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빛맹학교 5학년 박한별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나요”
열두 살 한별이는 서울에 단 두 곳뿐인 맹학교 중 하나인 한빛맹학교에 다닌다. 새벽 6시가 되기도 전에 일어나 한 시간 넘게 통학버스를 타고 등교해 요즘은 오전 수업이 끝난 후 한 시간씩 노래를 부른다. “이번 주 금요일이 합창 대회예요. 우리 중창단은 열 명인데, 원래 두 곡을 부르기로 했다가 한 곡만 하기로 했어요. ‘보리울의 여름’요. 아세요?” 한별이를 만난 곳은 10월 초 새로 단장한 교내 도서관. “도서관이 생겨서 너무 좋아요. 여기에 소파도 있고 저쪽엔 편하게 신발 벗고 들어갈 수 있는 공간도 있잖아요. 각도 조절 책상이랑 독서 확대기도 새로 생겨서 책 읽는 시간이 더 좋아졌어요.” 한별이처럼 시각 장애가 있는 아이는 시각을 통해 대부분의 정보를 흡수하는 비장애인보다 바깥세상과 소통하고 새로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책’을 통해 한별이가 만나는 세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깊다. “책을 읽으면 상상할 수 있어서 좋아요. 우리 반 친구 성훈이는 과학책만 읽는데, 가볼 수 없는 우주를 상상할 수 있어서 좋대요.” 하교 후 집에서 혼자 보내는 오후 시간엔 주로 엄마가 사준 위인 전집을 읽는다.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책은 <헬렌 켈러>,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인상 깊게 읽은 책으로 <심청전>을 꼽은 한별이는 “헬렌 켈러는 저처럼 눈만 잘 안 보이는 게 아니라 귀도 안 들렸잖아요. 그런데도 열심히 노력해서 훌륭한 사람이 됐다는 게 대단해요”라고 말한다. 아홉 살경부터 서서히 시력이 나빠진 한별이는 눈이 잘 보이던 어린 시절엔 동화책 읽기를 좋아했다.
위인전을 읽으며 시련을 극복하고 훌륭한 업적을 이룬 삶을 간접경험하는 한별이의 꿈은 무엇일까? “꿈요? 유치원 선생님도 되고 싶고, 작곡가도 되고 싶어요. 요즘 합창 대회 연습하면서 작곡에 관심이 생겼어요. 더 어릴 때는 미술을 좋아했어요. 치과 의사도 되고 싶었고요.” 실제로 한별이는 최근 작곡 기초를 배우기도 했다. 작곡을 전공하진 못 하더라도 어른이 되어서 다른 일을 하며 취미로 노래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별것 아닌 말에도 까르르 소리 내어 웃고 드문드문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 참 예쁘던 한별이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하룻밤에도 몇 번씩 바뀌는 꿈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뒤척이던 나의 어린 날이 떠올랐다. 환하게 웃던 한별이의 얼굴처럼 한별이의 마음속 수백 수천 개의 꿈에 밝고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기를, 그 꿈들이 활짝 피어나기를 소망한다. 손끝의 감각에 의지해 골똘히 점자 책을 읽어 내려가던 한별이의 표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만 같다.
이길준 점자 교정사와 이한올 점역사
“시각장애인에게 독서는 삶을 보는 눈이에요”
시각장애인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돕는 삶의 지팡이는 무엇일까?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보이지 않은 이길준 원장이 외국어 공부와 대학교 전공 수업은 물론 비올라 연주, 시각장애인 축구 등의 취미 생활을 즐기고 전문 안마원을 경영하며 국가 고시 점자 전문 교정사로도 활동할 수 있게 도와준 삶의 지팡이는 독서였다. “눈이 1백 냥이라는 옛말이 있지요. 시각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세상의 여러 분야를 직접 경험하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인생을 보다 풍성하게 살게 되었죠.” 이길준 원장이 태어난 1970년대 후반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어렵게 점자 책을 구하면 왼손으로 점자를 더듬어 책을 읽으면서 오른손으로는 점자판의 종이에 구멍을 뚫어 그 문장을 베껴 썼다. 베껴 쓴 종이에 구멍을 뚫고 실로 꿰어야 자기 책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점자 책이 귀하던 시대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1년에 대여섯 권씩 제 책을 직접 만들어 써야 했어요. 요즘은 IT 기술이 발달해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한글 문장을 입력하면 바로 점자 파일로 변환됩니다. 그걸 USB나 이메일로 점자 정보 단말기에 옮기면 솟아난 점자를 만져보며 독서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길준 원장은 요즘 녹음 파일 형태의 시각장애인 도서가 많아졌고 시각장애인 어린이가 귀로 듣는 데만 익숙해져 점자를 익히려 하지 않는 현상이 걱정스럽다. 문자를 모른 채 듣는 것에만 익숙하면 맞춤법을 모르는 문맹이 되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은 아직도 알 권리에서 많이 소외되어 있어요. 지하철, 기차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점자 노선도나 안내문이 필요하고, 은행 상품이나 광고 전단지에도 점자가 있어야 시각장애인도 그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콘텐츠가 넘쳐나는 사회, 하지만 시각장애인은 유명 작품을 읽어보려 해도 저작권 사용이 쉽지 않아 점자 번역본을 볼 수 없다. 좋은 책도 가격이 비싸 선뜻 구입하기 어렵다. 시각장애인에게 육체의 눈을 선물하는 건 신이 할 수 있지만, 주변에서는 일상의 콘텐츠를 점자로 변환해주는 도움을 줄 수 있다.
“<행복이가득한집>이 3백 페이지쯤 되지요? 점자 책은 70페이지 정도가 한 권이기 때문에 3백 페이지짜리 책을 읽으려면 시각장애인은 대여섯 권의 책을 구입해야 해요. 그러니 다섯 배 정도 많은 돈이 들지요. 사실 점자를 배우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많은 비장애인이 점자를 배워서 시각장애인이 더 많은 독서를 할 수 있도록 자기 시간을 기부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하트하트재단 장진아 사무국장
“시각장애 아이에게 책 읽을 권리를 선물하고 싶어요”
하트하트재단의 장진아 사무국장은 ’꼭 해야 하지만 아무도 안 하는 일이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해 지금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빈곤, 기아, 식수 부족 같은 문제에 비해 시각 장애가 사회적으로 덜 부각되어 시각 장애 아동의 삶의 질이 외면받는 현실이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25만 명에 이르는 시각 장애 인구에 비해 전국의 점자 도서관은 서른다섯 곳에 불과하고, 전국의 공공 도서관 중 단 10%만이 시각장애인 자료실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현재 전국 맹학교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고등학교 과정 때 안마 수업 등 실업계 위주의 교육을 받는다. 아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눈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진로와 장래를 결정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아이 스스로 꿈을 선택해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하트하트재단이 한빛맹학교 도서관 새 단장 프로젝트에 뛰어든 가장 중요한 이유다. “하트하트재단은 2014년 본격적으로 도서관 건립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와 산학 협력을 맺어 이지연 교수와 함께 ‘시각 장애 아동을 위한 학교 도서관 구축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지요.” 한빛맹학교 도서관에서 보았던 환한 조명과 탁상용 독서 확대기, 각도 조절 보조 책상, 신발 벗고 들어가 좌식으로 편안하게 독서를 즐길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은 아이들이 책을 더 가깝게, 즐겁게 접하고 적성과 역량을 계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하트하트재단이힘쓴 결과다.
지난 10월 7일, 한빛맹학교에서는 11월 11일 ‘눈의 날’을 맞아 하트하트재단과 함께하는 ‘북 콘서트’를 진행했다. 아이들에게 책과 음악을 동시에 듣는 특별한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는 게 장진아 사무국장의 설명. 1988년 설립한 사회복지법인 하트하트재단은 발달 장애 아동을 위한 하트하트오케스트라, 각막이식 수술 지원, 안보건 증진을 위한 해외 의료진 파견, 태양광 램프 지원 등의 활동을 해왔다. 앞으로도 전국 시각장애학교 도서관 건립, 도서관 프로그램 지원, 촉각 도서 제작 및 보급 등의 사업을 꾸준히 전개하며 시각 장애 아동의 ‘책 읽을 권리’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장진아 사무국장은 “영화 <말아톤> 이후로 발달 장애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우리가 하는 이런 일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간 이 사회도 바뀌지 않을까요”라고 소감을 덧붙였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각 장애 아동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며, 사회 구성원 모두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의 꿈과 미래를 지키고 응원해야 한다는 것을 하트하트재단의 크고 작은 활동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는 요즘이다.
박영자 촉각 디자이너
“촉각 도서는 시각장애인에게 상상의 날개가 됩니다”
재미있는 그림책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 어린이는 어떤 책으로 상상력을 키우고 감각을 발달시킬 수 있을까? 패션 잡화를 만들다가 우연히 도서출판 점자의 채용 공고를 보고 촉각 디자인의 세계로 들어선 지 7년 차에 접어드는 박영자 디자이너. 그가 만드는 촉각 도서는 시각 장애 어린이를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마법사이자 앞을 못 보는 어린이에게 새로운 감각을 알려주는 좋은 선생님 같은 책이다.
“그림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 어린이는 촉각 도서의 입체감, 질감, 촉감 등을 통해 책이 이야기하는 세상을 경험할 수 있어요. 호랑이한테 쫓기는 남매가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전래 동화를 촉각 도서로 만들면 글자와 일러스트레이션을 배치하고 그 위에 UV로 점자를 올리는 식이죠. 그 옆면에는 한복을 입은 아이, 동아줄, 호랑이를 실제와 비슷한 소재로 만들어 붙이지요. 그러면 이야기를 읽는 아이가 한복, 동아줄, 호랑이라는 사물의 감각을 촉각으로 느끼며 그 장면을 상상할 수 있지요.” 박영자 디자이너는 새로운 이야기를 기획할 때마다 재료를 찾기 위해 동대문시장을 발 이 닳도록 다닌다. 북극곰이 나오는 이야기를 읽는 어린이가 북극곰을 만지면서 “북극곰의 털은 이렇게 부드럽구나!” 하고 상상할 수 있도록 시각 장애 어린이에게 꿈의 통로, 소망의 날개가 되어주는 것이 박영자 디자이너의 사명이다.
“촉각 도서는 한 권 한 권 오랜 기간 수작업으로 만들어야 해서 대량생산을 할 수가 없어요. 당연히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개인보다는 기관에서 주로 구입하고 도서 재고가 떨어지면 하나하나 다시 손으로 만들어야 하니 많은 시각 장애 어린이에게 보급할 수 없어서 안타까워요.” 제작 기간이 길고 몰입도가 높아 육체적으로 지치기 쉬운 작업이지만, 박영자 디자이너는 시각 장애 어린이가 비장애인과 같은 꿈과 희망을 갖는 평등하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생각에 큰 보람을 느낀다. “요즘은 우리 신발에 대한 역사책을 만들고 있어요. 흥부가 신었던 짚신, 놀부가 신었던 비단신을 만들 경제적인 재료를 찾아다녔지요. 촉각 도서는 어린이가 독서에 흥미를 잃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또한 큰 보람이지요.” 비장애 어린이가 보기에 아름답고 예쁜 책, 시각 장애 어린이가 만져보기에 더욱 생동감과 입체감이 느껴지는 촉각 도서는 어린이라면 누구에게나 동등한 세상 경험을 제공한다. 타고난 신체 조건에 관계없이 이 세상 모든 어린이에게 꿈의 통로, 소망의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가장 공평한 선물은 눈으로 손가락으로 읽는 독서다.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이지연 교수
“시각장애인에게는 특별한 도서관 정보 시스템이 필요해요”
우리나라에는 공공 도서관이 7백여 곳에 이른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이 갈 수 있는 도서관은 전국에 몇 곳이나 될까? 간혹 도서관 서가에 점자 책이나 큰 글씨 책 등 시각장애인용 도서를 구비하고 있더라도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원하는 책을 찾을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면 그곳은 흑암의 공간에 불과하다. “시각장애인용 도서가 일반 도서와 크게 다른 점은 자료의 형태입니다. 시각장애인은 일반 묵자 도서가 아니라 점자 도서, 점묵자 혼용 도서, 큰 글자 도서, CD, 카세트테이프, 촉각 도서 중에서 자신의 신체 상황에 맞는 유형의 책을 봐야 하지요. 그러니 자료를 구분하는 레이블링을 일반 도서관과 다른 방식으로 하나하나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시각장애인 도서관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건 필드부터 완전히 다른 작업이죠.”
도서관 시스템의 권위자인 이지연 교수는 하트하트재단과 함께 시각장애인 학교의 도서관을 재정비하는 작업을 하며 연세대 학생 20여 명과 주말마다 지방의 시각장애인 학교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시각 장애 학생이 책의 제목과 내용을 읽어주면 연세대 학생이 다시 레이블링하고 입력하는 작업을 했는데, 모든 게 처음 해보는 일이라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고, 약속한 시간에 시스템을 잘 만들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일정이 지연되어 저도 학생들도 낙담하던 어느 일요일이었어요. 시각장애인 학교에서 예배가 열리는 날이라 운동장에 자동차가 많았는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아이가 그 사이를 어렵게 지나고 있었죠. 걱정이 되어 조심하라고 일렀더니 제가 누구인지 묻더군요. 너희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잘 찾을 수 있도록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더니, ‘그럼 이제부터 선생님 없어도 저 혼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거예요?’라며 좋아했습니다. 기쁨에 찬 아이의 그 한마디에 ‘아, 힘을 내서 다시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그날 이지연 교수가 느낀 것처럼 시각장애인은 비장애인이 할 수 없는 일, 즉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이 있다. 책은 그들이 더 적극 적으로 세상을 살고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도록 돕는다. 우리나라 공공 도서관 중 장애인 자료실을 갖춘 곳은 겨우 10%. 하지만 사회가 시각장애인과 독서의 중요성을 공감하면 굳이 시각장애인용 도서관을 따로 구분할 필요 없이 외국처럼 어느 도서관이든 장애인을 위한 특수 자료를 갖춘 코너를 작게라도 준비할 것이다. 독서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이처럼 ‘시각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도서관 이용자’라는 우리 사회 구성원의 조화로운 인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