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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브릭 디자이너 이선영 바느질은 디자인의 도구다
머리가 무겁고 마음이 소란스러운 날이면 청담동의 바느질 작업실을 찾는다는 패브릭 디자이너 이선영 씨. 작은 바늘을 손에 쥐고 있으면 어느덧 마음속 수선스러운 이야기가 저만치 달아나고 오롯이 ‘나’와 ‘손끝’에 집중하게 된다. 원단으로 색과 비례를 배우고, 바늘을 도구 삼아 남과 다른 디자인을 펼치는 그의 바느질 이야기.

이선영 씨의 창작 작업실. 머리가 복잡한 날, 편안하게 바느질에 몰입할 수 있도록 아이보리와 그레이 컬러를 조금씩 다르게 썼다.
오랜 세월 즐기던 취미를 느지막이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보면 특유의 에너지와 여유가 있다. 즐기면서 일을 했을 뿐인데 돈까지 벌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우연히 취미로 시작한 바느질이 계기가 되어 패브릭 디자이너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이선영 씨.

“아이 옷을 만들어 입힐 요량으로 시작한 바느질이 적성에 딱 맞았어요. 바느질에 재미를 붙여 재봉틀 앞에 붙어 살았더니 어느새 아동복 디자이너가 되어 옷을 짓고 있더라고요.” 옷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으로 소품과 가방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는 옷과는 다른 손바느질의 매력에 눈뜨게 되었다. 보통 제품을 만들기 전 샘플 작업을 할 때는 수정할 수 있도록 손바느질로 하는데, 그 과정이 마치 작가가 연필로 도안을 그리고 스케치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 한 땀으로도 형태가 달라질 수 있어 몰입은 필수요, 원단의 조직을 들여다보며 미세한 색의 조화를 경험하다 보니 저절로 색채 감각이 생겼다. 바느질 기법을 소개하는 책은 많지만, 감각만큼은 직접 경험을 통해 눈대중, 손 감각으로 익혀야 한단다.

언제나처럼 치밀한 계획 없이 기분 따라 만드는 바느질 작품. 창작자의 아이디어에 따라 베개 커버, 이불, 가방, 싸개 단추까지 가능성은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는 이불을 짓기 위해 전통 바느질을 배우면서 자연스레 비례미를 터득했다. 컬러와 패턴을 어떻게 배치하느냐, 얼마나 깊게 바늘땀을 뜨느냐, 어떤 색의 실을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확연히 달라지는 게 바로 조각 잇기의 매력이다. “바느질할 때 특별한 목표를 세우거나 규칙을 정하지 않아요.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이나 바느질할 때 쓰는 자나 가위 같은 소소한 일상이 바느질의 본이요, 디자인의 시작이죠.”

심플한 디자인에 ‘good morning’이라는 메시지로 포인트를 준 베개 커버, 줄자로 손잡이를 만든 에코백, 자투리 천을 패치워크 해 만든 안대, 오버로크로 마감한 자체가 디자인 포인트가 되는 머플러 등 그가 만든 아이템이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이유다.

바느질을 하면서 날실, 씨실을 집중해 보면서 ‘색’에 대한 예민함을 배웠다. 조금씩 다른 컬러를 부드럽게 조합해 디자인한 공간은 ‘색’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손으로 쓰는 나의 이야기

“인테리어할 때 주로 현장에서 페인트를 조색해 쓸 때가 많아요. 저는 기준 컬러를 정한 뒤 미세하게 톤 차이가 나는 컬러들을 부드럽게 조합해 구성하는 편인데, 청담동 작업실을 비롯해 이렇게 디자인한 공간은 왠지 모르게 따스한 느낌을 준다고 해요.”

사무실 겸 바느질 작업실로 사용하는 10평 남짓한 작은 오피스텔은 아이보리와 그레이 컬러를 주조색으로 편안하게 꾸몄다. 원단과 바느질용품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쪽 벽에 매입식 선반장을 짜 넣고, 아웃도어용 접 이식 테이블을 작업 테이블로 활용, 가벽에 행어를 달아 패브릭 소품을 걸어두는 등 작은 공간을 실용적으로 활용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는 리넨. 편안한 색상을 구현해 어디에나 잘 어울리고 구겨지면 구겨지는 대로 멋스러워서 오래도록 쓸 수 있어 좋다.

바느질에도 영감을 준다는 인테리어 서적.
“리넨은 천이 워낙 제멋대로예요. 날씨에 따라 늘어지기도 하고 원래 모양대로 되돌아가려 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질감이 보드라워지고, 편안해요. 침구, 베개 커버는 물론 이렇게 가방도 만들 수 있어요. 리넨에 우레탄을 바르면 조직감은 살아 있으면서 탄탄해져 개성 있는 에코백이 완성되죠.”

그는 늘 천으로 만든 가방을 들고 다닌다. 모두 직접 손바느질 해 만든 제품으로 자칭 타칭 에코백 전도사다. 백화점에 가면 더 세련되고 근사한 가방이 수두룩하지만 그는 가방만큼은 제 손으로 만든 것을 고집한다. 몇 년 전 <행복>과 함께 에코백 만들기 클래스를 진행했는데, 드로잉부터 시작하는 창작 바느질로 인기를 모았다. 모양과 소재 모두 자유롭게 선택하고, 만드는 방법을 딱히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낙오하는 사람 없이 자신만의 방법으로 가방을 만들더라는 것. “물건을 많이 갖고 다니는 사람은 주머니를 엄청 많이 만들어요. 그 작은 가방에 자신의 캐릭터를 담는 것이죠. 무엇보다 손수 만들었다는 ‘핸드메이드’의 기쁨이 클 테고요.”

(왼쪽) 접이식 테이블 위에 리본, 수예용 가위, 실패, 골무, 바늘 꾸러미, 줄자, 다양한 싸개 단추 등이 펼쳐져 있다.
(오른쪽) ‘jaa’라는 브랜드로 잠과 관련한 아이템을 선보일 계획. 실리콘 밴드를 사용하고 손바느질로 만든 안대. 

바느질로 만든 에코백에 가죽 가방 못지않은 디자인 감각을 불어넣는 것이 목표라는 이선영 씨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좋은 소재에 세련된 디자인 감각, 예술성까지 가미한다면 핸드메이드의 완성도는 더욱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급 실크나 울, 캐시미어 같은 천도 틈틈이 접해보면서 그것이 주는 느낌과 그것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스타일을 경험하는 것은 물론 공연이나 전시, 막내 영준이가 읽는 책에서도 의외의 아이디어를 찾는다. “바느질 도구 중 하나인 줄자를 모티프로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영어로는 ‘jaa’, 치수 재는 ‘자’와 ‘잘 자’ 할 때 ‘잠’이라는 중의적 뜻이 있죠. 줄자 어깨끈을 단 에코백을 시작으로 고운 비단을 사용한 안대, 또 제가 몇년 전부터 만든 침구 등을 소개하려고요. 고단한 현대인에게는 꿀잠, 숙면이 중요하니까요.”

아이디어를 조금 발휘하면 현란한 기술이 없어도 멋진 패브릭 디자인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선영 씨. 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에코백 하나씩은 꼭 사갈 수 있도록 한국을 대표하는 에코백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도 덧붙인다.

작은 오피스텔에 가벽을 세워 공간을 분할했다. 매입형 선반 수납장은 패브릭과 도구를 수납하기 좋다.
“바느질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아이들 잘 키워 좋은 대학 보내고 결혼시키는 것을 지상 최대 과제로 알고 살았을지 몰라요. 바느질은 일과 육아에 잊고 있던 저를 찾게 된 계기이자 온전히 제 이야기를 담는 도구예요. 게다가 전 이미 노후 준비까지 다 마쳤거든요. 늙어서 재미 붙이고 할 수 있는 일을 배워두는 게 가장 중
요한 노후 준비니까요.”

취미가 직업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일에 대한 단단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뭔가를 어서 이루어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없었기에 오히려 우연히 나타난 샛길을 찾은 이선영 씨. 그가 꼽는 손바느질의 매력은 무궁무진함이다. 실과 바늘, 천 한 장이면 못 만들 게 없으니, 오늘도 햇살 좋은 작업실 한편에서 한 땀 한 땀 바느질 중이다. 

글 이지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