된 거지. 상징적으로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역사란 바로 이런 거 아니겠어?” 그는 이 정자를 조선 최고의 시인에게 바치고 싶어 한다. 그게 누구냐고 물으니 황진이쯤 되지 않겠냐고 되묻는다. “퇴계와 농암은 시만 쓴 게 아니거든. 춤추고 노래하고 거문고를 켜면서 놀았다고. 거기 걸맞은 사람이 황진이쯤 되지 않을까 싶어서. 신분은 기생이지만 농암도 퇴계도 신분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분들이었으니・・・.” 점입가경이다. 가능하다면 그들의 사회적 위치에 맞는 오늘의 예술가 한 분께 현판 하나를 더 받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우리는 이리저리 궁리했다. 퇴계와 농암과 황진이의 사회적 위치에 어울리는 오늘의 시인ㆍ소설가는 과연 누구일까?
농암의 학덕을 추모해 지은 분강서원.
종택의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살림채 입구에 크고 작은 항아리가 정겨운 인사를 건넨다.
제사와 접빈이라는 종가의 가장 큰 임무 대부분은 종부에게 책임이 있다. 양동마을 희재 이언적 선생의 후손인 이원정 씨는 천생 종부라는 평이 자자하다. 웃음 가득한 얼굴로 내놓은 안동식혜와 정갈히 담은 정과와 다식. 연근정과, 금귤정과, 우엉정과, 편강, 송화다식, 들깨강정에서 종부의 솜씨와 정성이 엿보인다.
참 특별한 부부, 종손과 종부
이 집은 대대로 장수하는 집안이다. 농암을 중심으로 농암 89세, 아버지 98세, 어머니 85세, 숙부 99세, 조부 84세, 조모 77세, 증조부76세, 고조부 84세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외조부 93세, 외숙부 두 분이 93세ㆍ73세, 외사촌이 85세, 동생들이 91세ㆍ86세, 아들 이문량 84세, 이희량 65세, 이중량 79세, 이계량 83세, 이윤량 74세, 이숙량 74세에 조카 이충량과 이수량이 71세ㆍ89세까지 살았으니 놀라운 일이다. 1500년대 일반인 평균연령이 40세일 때 이 집안만 80세였다. 그것도 7대 2백여 년에 걸쳐서 주욱. 당연히 비결이 있을 것이다. 종손 이성원 씨는 ‘욕심 없는 마음’이라고 간결하게 정리한다.
臺前流水銀千頃 대 앞 흐르는 물은 은 천 고랑
堂後孤峯玉一叢 집 뒤 봉우리는 옥 한 떨기
夜久倚欄淸不寐 깊은 밤, 난간에 의지하니 잠은 오지 않는데
倒江山影月明中 달빛에 산 그림자 강에 기울어지고
조정의 복잡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던 농암이 지은 시다. 행간에서 맑은 바람이 인다. 이런 정신이니 어찌 장수하지 않을 수 있으랴.
장수는 당연히 효와 깊은 관련이 있다. 농암이 지은 애일당은 ‘부모님 살아 계신 날의 볕을 사랑하는’이라는 의미다. 부모님이 살아 계신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은 햇볕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재작년엔 종손이 주도해 애일당 5백 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장엄한 잔치였다. 농암 시절부터 동네 노인들을 위한 ‘애일당구로회’를 열었듯 원근의 나이 든 어른들과 이렇다 하는 집안의 종손들을 모아 효의 정신을 기리며 춤추고 노래했다. 종택은 집만 덩그러니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농암 같은 훌륭한 조상이 있어야 하며, 그를 기릴 사당이 있어야 하고, 살림집인 종가가 있어야 한다. 이게 하드웨어라면 소프트웨어는 사당에서 제사를 지낼 종손과 종부다. 종손ㆍ종부가 없으면 종가는 작동하지 않는다. 물론 종손ㆍ종부를 옆에서 지원하는 지손들과 지손들로 이루어진 문중이 필수지만 그 핵심은 종손과 종부, 그중에서도 종손보다는 종부에게 책임의 대부분이 있다. 종가의 가장 큰 임무가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이고, 제사와 빈객을 위해서는 부엌에서 만드는 음식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음식만은 아니다. 음식보다 먼저 객을 맞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하다. 농암 17 세손 이성원 씨의 아내 이원정 씨는 양동마을 회재 이언적 선생의 후손이다. 천생 종부라는 평가가 주변에 자자하다. 언제 봐도 얼굴 가득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러면서 잠시도 손을 쉬는 법이 없다. 이 집에 가면 사철 안동식혜가 나온다. 안동식혜는 특별한 음식이다. 안동 문화권을 가늠하는 잣대가 안동식혜를 만드는 지역이라고 할 만큼 솜씨와 정성이 들어가는 음식이다. 식혜뿐 아니라 각종 정과, 다식, 유밀과를 떨어뜨리지 않고 손님상에 올린다. 농암종택에 머물고 가는 사람들은 종손의 해박함에도 감탄하지만, 종부의 솜씨와 맘씨에 더욱더 감동한다.
얼마 전엔 종택 마당에서 가수 이승철이 콘서트를 열었다.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이성원 씨가 집주인으로서 한 말씀 아니 할 수가 없었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조선 선비 같은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관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제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트와이스입니다. 제 컴에 즐겨찾기를 해놓고 매일 듣습니다. 지효, 모모, 미나, 쯔위, 나연・・・ 단연 최고입니다. 내 인생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파리에서 케이팝 공연을 한 일입니다. 비틀스도 들어가지 못했던 파리가 아닙니까. 여러분 하늘의 저 달 한번 보십시오. 아름다운 밤입니다.” 도산구곡은 상당 부분 훼손됐지만 그곳의 산과 강과 정자와 종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와 같이 그 근처에 살고 있다. 1곡의 탁청정, 5곡의 퇴계, 6곡의 이육사, 8곡의 농암 후손들이 어울려 10년 전에 모임 하나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서륜회’, 농암 종손이 이름을 짓고 회장을 맡았다.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으니 대개 오래된 집을 한옥 체험 공간으로 개방한 분들이다. 들여다보면 안빈낙도의 선비 정신과 무위자연의 시 정신이 유장하게 흐른다. 아름답고 유쾌하고 장엄하다.
- 농암종택과 17대 종손 이성원 이야기 지국총지국총 어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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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농암 이현보 선생의 종택에 다녀왔다. 40여 년 전 수몰되어 사라진 고향을 완벽하게 되살려낸 종손의 집념과 노력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산과 강과 정자와 종가에서 만난 선비 정신 그리고 시 정신.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