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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골목길, 백 살 한옥의 재구성
현대적 주거 공간의 편리한 동선과 요소를 담되, 툇마루와 마당이라는 한옥의 운치까지 더했으니 이보다 좋은 게 있겠는가! 불편하거나 럭셔리하다는 한옥에 대한 편견과 고집을 벗겨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을 하나씩 입힌 누하동 한옥은 ‘한옥’이라 부르기 이전에 우리 삶과 가장 가까운 보편적 건축임에 틀림없다.

1 1910년대 서민형 작은 한옥을 레노베이션한 누하동 서현&리현이네 집. 부엌을 중심으로 부부 공간과 자녀 공간이 마주하는 ㄷ자형 구조의 작은 한옥이다. 어느 곳에서도 마당이 보이는 것은 가족에게 그야말로 크나큰 축복이다. 
2 1백 년간 집이 품고 있는 이야기가 지워지지 않도록 썩지 않은 대량과 서까래는 다듬어 재사용했다. 한지 등과 골목길로 난 낮고 작은 들창, 부엌의 파란 타일이 정겹다. 

1910년 겨울의 한 자락, 경복궁 서쪽 마을 골목길에는 새벽부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광과 마당, 부뚜막을 바지런히 오가며 아침을 맞는 아낙네들. 마당을 쓸던 아이는 이내 빗자루를 내려놓고 담너머 동무를 부른다. 대청을 지나 안채까지 잰걸음으로 아침상을 차려 내는 어미의 수고스러움은 아랑곳 않은 채 골목길에서 그저 뛰놀기 바쁘다. 타임머신이라도 탔을까? 2015년 종로구 누하동, 행정구역과 골목 풍경은 제법 달라졌지만 당대 서민 주택이던 작은 한옥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침이면 안주인은 가족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남편은 출근 준비에 한창이다. 방학을 맞아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발그레한 표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강유선・권기태 부부와 서현・리현이가 사는 한옥 이야기다.

철저히 예습한 한옥살이
30대 젊은 부부가 한옥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아이들 때문이었다. 여섯 살 리현이와 아홉 살 서현이가 아랫집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집. 해외 근무를 몇 달 앞두고 우연히 찾은 서촌 한옥 보존지구의 작은 한옥을 번지수만 확인하고 덜컥 계약한 부부는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2년 동안 고민과 걱정이 많았단다. 일반 아파트 개조도 쉬운 일이 아닐진대, 낡은 한옥을 보수하는 일부터 건평이 16평 정도인 작은 한옥에서 사는 것이 과연 잘 맞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인터넷으로 한옥에 대한 기사를 무수히 읽었어요. 그저 마음에 품는 한옥이 아닌, 생활하는 데도 편리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가 필요한지 하나씩 정리해나갔죠. 차근차근 공부하니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주거 공간의 큰 그림이 그려졌고, 어떤 건축가에게 맡기면 좋을지까지 가닥이 잡혔어요.” 부부의 준비는 단순한 공부나 취향을 찾는 여정에서 끝나지 않았다. 해외 근무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임시 거처를 찾던 부부는 바로 옆 골목의 규모가 비슷한 신축 한옥에서 예행연습을 시작했다. 설계를 맡은 구가도시건축의 조정구 대표는 바로 이 부분을 높이 샀다. 고생을 자처하며 지낸 1년의 시간동안 느낀 장단점을 바탕으로 설계사무소에 정확히 의견을 전달했으며, 한옥에서 살기에 누릴 수 있는 장점과 포기할 것을 터득하는 과정이 된 것이다.

1 아직 어린 자매를 보살펴야 하는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기에 부엌이 중심인 구조를 선택했다. 가족실에서 바라본 부엌. 식탁과 창호 사이에 긴 복도가 생겼다. 복도를 통해 부부 공간과 자녀 공간의 동선이 이어진다. 
2 도로, 마당, 방의 높이 차가 크지 않아 드나들기 편하고 마당과 집의 규모가 균형을 이뤄 시각적으로 편안함을 준다. 
3 작은 욕실에 욕조를 넣은 알찬 구성이 돋보인다. 오래된 것의 깊이와 새로운 것의 편리함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축가 조정구는 일부 유리는 옛날 유리를 골라 한옥의 정취를 더했다. 
4 가족실에서 바라본 안방. 

“토지대장을 떼어보니 1910년에 지은 한옥으로 추정되더군요. 한옥은 나무 짜맞춤 골조이기 때문에 충분히 튼튼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기울게 마련인데, 기운 상태에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부분 수선을 한 터라 집이 전체적으로 기운 채 단절되어 있는 위험한 상태였어요.” 작은 마당과 삼면이 골목길에 면해 있는 오래된 한옥은 문간채의 방들이 크기가 작고 채광이 안 되는 것은 물론 막힌 벽이 많아 바람이 잘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서쪽과 남쪽의 외부는 타일 화방벽으로 둘러싸여 기둥 상태가 좋지 않고 서까래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구가도시건축 정승환 팀장은 목재의 상태를 하나하나 파악해 보수와 교체를 결정하고, 현재 가족의 생활을 한옥에 풀어내기 위해 동선을 재정비했다.

이 집의 구조는 ㄱ자형 전통 서민 한옥의 평면과 일치한다. 대문 왼쪽 옆으로 작은 방과 대청, 부엌, 안방 (안채)이 있고, 대문 오른쪽 옆으로 문간방과 광이 연결된다. 조정구 대표는 작은 집을 넓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ㄱ자형 구조를 ㄷ자형 구조로 변경했다. 대문을 오른쪽 담으로 옮긴 뒤 대청 자리에 부엌을 배치하니 부엌 양옆으로 부모 공간, 자녀 공간이 자연스럽게 나뉘면서 마당을 매개체로 통합되는 구조다.
“대문을 열면 바로 식탁이 보여 따뜻한 느낌이 들지요. 식탁에는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고, 엄마가 집안일을 하는 동안 아이들이 숙제를 할 수 있어요. 손님이 오면 얘기를 나누는 응접실 기능도 하고요. 부엌 오른쪽 옆 대청은 가족이 모이는 또 하나의 가족실이자 엄마, 아빠만의 거실이 돼요.” 16평 작은 집이 결코 답답해 보이지 않는 것은 이처럼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열린 구조 덕분이다.

1 아이 방은 잠자는 방과 놀이방을 구분하고 툇마루 아래에는 책 수납장을 짜 넣었다. 단 차이를 두어 아이들에게 신나는 놀이터가 된다. 
2 한옥은 주방이 좁아 불편하다는 건축주의 의견을 반영해 주방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을 만큼 널찍하게 구성하고, 아일랜드 조리대 양쪽으로 수납장을 짜 넣는 세심함까지 발휘했다. 
3 안방 벽장 안쪽에 수납장을 짜 넣고 화장대를 두어 드레스룸으로 활용한다. 
4 아이 놀이방과 안방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구조. 
 
지금, 현대를 사는 한옥 입주 후 한 달을 살아
보니 걱정하던 웃풍도 없고 방마다 설치한 들창 덕에 집이 환하고 쾌적하다는 가족. 나무와 나무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충전재를 꼼꼼히 넣는 것은 물론 전통 창호 역시 기밀성을 높여주는 개스킷gasket(물이나 가스가 누설하는 것을 방지하는 패킹)을충분히 탑재한 제품을 제작한 덕분이다.

또 한옥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 수납은 틈새 공간을 활용했다. 경사 지붕과 천장 사이의 공간을 창고로, 안방과 아이 방 한쪽 벽장에는 화장대와 수납장을 짜 넣은 것. 욕조가 딸린 욕실은 가벽과 슬라이딩 도어로 용변실을 분리해 네 식구가 하나의 욕실을 사용하는 불편도 덜었다. 기존 대문 자리에 있던 작은 툇마루는 그대로 살린 것이 특징이다. “집이 낡았다고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은 왠지 등장인물을 다 없애고 혼자 주인공이 되는 것 같잖아요? 툇마루, 방과 방 사이의 단 차이 등 원래 이 집의 출입구였던 ‘대문’ 자리는 최대한 원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시간을 간직한 것은 새것이 만들어낼 수 없는 스토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죠.”

1 아이 잠자는 방에는 정사각형 쪽문을 내어 재미를 주었다. 
2 안방에서 가족실을 바라본 모습. TV 왼쪽 옆으로 슬라이딩 도어를 닫으면 부엌과 분리되는 구조다. 
3 ㄱ자형 서민형 한옥의 대문 위치를 바꿔 ㄷ자형으로 재구성한 누하동 한옥. 대지 면적 95.56㎡(28평), 건물 면적 52.89㎡(16평).

오래된 것이 품고 있는 깊이는 새것이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친숙함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조정구 대표. 그래서일까, 2015년을 사는 어린 두 자매는 1백 년 전 이곳에서 뛰놀던 아이처럼 본능적으로 툇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인형 놀이를 한다. 또 침대는 꿈도 꾸지 못할 터무니없이 작은 방과 벽장을 오가며 숨바꼭질을 하는데, 자매에게 이 작은 공간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판타스틱한 놀이터다.

“설계를 맡길 때도 네 식구가 같이 왔어요. 집을 짓는 동안 주말마다 아이들과 현장을 찾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요. 어린 시절 아빠가 집을 짓던 기억이 아이들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요.”

기억과 몸이 합체되어 오롯이 추억이 되는 공간 한옥. 무엇보다 “한옥이니까 어쩔 수 없지”라고 포기하거나 자기 합리화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했다는 조정구 대표는 “한옥은 이래야 해”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비로소 이 시대에 맞는 한옥을 지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옥을 설계하면서도 끊임없이 구조적 치환을 꿈꿉니다. 전통 목구조가 아니어도, 서양식 목구조나 콘크리트 골조의 집으로 변환되었을 때도 전혀 불편함이 없는 집 말입니다. 그게 바로 지금의 한옥이 지녀야 할 시대정신 아닐까요?”

구가도시건축 조정구 대표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2000년 구가도시건축을 설립했다. ‘우리 삶과 가까운 보편적 건축’에 주제를 두고 개인 주택부터 작업실, 갤러리, 근린생활 시설, 호텔 등 우리 생활에 친근한 공간을 설계하며 최초의 한옥 호텔 라궁, 전등사 함월당, 북촌과 서촌의 도시형 소형 한옥 대수선까지 한옥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설계와시공 구가도시건축(02-3789-3372)

글 이지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