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엄마랑 갔던 외갓집을 떠올리게 하는 대룡마을 ‘그집’. 세계를 누비며 치열한 삶을 사는 선주감독관 이여진 씨가 시골집에서 ‘허술함이 주는 위안’을 만끽하며 느린 삶을 살고 있다. 야신’.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뜻으로 제주를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은 언제나 환영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바다의 여자
아버지는 삶을 어떻게 꾸려가고 싶은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여섯 살배기 딸에게 프랑스인 가정교사를 소개했다. 외국어 개념도 모를 때라 그저 예쁜 말이구나 싶었다. 방긋방긋 따라 하다 보니 어느새 프랑스어로 된 신문을 읽을 수 있었고, 신문에 나온 그곳이 궁금해졌다. 영어 배울 곳도 마땅치 않던 시대에 그저 불어가 좋아 프랑스 문화원을 찾아갔다. 술래잡기하고 한창 뛰놀 나이에 외국어를 배우려고 온 꼬맹이가 어지간히 기특했는지, 문화원장 부부는 아이가 중학생이 되자 프랑스로 데려가 공부시키겠노라 부모를 설득했다. 대부와 대모를 따라 고대하던 프랑스에 도착한 날, 사실 소녀는 적잖이 실망했단다. “에이, 또 시골이잖아!” “프랑스 비시Vichy에서 중ㆍ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어요. 동명의 화장품을 만드는 지역으로 물이 맑고 산세가 아름다웠죠. 프랑스 임시 수도이기도 했고, 지방에서는 드물게 사투리를 쓰지 않는 지역이라 언어에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었죠. 대학은 파리에서 다녔지만 저한테는 시골이 더 잘 맞더라고요. 스위스 국경에 살며 프랑스로 출퇴근하기도 했어요.”
이여진 씨는 1년의 반은 부산 각지에서, 반은 해외에서 지낸다. 그의 직업은 ‘선주감독관’. 조선소에서 선주에게 배를 인도하면서 발생하는 수백 혹의 수천 가지 A/S 사항을 체크, 관리 감독하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조하는 선박은 시추선처럼 고도 기술을 요하는 해양 특수선이 많아 대부분 심해 한가운데에서 작업한다. 디자인을 전공한 뒤 국제기관, 잡지 <엘르> 프랑스와 방송국, 대사관 등에서 이력을 쌓던 그가 갑자기 엔지니어링 분야로 전향한 이유가 궁금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할 수 있는 일은 별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업디자인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좋아하라고 강요하는 게 가장 힘들었죠. 그런데 선박 디자인은 달랐어요. 디자인의 기본은 안전, 사람 중심의 명분 있는 디자인이니까요. 여객선과 크루즈의 선실 디자인을 진행하다 영어와 프랑스어가 가능하다는 언어적 이점으로 선주와 조선소 협의에 필요한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맡았고, 점차 분야를 넓혀 전문 감독관이 되었죠. 사실 어린 시절 꿈은 의사였지만요!”
배를 보면 딱 사람의 몸 같다는 이여진 감독관은 ‘배’를 통해 또 다른 꿈을 이룬 셈이다. 수백 수천 개의 배관은 혈관이요, 엔진은 심장이다. 낡은 배를 개조할 때 감독관의 역할은 마치 의사와 같다. 거대한 수조에 배를 넣고 물을 다 빼면 뾰족한 밑바닥까지 드러나는데, 이때 선수에서 선미까지 배에 지그시 손을 대고 배와 소통을 시작한다. 신기하게도 엔진룸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들으면 대략 어디가 문제인지 파악할 수 있다고. 물론 관심만으로는 쉽게 도전할 수 없는 분야인 것은 분명하다. 평소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하는 게 습관인 그는 선박 디자인을 시작하면서 선박에 필요한 모든 기계의 사양과 설계 룰을 통째로 외웠다. 영국, 오스트리아, 싱가포르 등에서 진행하는 선주감독관 자격증 시험을 볼 때마다 ‘첫 여성 도전자’라는 수식어가 따라왔다. 얼마 전에도 말레이시아 플랫폼에 다녀왔는데, 4백 명 중 여자는 이여진 감독관 단 한 사람. 가끔 여성이 있다면 설계 파트, 임시로 오가는 지질학자, 의료진 정도다.
거칠고 척박한 작업 환경에서 늘 안전과 직결되는 예민한 작업인 만큼 배에 오른 한 달 동안은 잠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배에 오르면 작업자들이 핸드 레일을 잡지 않는 것 하나만으로도 신경이 쓰여요. 이 집은 그런 저의 안전 강박증을 무장해제시켰지요. 언젠가는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데, 전깃줄을 비롯해 엄청난 위험 요소가 보이더라고요. 굉장히 불안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죠. 완벽하지 않은 허술함이 주는 위안이랄까요?”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갈하게 손본 기와집.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자는 날은 만성 근육통이 씻은 듯 사라지고 머릿속도 개운해진다. 한식 이불은 살림 캠프 일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직접 제작했다.
허술함이 주는 위안
‘그집’을 찾는 이들은 어릴 때 엄마랑 갔던 외갓집을 떠올린다. 자그마한 잔디밭을 중심으로 정면에 기와집, 우측에 단층 양옥이 있고 양옥 뒤편에 텃밭과 손님용 집이 자리한다. 집은 원래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 부분적으로 개조했다. 오랜 외국 생활로 바닥이 따뜻한 게 익숙지 않던 그는 양옥의 온돌을 모두 없애고 벽난로를 설치했다. 한옥과 양옥 사이에 있던 작은 창고를 양옥과 연결한 뒤 부엌으로 사용. 기다란 구조의 집은 가장 왼쪽 주방을 시작으로 뒤채와 연결된 현관, 거실, 욕실, 침실이 나란히 자리한다.
(왼쪽) 입식 부엌이던 곳의 단을 올려 서재로 사용한다. 이동식 다다미를 깔고 마을 어귀에서 주운 낡은 좌식 테이블, 선반 등으로 소담하게 꾸몄다. (오른쪽) 손님방은 분리되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반영해 독립된 뒤채를 게스트 하우스로 꾸몄다. 유럽의 산장처럼 나무로 마감해 들어서는 순간 은은한 솔향기가 풍긴다.
음식을 하다 쉽게 돌아설 수 있도록 동선에 맞춰 주방 싱크대와 아일랜드를 설치하고, 맞은편에 커다란 다이닝 테이블을 뒀다. 책상 두 개를 붙여놓은 다이닝 테이블과 화이트 패브릭 소파, 파티션을 겸하는 장식장 등은 모두 이케아에서 구입했다. 이여진 씨의 지인은 물론, 직장 동료, 부산에 사는 가족, 가족들의 친구, 선주와 선주 가족까지, 뒤채 게스트 하우스는 그집을 찾은 모두가 편하게 머물다 갈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이다. 유럽 산장처럼 천장과 벽을 나무 패널로 마감하고 침대와 식탁 등 최소한의 가구만 두어 실용적으로 꾸몄다. 텃밭 컨테이너와 앞쪽의 파란 대문, 뒤쪽의 하얀 대문은 남편이 뚝딱뚝딱 셀프로 만든 것. 컨테이너는 채소를 심어야 하기에 벌레가 먹지 않도록 땅에서 약간 높아야 하고, 대문은 고양이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아래를 띄워야 한다는 소소한 의견까지 모두 반영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집중해서 할 일이 있을 때 서류를 싸 들고 그집에 온다.
거제에서 조선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남편과는 보통 주말에 이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남편도, 저도 평일에는 각각의 아파트에서 지내요. 주말이나 머리가 복잡할 때, 집중해서 무언가를 해야 할 때 짐 싸 들고 옵니다. 평소 ‘생각 비우기’ 를 못 할 때가 많아 괴로운데, 이 집에 와서 잔디를 깎거나 풀을 뽑으면 오직 그 일에만 집중하면서 복잡한 생각들을 잊죠. 집에 오면 잠은 꼭 기와집 아궁이 방에서 잡니다. 불을 때고 뜨끈한 구들장에 누우면 어떤 마사지로도 풀리지 않는 만성 근육통이 말끔히 사라져요.”
계절을 두 번 반복하는 동안 그야말로 집이 살아 있음을 느꼈단다. 프랑스에서도, 스위스에서도 시골에서만 살았던 터라 사람 많은 곳이 익숙지 않고, 부산에서도 사람 많은 해운대를 피해 도망 온 이곳인데, 희한하게도 이 집에서는 불쑥 찾아오는 손님들이 싫지 않다. 누구나 오면 자연스럽게 “밥은 먹었니?”라고 묻게 되니, 이 집은 그에게 사람과 어울려 사는 법을 알려줬다. “내 집은 내가 꿈꾼 대로 되는 것 같아요. 나는 오래된 기와집이 있으면 좋겠어. 내가 사는 집은 문이 없으면 좋겠어. 손님방은 집 안에 같이 있으면 불편하니까 따로 지어야지. 늙으면 계단 오르내리기 힘드니 옆에 자그마한 양옥집도 짓고….늘 해오던 생각인데, 어느 날 이 집이 왔어요. 선물처럼요.”
1 10년 후 타샤 튜더의 빌리지를 완성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호숫가 땅을 장만하고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2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집. 고무신, 고양이 밥그릇, 작은 화분까지 늘 정갈하게 정리된 모습이다. 3 서까래, 디딤돌 등 세월의 거친 흔적이 담겨 있는 요소들을 최대한 살렸다. 4 마을 어귀에서 주운 화분을 뒤집어 종이 조명등을 올려두는 사이드 테이블로 활용한다. 5 양옥집 거실에서 바라본 기와집.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집
직장에 따라 이주하며 살던 시절 그에게 집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 필요에 의해 머무는 곳 이상의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그집은 집에 대해 갖고 있는 통상적이면서도 단편적인 기준을 모두 바꿔놓았다. 내 집이 아닌 모두의 집, 닫힌 집이 아닌 열린 집, 머무는 곳이 아닌 사는 곳…. 스스럼없이 들어와 대청마루에 앉아 사진 찍고 가는 관광객은 물론 주말이면 셀프 웨딩 촬영을 하거나 게릴라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어머니는 제가 출장 간다고 하면 은근히 좋아하세요. 이 집에서 친구분들 동창 모임을 하면 옛날 생각도 나고 좋으시대요. 다녀간 표 내지 않으려 열심히 치우고 가시지만 흔적들이 보이는 것도 재밌어요. 내가 없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집이 소곤소곤 전해주는 스토리가 있지요.” 그 역시 마음 맞는 친구와 삼삼오오 모여 즐거운 작당을 벌이기도 한다. 이름하여 ‘살림 캠프’. 살림 좋아하는 여자들이 그집에 모여 텃밭의 작물을 나누고, 밥을 해 먹고, 바느질하고, 때마다 필요한 정보를 공유한다. 시골에 빠질 수 없는 한식 이불과 몸뻬, 모기장 등 꼭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토론을 거쳐 디자인을 정하고 직접 만들어 쓴다. 봄에는 진달래화전, 여름에는 시원한 냉채, 비 오는 날에는 부침개, 가을에는 버섯솥밥 등 계절별로 먹어야 할 것을 챙기는 일도 중요하다. 잘 살려면 잘 먹는 방법부터 알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싱크대와 아일랜드 조리대를 딱 사용하기 편리한 콤팩트한 크기로 구성했다. 오른쪽 문으로 나가면 텃밭과 게스트 하우스가 있다.
“프랑스 가정식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있는데, 사실 어렵지 않거든요. 샐러드 대신 겉절이, 리소토 대신 해물볶음밥을 내는 등 있는 재료로 자연스럽게 응용하되 육ㆍ해ㆍ공을 어떤 순서로 먹어야 하는지, 풀코스에는 왜 수프를 내지 않는지 등등의 이야기를 곁들여주면 재미있어해요. 레시피를 그대로 배우려면 공부지만, 문화를 익히는 것은 생활이니까요.” 한식도 보통 코스로 구성하는데, 구절판을 하면 식사로는 비빔밥을 내는 식으로 같은 재료를 활용한다. 요리를 자주 하면 순발력이 좋아지는 것은 분명하다. 시간이 빠듯한 취재팀을 위해 서울 가는 차 안에서 먹으라고 있는 재료로 뚝딱 김밥, 유부초밥, 과일 도시락을 챙겼는데 맛은 물론 담음새의 센스란!
(왼쪽) 주방에서 바라본 거실.왼편은 침실이고 침실 벽 양쪽으로 수납장을 구성했다. 커튼으로 수납장 문을 가린 감각이 돋보인다. (오른쪽) 뒤채와 연결되는 파란 대문.
‘나’라는 싱싱한 생채기
“으리으리한 집에서 얘기하면 서로 자랑거리를 내세우거나 가식적이 되죠. 마치 집이 그렇게 주문하는 것처럼요. 뭐든 좋은 것만 얘기하기는 쉬워요. 힘들고 어려웠던 일을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어야 건강한 관계죠. 집도, 사람도요.” 매일 뭔가 할 일을 주는 집, 바꿔 말해 해도 해도 일이 끝없는데 해도 해도 표가 안 나는 집이 바로 우리가 꿈꾸던 주택의 현실 버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정리 정돈이 완벽한 집은 사실 조금 서글픈 사연이 있다. 심해로 작업하러 갈 때는 다시 못 돌아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남은 자리를 말끔하게 정리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는 것.
수많은 안전사고에 대한 강박과 트라우마로 정신과 상담은 필수다. 우리 식의 제도에 맞지 않는 가족 관계 때문에 한국에 와서 관청 일을 보는 게 쉽지 않았다는 고백도 이어졌다. 남자들 사이에서 콤플렉스를 느낄 때도 있고, 평생 세계 곳곳을 바삐 돌아다니는 일을 하며 외모를 꾸미는 일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조선업이 어려운 요즘 같은 때는 나라 걱정도 되지만,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현실적 고민이 앞서게 마련이다.
“누구나 막장 드라마 같은 사연 하나쯤은 있지 않나요? 굳은살이 박이고 흉터가 남고 주름이 잡혀가고…. 지긋한 나이에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얼굴이 영 어색하듯 삶에도 굴곡과 요철이 있어야 자연스럽죠.”
늘 타샤 할머니 정원을 머릿속에 담고, 언젠가는 그렇게 살겠다고 꿈꿔온 그는 호수가 바라보이는 너른 땅에 꿈 같은 빌리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실현 중이다. 스위스에 살던 기억을 그대로 옮긴 작은 마을. 오솔길을 따라 소담한 컨테이너 정원이 펼쳐지고, 집이 아닌 ‘숲’이 보이는 마을. 그의 바람을 조곤조곤 듣던 남편은 얼마 전 편백나무 묘목을 심었다. 10년, 20년을 바라보고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자는 의미다.
여름이면 잡초 때문에 너무 괴롭다가도 찬 바람이 불면 언제 그랬냐는 듯 푸성귀가 그립다. 어떤 순간이든 주어진 대로, 이 또한 지나가기를 믿고 견뎌내면 막연하게 꿈꾸던 삶에 도달해 있지 않을까? 촬영일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대청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데 보슬비 냄새와 개구리 울음소리가 좋았다. 신기하게도 마당 촬영을 마치고 안채로 자리를 옮기니 장대비가 쏟아졌다. 두 손에 꼭 쥐여준 도시락을 갖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거짓말처럼 날이 개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시골집에서 완벽하지 않은 허술함이 주는 위안을 만끽하는 이여진 씨에게 식물성 스킨케어 브랜드 달팡에서 ‘스티뮬 스킨 플러스 세럼’ 과 ‘스티뮬스킨 플러스 멀티-코렉티브 디바인 크림’ ‘자스민 아로마틱 케어’를 선물로 드립니다.
- 선주감독관 이여진 '그집'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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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군 대룡마을에는 ‘그집’이라는 대명사로 불리는 소담한 집이 한 채 있다. ‘누군가’의 집이지만 ‘누구나’의 집이기도 한 그집은 고양이도, 새도, 사람도 불러 모으는 특별한 힘이 있다. 프랑스 시골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뒤 스위스와 파리를 오가며 사회생활을 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너른 바다를 품은 여자, 선주감독관 이여진 씨를 만나러 그집을 찾았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