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 오른쪽 작은 방의 벽을 털어내고 밖으로 확장, 일부를 유리로 마감해 구조적 묘미를 더했다.
군더더기 없는 미니멀 스타일로 레노베이션한 한남동 287.6㎡ 빌라. 현관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복도와 거실이 펼쳐지는 구조로 구자현 작가의 대형 판화 작품이 모던한 조화를 이룬다.
최소의 디자인, 최상의 아름다움
나이가 들수록 단순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만고의 진리인 듯하다. 방송국 고위 관리자로, 외국계 투자 회사의 파트너로 치열하게 살아온 김애미 씨 부부에게도 자연스럽게 삶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시ㆍ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주거 선택이 자유로워졌고, 일과 개인 생활을 균형 있게 배분하는 여유가 생겼으며, 부부만의 라이프스타일에 좀 더 집중하게 되었다고 할까?
다이닝룸에서 바라본 조리 공간. 안쪽에 있던 조리 공간을 창가로 구조 변경하면서 싱크대를 창가 바로 앞에 배치해 설거지나 요리를 하면서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볼 수 있다.
한남동 유엔빌리지 입구. 조용하고 여유가 느껴지는 주거 공간과 개성 있는 음식점, 분위기 좋은 카페, 산책로 등이 공존하는 한남동의 빌라는 부부의 변화한 생활와 취향이 오롯이 반영된 공간이다. 커다란 통창 너머 남산이 시원스레 펼쳐지는 전망과 북향집 특유의 은은한 채광이 매력적으로, 한마디로 미니멀리즘의 결정체다. 여행, 패션, 인테리어 등 다방면에 관심 많은 부부가 오랜 시간 하나씩 엄선한 가구와 소품, 작품을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도록 공간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마감한 것. 하지만 이처럼 덜어내면서 스타일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얼마나 진 빠지는 일인지 해본 사람은 안다. 우선 단순한 디자인일수록 디테일이 중요하다. 마치 수학 방정식을 풀 듯 선과 면이 정확한 비례와 수치로 딱딱 맞아떨어져야 하며, 손잡이 하나까지 명분 없는 디자인은 용납하지 않는다.
드레스룸과 메인 침실 사이에 자리한 욕실. 동향으로 창이 나 아침 햇살이 환하게 들어온다.
“14년 된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바닥을 교체하기 위해 철거했는데 나무 밑에 대리석, 대리석 밑에 나무, 그 아래 타일까지 겹겹이 덧방(기존에 시공한 건축, 인테리어 자재를 철거하지 않은 채 덧붙여 시공하는 것) 공사를 한 터라 철거 공정이 쉽지 않았어요. 바닥은 엑셀 파이프를 건드릴 수 있어 대리석 바닥 시공 전문 업체에 공사를 맡겼죠. 평소 알고 지내던 소갤러리 마영범 디자이너가 맡고, 시공팀을 직접 발주하는 방식으로 레노베이션을 진행했어요.”
거실에서 바라본 서재. 구자현 작가의 실크스크린 판화 작품이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순백의 공간, 남다른 소재로 포인트를 주다
이사할 때마다 조금씩 집을 고친 경험은 있지만, 직접 현장 소장을 두고 시공팀을 연결해 진행한 공사는 처음인지라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단다. 대형 가전을 사용하는 조리 공간은 물론 AV 시스템으로 무장한 거실, 다양한 형태로 배치한 간접 조명등까지 필요에 따라 독립적으로 컨트롤해야 하는 고난도의 전기공사는 오랜 시간 부부를 애먹였고, 디테일까지 챙기다 보니 시공팀과 예민한 언쟁이 이어지기 일쑤였다. 결국 입주 일자가 늦어져 두 달간 호텔에 머무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부부는 과정이 힘들었던 만큼 애착 또한 강하다고 말한다. 처음 집을 봤을 때 통창 너머 쏟아지는 은은한 햇살에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마치 표백한 듯 하얗고 말간 집에서 단순함의 미덕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중이다.
호텔 로비나 여행지 곳곳에서 눈여겨본 가구나 소품을 기억했다가 직구로 구매하길 즐기는 부부는 집을 레노베이션하면서 톰 딕슨의 벨 펜던트 조명등을 설치했다. 글라스 이탈리아의 유리 테이블과 거울처럼 반사 효과를 내는 톰 딕슨의 벨 조명등이 좁고 긴 다이닝룸에 악센트를 준다.
현관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구자현 작가의 대형 판화 작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오른쪽 유리 벽 안쪽으로 책상이 마주하는 공간은 서재, 현관 왼쪽으로 꺾으면 복도가 나오고 복도 너머 거실, 거실 왼쪽으로 메인 침실과 드레스룸이 자리한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은 예상을 깨는 마감재에 있다. 우선 서재와 부엌은 벽과 막힌 문 대신 유리 소재를 과감하게 사용했다. 유리는 안과 밖을 나누는 동시에 소통하게 만드는 소재로 단단하되 존재감이 없고, 완벽하면서도 불완전하다. 다소 철학적이지만 유리만큼 객관적이고 진실(투명)한 마감재가 또 있을까?
미니멀한 인테리어는 만드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 옷과 소품 등을 넉넉히 수납할 수 있도록 가장 넓은 안방을 드레스룸으로 사용한다. 행어와 서랍장을 함께 구성해 옷과 소품을 용도별, 계절별로 구분할 수 있어 바쁜 출근 시간에도 옷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늘 쾌적한 상태를 유지한다.
“아이가 다 자라면 집은 결국 부부 둘이 생활하는 공간이죠. 식구라고 달랑 둘뿐인데 막힌 벽과 문으로 구획을 나눠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어요. 서재에 있어도, 부엌에 있어도 거실을 통해 소통할 수 있도록 디자이너와 상의해 벽 일부와 중문을 강도 높은 강화유리로 마감했어요.” 유리는 같은 크기라도 부담감이 덜하다는 점도 선택한 이유였다. 북쪽 창가에 있던 다이닝룸과 안쪽 조리 공간의 배치를 바꾸면서 다이닝룸의 폭이 좁아 적절한 테이블을 찾기 쉽지 않았는데, 글라스 이탈리아의 유리 테이블을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고. 양쪽에 수납장을 짜 넣고 가운데 빠듯한 공간에 테이블을 두었는데, 답답해 보이지 않고 개성까지 더한 다이닝룸이 완성됐다. 가장 작은 방이던 서재 역시 구조 벽을 해체하고 유리 벽을 복도 쪽으로 확장해 협소한 공간의 단점을 보완했다. 다소 차가워 보일 수 있는 두 공간에 벽난로와 빛이 사방으로 퍼지는 유리 조명등 등을 더해 감도를 높인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침실은 최소한의 가구만 들여 완벽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법칙을 깨는 공간 배치
미니멀한 공간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포인트는 고정관념을 깨는 공간 배치와 감추는 수납. 널찍한 드레스룸을 만들기 위해 메인 침실을 드레스룸으로 양보하고 침실은 남향으로 창이 난 안쪽 작은 방으로 옮겼다. 침대와 사이드 테이블, 조명등 등 최소한의 요소만으로 휴식 공간을 완성했다. 자세히 보니 침실은 물론 침실과 드레스룸 사이 복도에 붙박이장이 촘촘이 마련돼 있다. 이사 오면서 살림을 많이 정리하기도 했지만 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옷과 소품, 책 등은 널찍한 자리를 마련해 수납하니 다른 공간은 어질러질 일이 없다.
소파와 라운지체어가 리드미컬하게 배치된 거실. 빔 프로젝터로 영화 보길 즐기는 부부는 소파 맞은편에 간단한 오디오 시스템만 두어 여백 있는 거실을 완성했다. 소파 뒤편의 나무 질감이 돋보이는 벤치는 알카롤 제품으로 로사나 오를란디가 소장하기도 했다.
“보름 동안 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왔어요. 워낙 여행을 좋아해 한 지역을 정해 오래 머무는데, 숙소를 꼼꼼하게 고르는 편이에요. 그러고 보니 집을 고치며 일정 부분 호텔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편리한 시스템을 두루 갖춘 호텔은 관광의 피로감을 말끔히 씻어주는 것은 물론, 라이프스타일 감각 또한 배울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잠깐 의문이 든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마치 자로 잰 듯 똑 떨어지는 공간에서 과연 맘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단순함에 있다. “제가 디자인 전문가는 아니지만 미니멀한 디자인의 매력은 단순함에 있다고 생각해요. 가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톰 딕슨, 루이스 폴센의 조명등이나 좋은 가죽을 사용한 소파 그리고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무난한 디자인의 라운지체어 등이 국적과 문화, 장소, 스타일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사랑받는 이유가 바로 ‘단순함’에 있지요.”
아파트를 떠나 빌라로 이사 온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반려 강아지 때문. ‘모모’ 역시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창가에 전용 계단을 두었다.
디자인이 단순한 가구는 공간과 다른 가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유롭다. 나이 들수록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비우고 겸손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레노베이션을 하며 터득하고 또 인테리어로 표현한 부부. 레노베이션은 사실 그 시기에 가장 이루고픈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결과일 듯하다.
단순한 공간을 ‘빛’내주는 가구&소품
가구는 실내 건축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부부가 평소 하나 둘씩 모은 가구와 소품은 이 집을 특별하게 만드는 또 다른 주인공. 자칫 심심할 수 있는 미니멀 인테리어에 경쾌한 컬러 포인트와 온기를 전하는 주역들을 소개한다.
1 프리츠 한센 드롭 체어 등받이부터 시트까지 하나로 성형한 간결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의자. 아르네 야콥센이 1960년대에 디자인한 제품으로 2014년 재출시되었다. 뉴트럴 톤으로 다양한 컬러를 섞어도 조화를 이루는 제품이다. 보에(02-517-6326) 판매.
2 구자현 작가의 판화 작품 조각도가 가르는 결의 방향이 생동감을 전하는 목탄 시리즈. 크기가 작은 작품은 욕실에 배치했다.
3 B&B 이탈리아 메트로폴리탄14 체어 B&B 이탈리아의 스테디셀러. 인체 공학과 편안함에 중점을 두어 낮으면서도 깊이 있는 시트 디자인이 특징이다. 계절에 따라 쿠션으로 포인트를 준다. 인피니(02-3447-6000) 문의.
4 풀포 오다 조명등 작은 서재 공간에 포인트가 되는 유리 조명등. 제바스티안 헤르크너가 디자인한 제품으로, 철제 프레임이 공예적 매력을 전한다. 보에(02-517-6326) 판매.
5 포르나세티 향초 강렬한 인상을 남겨 한번 빠지면 계속 모으는 중독성 강한 포르나세티의 향초 시리즈.10꼬르소꼬모 (02-547-3010) 문의.
6 미노티 세자르 스툴 글로시한 래커로 마감하고 각진 디자인이 독특한 미노티의 세자르 스툴. 사이드 테이블로 활용하기 좋다. 디옴니(02-3442-4672) 판매.
7 톰 딕슨 핀fin 라이트 원통 모양의 코퍼 틀 안에 방열판과 아크릴, LED 전구 여섯 개로 구성한 테이블 조명등. 빛의 겹침 효과가 돋보인다. 두오모(02-516-3022) 문의.
8 글라스 이탈리아 플롯 콘솔 피에로 리소니가 디자인한 미니멀한 콘솔. 노란색 강화유리로 마감해 거실에 확실한 포인트가 된다. 보에(02-517-6326) 판매.
9 루이스 폴센 PH 80 플로어 램프 라운지 소파 옆에 포울 헤닝센이 디자인한 플로어 조명등을 오브제처럼 매치해 포인트를 주었다. 몰테니&C(02-543-5093) 판매.
- 화이트, 유리로 개성 더한 미니멀 하우스 감추거나 드러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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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빨리 찾아온 더위 때문일까? 온통 하얗게 마감한 공간, 글라스 이탈리아의 투명한 유리 테이블이 들어선 다이닝룸의 사진을 보는 순간 청량감이 느껴졌다. 언뜻 생기 없이 밋밋할 수 있는 화이트 인테리어를 취향 분명한 공간으로 승화한 김애미 씨 부부의 개조 이야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