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계영배는 ‘긴장’이다. 잔에 술을 따를 때 넘치지 않도록 경계선을 찾는 일이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했다. 단 한 방울의 아주 작은 욕심이라도 그 경계를 넘어가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_박광윤 작가
계영배의 왼쪽 뒤에 놓인 백자 접시와 주병, 옥색 주병은 모두 이민수 작가 작품으로 LVS 크래프트 판매. 개 오브제와 오른쪽에 놓인 백자 그릇은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적동과 주석 도금 기법을 이용해 박광윤 작가가 재해석한 ‘비움’은 수많은 디자인의 변화 끝에 탄생했다. 계영배가 본래 지닌 과학적 구조보다 평소 그가 모티프로 삼아온 시각적 여유로움, 즉 여백이나 자연에서 느끼는 감성을 담아냈다. 백자 항아리에 담긴 술은 식품 명인 제9호 조정형 명인이 빚은 이강주700 명작. 조선시대 3대 명주 중 하나인 전주이강주는 배(梨)와 생강(薑)이 들어갔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발효시켜 내린 증류주에 배와 생강을 넣어 장기간 숙성시킨 것으로, 꿀보다 맛있고 꽃보다 좋은 향기를 지닌 특유의 알싸함이 매력적이다. 오래 둘수록 향이 은은하고 부드러운 맛을 낸다.
“계영배의 고유한 형태에서 보이는 받침 대신 원뿔과 구 형태로 재해석했다. 잔에 술을 따르면 원뿔과 구를 감싸고 있는 격자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습이 비치면서 반짝이는 은에 맺힌다. 그 단상에서 느껴지는 술의 아름다움이 참 아이러니하다.” _우진순 작가
금산인삼주의 왼쪽에 놓인 백자 찬합과 구름 모양 수저받침은 모두 이세용 작가 작품으로 조은숙아트앤라이프스타일 판매우진순 작가의 작품은 밑부분을 원뿔형으로 만든 ‘계영배 A’와 구형으로 완성한 ‘계영배 B’의 두 가지 형태다. 음식의 부패를 방지해주고, 공기와 접촉하면 색이 변했다가도 다시 복구돼 식기 소재로는 그만인 은의 아름다움과 계영배의 색다른 형태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투명한 병 안에 인삼과 함께 담긴 술은 대한민국 식품 명인 제2호 김창수 명인이 담근 금산인삼주 수삼단본720. 1500년 전부터 인삼을 재배해온 충청남도 금산의 인삼은 비록 크기가 작지만 단단하고 약효가 탁월하기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백자는 조선의 대표 그릇이며 선비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 백자를 통해 물욕에 반하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_최지만 작가
진도홍주의 오른쪽에 놓인 굽잔은 이기조 작가 작품으로 조은숙아트앤라이프스타일, 도자기 해태상 양초 받침은 우일요 판매.최지만 작가가 재해석한 ‘계영배’는 작은 사발에 담는 술이 넘치면 큰 사발로 흘러내리는 형태로 만들었다. 사발 안을 채우는 용액(술)과 어울리는 개구리 모형을 작은 사발 안쪽, 물이 흘러내리는 기둥 위에 놓아 위트를 더했다. 홍옥처럼 붉은빛을 띠는 전통주는 진도홍주 40%다. 쪄서 식힌 보리 고두밥을 누룩과 잘 섞어 물과 함께 넣고 발효시킨 후 지초 뿌리를 통과시켜 붉게 만든 술로, 피를 맑게 하고 해독 작용도 뛰어나다. 고소한 잔향이 나는 부드러운 목 넘김이 일품.
“계영배를 통해 현대의 백자가 지니는 시대성을 재해석하고 싶었다. 과함과 욕심을 경계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과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계영배 고유의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의미를 담았다.” _전상우 작가
산 모양의 도자기 오브제와 계영배 오른쪽 뒤에 놓인 각진 백자 주병은 우일요, 뒤쪽에 놓인 막걸리 주전자는 이기조 작가 작품으로 조은숙아트앤라이프스타일 판매.전상우 작가가 만든 ‘계영배’는 전통 모습과 닮아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미감이 살아 있다. 면치기 기법으로 만든 백자토의 독특한 질감을 살리고, 굽 조각으로 모던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도자기 병에 담긴 술은 술 두 병과 술잔 두 개로 구성한 한산소곡주 도원세트다. 한산소곡주는 우리나라 전통주 중 가장 오래된 술로, 충남무형문화재 제3호 우희열 명인이 빚은 것이다. 제조 시 다른 술에 비해 누룩을 덜 쓰기 때문에 소곡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연한 미색을 띠는 이 술은 단맛이 돌며 그윽한 들국화 향을 느낄 수 있다.
“계영배가 지닌 의미처럼 술은 절제의 마음으로 마시며 흥취를 느껴야 한다. 내가 재해석한 계영배는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난 흔적을 거친 담벼락 같은 느낌으로 표현했지만, 술잔이 주는 느낌과 질감은 그 흥취를 만끽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느끼길 바란다.” _김상만 작가
맨 왼쪽의 도자기 화병들은 김연지 작가 작품, 청화가 그려진 2단 도자기 찬합은 이세용 작가 작품으로 모두 조은숙아트앤라이프스타일 판매. 청학 도자기 젓가락 받침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분청 계영배’는 김상만 작가가 분청사기로 작업한 것이다. 흙물을 발라 표면에 선들을 새기고, 그 위에 백토물을 흙으로 성형한 화장토를 칠한 후 재유(재가 들어간 유약)에 담가 완성해 투박한 듯 자연스러운 미감을 자아낸다. 주전자에 담긴 명인안동소주는 경북무형문화제 제12호 조옥화 명인이 계승한 것으로, 양반과 선비의 고장인 안동 명문가의 접대뿐 아니라 궁중에 진상하던 술이기도 하다. 안동의 맑고 깨끗한 물과 양질의 쌀로 만든 이 전통 증류식 소주는 그윽한 향취와 톡 쏘는 맛이 나며 뒤끝도 깨끗하다.
“계영배의 의미와 나의 초기작이던 모래시계의 원리를 결합한 것이다. 삶의 여유가 담긴 ‘기다림의 미학’과 부족한 듯 넘치지 않는 ‘7할의 미학’을 담고자 했다. 술이 가득 담기지 않는 계영배는 여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을 일깨운다.” _강혜림 작가
맨 왼쪽의 백자 굽잔과 중앙에 놓인 3단 찬합은 이기조 작가 작품으로 조은숙아트앤라이프스타일, 쌓인 접시 위에 올린 도자기 술잔과 솔송주 앞에 놓인 술잔은 이민수 작가 작품으로 LVS 크래프트 판매.높낮이가 각각 다른 사각 형태 받침으로 이뤄진 강혜림 작가의 ‘비움, 그리고 채움’은 은과 황동 등의 소재로 완성해 세련된 모던함이 느껴진다. 곡선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대비와 조화 속에 작가가 생각하는 기다림의 여유에 대한 단상을 담아냈다. 곡선 문양의 도자기병에 담긴 솔송주는 무형문화재이자 대한민국 식품 명인 제27호인 박흥선 명인에 의해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주로, 지리산 자락의 맑은 물과 울창한 노송의 기운을 담은 최고의 약주다. 찹쌀에 솔잎 그리고 봄에 나는 송순으로 빚어 입안을 아름다운 솔향기로 가득 채운다.
“계영배 작업을 통해 사라진 고유의 전통문화를 되살리고, 현대의 생활 문화를 접목하고자 했다. 차고 넘침을 경계하는 절제의 미학이 투영된 계영배는 단지 기능적인 기물로뿐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여유와 풍류를 현대의 삶 속으로 인도하는 우리 선조의 귀중한 유산이다.”_조성호 작가
왼쪽의 사각 도자기 접시와 오른쪽 뒤에 놓인 찬합은 우일요, 오목한 도자기 볼 두 점은 이택수 작가 작품으로 조은숙아트앤라이프스타일 판매.전통 은기 제작 방식을 토대로 구리를 판금 성형해 잔과 잔주 그릇 등을 제작한 후 은도금으로 표면을 마감한 조성호 작가의 ‘한 꽃잎 동동’. 망치와 줄 자국을 의도적으로 남긴 표면의 투박한 질감이 은의 은은함과 대비돼 현대적 미감이 느껴진다. 면천두견주는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 지방의 향토 술로 청주에 진달래꽃을 담아 만든 술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6-2호로 지정된 이 술은 연한 황갈색에서 퍼져 나오는 단맛과 진달래 향이 일품이다.
“오늘날 계영배는 실제 사용하는 술잔이라기보다 상징적 의미를 담은 기물이라는 점에 착안해 그림처럼 벽에 걸어두고 감상하기 좋은 작품으로 완성했다. 술이 가득 차는 장면과 잔에서 빠져나가기 직전 70% 정도 채워져 있을 때의 장면을 포착해 표현한 것이다.”_유경옥 작가
맨 왼쪽 백자 주병은 우일요 판매. 나머지 술잔은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부조 형태로 벽에 걸 수 있는 유경옥 작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잔’은 유약을 이용해 술이 담겼을 때의 어울어울한 느낌을 표현한 후 레진으로 2차 작업해 완성한 것이다. 푸른빛, 노란빛, 연둣빛 등 다양한 빛깔에 따라 각각 다른 느낌이 난다. 아름다운 꽃잎이 새겨진 주병 안에 담긴 문배주는 이기춘 명인에 의해 전해지는 전통주로, 일체의 첨가물 없이 오직 물과 누룩, 조와 수수로만 빚은 깨끗하고 부드러운 맛과 향이 선조의 삶의 향기와 함께 녹아 있다.
스타일링 민송이・민들레(7 doors) 작품 협조 숙명여자대학교 창학 1백10주년 기념 특별전 전통주 협조 우리술방
- 계영배와 우리 전통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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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에 이런 구절이 있다. “ 꽃은 반쯤 핀 것을 바라보고 술은 반쯤 취하게 마셔야 그 속에 아름다운 향취가 있다.” 조선시대 선인들은 풍류를 즐길 때도 이런 과유불급이 주는 미학을 일찌감치 체득했다. ‘가득 참을 경계하는 잔’인 계영배戒盈杯가 절제의 미덕을 담은, 그 깨달음의 산물이다. 젊은 공예 작가들이 재해석한 여덟 점의 계영배와 우리 전통주의 만남을 해, 구름, 산, 바위, 물, 학, 소나무, 대나무의 자연 이미지에 담아, 선조가 즐기던 풍취와 계영배의 지혜로운 의미를 반추해본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