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 화가 모네가 프랑스 노르망디의 지베르니로 이사해 정원을 꾸미기 시작한 것은 마흔세 살. 일본식 정원에서 영감을 받은 세기의 화가는 자신이 살던 농가와 그 주변 땅까지 구입해 숲같이 너른 정원을 가꾸는 것을 그림 그리는 것 이상으로 즐겼고, 연못과 다리까지 있는 정원의 아름다운 풍광은 모네의 대표작 ‘수련(Water Lily)’에 담겨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남았다. 화가이자 동화 작가인 타샤 튜더가 미국 버몬트 주 시골의 대지에 그의 동화책 제목 같은 ‘비밀의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것은 50대 중반이 되던 때였다. 30만 평이나 되는 정원 속에서 19세기의 의식주를 추구하던 그는 매일매일의 행복을 담아 70년간 1백 편이 넘는 따스한 동화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동양화가, 더 정확히 말하면 문인화를 그리는 박태후 화가가 전라도 나주에서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건 고작 열일곱 살 되던 해. 중년의 모네나 타샤와는 비교할 수 없이 이른 나이다. 가난한 시골집의 차남인 그는 가정 형편 때문에 이웃 도시의 고등학교 대신 집 근처의 호남원예고등학교를 스스로 선택해 진학하면서 자연스레 나무와 인연을 맺었다.
나무를 기르던 이팔청춘
학교에서는 과수, 채소, 화훼 등에 대해, 특히 외국에서 들여온 식물을 주로 배웠다. 스스로 학비를 충당해야 했지만 남처럼 어린나무를 사다 길러 내다 팔 형편도 못 되었다. 그래서 그는 산을 돌아다니며 열매와 종자를 주워다 형님 밭에 심었고, 이를 대목으로 삼아 배운 대로 외국 품종을 접붙이기해 나무를 팔며 생계를 유지하던 이팔청춘. 잘 자란 나무는 내다 팔고 덜 자란 것은 남기기도 했는데, 그때 남은 나무와 화초가 자라 40년간 1만 2천 평이라는 놀라운 규모의 개인 정원 ‘죽설헌’으로 거듭났다. “대숲에 눈이 내려앉는 아름다운 풍경을 동경해 제 정원의 이름을 ‘죽설헌竹雪軒’이라고 지었습니다. 산에서 떨어진 종자를 주워와 심은 나무와 꽃이 저들 마음대로 자유롭게 자라나 조성된 원림으로, 요즘 우리나라의 산과 숲에서 사라져버린 식물과 자연 생태계가 정원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지요.”
군 입대를 앞두고 광주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그림이 그의 숙명이 되었다. 군 제대 후 행정직과 농촌지도직 두 가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모든 사람이 추천하는 행정직이 아닌 농촌지도직을 선택한 것은 농촌 청년들의 클럽 활동을 이끄는 직업적 매력과 더불어 행정직보다 비교적 일찍 퇴근해 밤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숙명적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낮에는 공무원으로 일하고, 밤이면 그림을 그리는 절반의 화가 생활을 처절하게 이어가다가, 연금 지급 충족 기간인 20년 근속을 다 채우자마자 미련 없이 퇴직해 그토록 꿈꾸던 전업 화가로 살고 있다. 그사이에도 정원 가꾸기는 변함없이 이어 졌다. 차곡차곡 월급을 모은 돈으로 고등학교 시절 나무를 심은 땅을 형님에게 구입했고, 다시 돈이 모이면 그 주변의 땅까지 조각조각 구입해 고요한 대 숲과 파초 숲, 수련이 피어나고 버드나무가 우거진 연못 여섯 개,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꽃밭과 산책로에 고즈넉한 기왓장 담이 이어지는 1만 2천 평 정원이라는 대작을 완성했다.
1 마치 가을의 문을 열어주듯 초가을이면 어김없이 붉은 꽃을 내는 꽃무릇은 죽설헌 산책길 어디에나 지천으로 피어 있다.
2 대숲이 보이는 화실의 창밖에는 연못 물을 끌어 올린 뒤 갈라진 대나무 사이로 흐르게 해 수변 공간의 운치를 살렸다.
고유한 자연이 가장 훌륭한 작품
“가난한 젊은 시절이었지만 해외로 배낭여행을 부단히 다녔습니다. 대자연과 대도시가 있는 일본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에 가보니 ‘왜 나는 이토록 작고 초라한 나라에서 태어났나’ 하는 원망을 먼저 하게 되었지요. 우리 것이 최고고 우리 것만 아름답다고 알던 제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느껴졌죠. 그런데 여행을 더 많이 하다 보니 ‘우리 것이 최고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것은 그 어디에도 없는 고유한 것’이라는 절절한 깨달음이 찾아왔어요. 그래서 나의 정원과 작품은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박태후다워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우리도 우리만의 좋은 문화가 있다는 자긍심, 최고보다는 고유하다는 자부심이 가장 소중한 예술적 가치니까요.”
그 강렬한 깨달음은 이후 그가 사라져가는 한국 토종 식물의 종자를 채취해 정원을 꾸미는 마음의 씨앗이 되었다. 화려한 외국 꽃 못지않게 우리의 야생화, 채소 꽃도 저마다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모르는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우리 나무, 꽃, 단풍이 유난히 아름답다고 이름난 곳을 찾아다녔고 그 열매나 종자를 주워와 그의 정원 곳곳에 심었다. 예를 들어 정원의 개호두나무는 40년 전 인근의 다도 불회사에 다니러 갔다가 아름다운 나무 군락을 보고 반해 떨어진 개호두 열매 몇 개를 주워다 심은 것. 반면 그 때 보고 반한 불회사의 개호두나무는 다 베어내어 이제는 사라져버렸으니 우리의 토종 식물을 귀히 여기지 않는 세상의 안목이 심히 한탄스럽다.
나뭇가지에서 시들어 지저분해 보이는 외국산 겹동백과는 달리 완연한 봄에 만개해 송이째 뚝뚝 떨어져 운치를 더해주는 우리네 야생 홑동백은 해남 대흥사에 갔다가 알사탕만 한 동백 열매를 주워와 그 속의 종자를 받아 심었다. 계절의 시계처럼 가을이면 어김없이 붉은 장관을 펼치는 토종 단풍 종자는 장성 백양사에서, 일본 사쿠라에 비할 바 없이 청순한 우리나라 야생 산벚나무는 다도 불회사에서 가져온 종자로 심는 등 너무 다양해 셀 수조차 없는 다양한 우리나라 전통 수종과 화초가 자연 생태계를 이루었다. 이렇듯 성장하는데 적합한 자리에 종자를 심은 뒤, 이따금씩 높게 자란 잡초만 제거해주는 사이 남도의 온화한 기온과 비옥한 토지에서 조물주의 축복을 받은 듯 잘 자라운치 있고 멋스러운,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만의 고유한 정원, 남도의 정서가 깃든 넓은 정원이 만들어진 것이다.
프랑스도 미국도 부럽지 않은 한국 정원
집을 지을 때도 그만의 고유성을 살리려고 애썼다. 결혼을 하고 둘째 딸을 낳은 다음 해에는 정원 속에 가족의 집을 지었는데, 꼬박 30년 전의 일이지만 부부에겐 여전히 그때의 기억이 갓 피어난 배꽃처럼 싱그럽고 생생하게 남아 있다. 우거진 나무숲을 훤히 조망할 수 있도록 벽과 천장에까지 통창을 낸 집을 박태후 화가가 직접 스케치했고, 이웃의 목수와 미장하는 사람을 고용해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며 대단한 공사를 했다.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일꾼의 식사와 새참을 해 나르며 집 짓기를 응원했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안방 구들장에 불을 때고 무쇠솥에 물을 끓이면서 온 가족이 그 집에 함께 살고 있다.
30년 전에 사방도 모자라 천장에까지 통창을 낸 파격적 집이라니! 그것도 모 자라 고목 한 그루가 있던 거실 한가운데는 사각형 유리 벽을 내고 천장을 뚫어 그 나무가 살도록 했으니 소박하고 담박하지만 그야말로 요즘 사람들이 선호하는 미니멀한 공간 건축을 30년 전에 실현한 것이다. 게다가 몇 년 후에는 집 한편에 창밖으로 대숲에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비현실적으로 펼쳐지는 화실까지 담아냈다. 그리하여 죽설헌은 박태후 화가 가족의 거주 공간이자 작업실 기능을 모두 충족하는 공간,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한국 토종 식물이 자라 우리 전통문화와 식생의 고유한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 프랑스 클로드 모네의 정원도 미국 타샤 튜더의 정원도 부럽지 않은 박태후다운 무릉도원이 되었다.
1 거침없이 자라는 대나무 숲은 좋은 바람과 맛난 죽순, 그윽한 정취를 죽설헌에 선물한다.
2 30년 전 그가 설계하고 동네 목수를 데려다 지은 집은 창이 벽을 대신하고 거실 천장에까지 창을 낸 파격적 디자인으로 숲 속에 앉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3 흔히 바나나로 혼동하는 파초. 바나나보다 추위에 강하고 이국적 풍광 때문에 추천하는 정원수다.
전문가 아닌 고수가 만든 숲
“오랫동안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아온 농부는 제각기 자기 분야의 고수입니다. 농사도 따져보면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것 못지않은 자연과학이 숨어 있어요. 시골 농부는 제 이름도 쓸 줄 모르고 그 흔한 논문 한 편 써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언제 콩 심고, 고구마 캐야 하며, 마파람 불면 언제 어느만큼 비가 올지를 대개는 짐작할 수 있지요.” 그의책 <죽설헌 원림>에서 발췌한 글처럼, 고등학교 때부터 40년간 거대한 자연 정원을 아내와 둘이서 가꾸고 한국 토종 식물을 채집하면서 그는 이론 전문가와 비견할 수 없는 한국식 조경과 자연 속 삶의 고수가 되었다.
“일본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나라 정원의 9할 이상은 일본식 정원입니다. 그들은 자연을 최대한 축소해 자기 집 정원에 들여놓으려 합니다. 그래서 분재가 발달했지요.
나무를 철마다 깎아 반듯한 모양으로 정리하는 요즘 우리의 학교, 건물, 관공서의 모든 조경 방식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서구식 정원 양식은 한마디로 자연 정복이에요. 대지를 사람이 원하는 대로 기하학적으로 조성합니다. 또 가축을 키웠기 때문에 흙 대신 잔디를 선호 합니다. 우리가 정원에 잔디를 까는 방식은 서구식 정원의 영향이지요.” 그렇다면 한국식 전통 정원이란 어떤 양식일까? 흔히 한국의 전통 정원이라면 창덕궁 후원이나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세연정 등을 예로 든다. 하지만 이 정원은 당대 한국인의 1%도 되지 않은 특수 계층의 정원 문화이지, 대다수 서민의 정원 문화가 아니니 우리 서민의 전통적 정원 문화의 고유함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창덕궁 후원은 왕과 왕비 두 사람을 위한 정원이고, 소쇄원이나 세연정은 부유한 선비, 지금으로 말하자면 백화점의 VVIP를 위한 정원이니 이것만 우리의 전통 정원 양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서민의 정원은 마당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마당에서 보리 타작, 깨 타작같이 농산물을 정리해야 했으니 잔디가 아닌 맨땅 문화이고 잔디는 묘지에만 있었어요. 간장과 된장을 두던 장독대는 한국만의 고유한 정원 양식입니다. 먹을 것이 귀했으니 마당의 앞쪽과 뒤쪽 어디에든 텃밭을 만들어 상추, 고추, 부추 등을 심었고 때에 따라 피어난 예쁜 채소 꽃이 곧 정원의 화초였지요. 한 치의 땅도 놀리지 않으려고 처마 밑에도 호박을 심어 넝쿨이 지붕을 타고 올라가며 박꽃과 박이 열리는 풍경, 이것이 우리나라 서민의 삶에 깃든 정원 풍경이었지요.”
자연 생태계의 교훈을 주는 정원
이른 새벽의 죽설헌. 일찌감치 일어나 동네 한 바퀴를 달린 박태후 화가가 충성스러운 진돗개 진순이와 함께 조용히 정원을 산책하며 숨을 고른다. 지붕 위로 가지를 뻗은 개호두나무는 여름에는 무수한 잎으로 지붕의 햇볕을 가려주고 가을과 겨울에 낙엽을 쓸어내면 가지 사이로 지붕에 햇살을 들게 해주어 고맙다. 나무와 꽃이 무성하게 자라니 연못에는 물오리, 왜가리가 아예 터를 잡고 눌러앉았으며 철새가 계절마다제 별장처럼 드나든다. 물총새, 원앙, 뜸부기, 명새, 참새, 직박구리, 물까치,어치, 비둘기, 딱따구리 등 이제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의 토종 새가 지저귀고 수련이 피어나는 연못에는 가물치, 메기, 붕어, 빠가사리, 미꾸라지 등 토종 물고기가 먹이사슬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저들 나름의 생태계로 세월을 이어간다.
호두, 자두, 앵두, 감, 은행, 꿀은 나무에서 절로 나고 비닐을 씌워 사계절 내내 수확하는 가족의 천연 텃밭에는 토란, 감자, 고구마, 고추, 오이, 가지, 토마토, 들깨, 부추, 갓, 무와 배추, 상추와 치커리까지 자라는 정원 속의 삶. 대숲에서 이슬 먹고 자란 차나무에서 새순이 돋으면 찻잎을 따서 녹차를 우려 먹고,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베어 온 죽순으로 반찬을 하고, 못에서 딴 연잎으로 연잎밥을 지어 먹으면서 부부가 해로하고,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순수하고 꾸밈없이 자란 두 딸이 모두 아버지와 같은 화가가 되었으니 이보다 고유하고 영혼이 풍족한 삶이 또 있을까. 물론 숲 속 정원에서의 삶에도 고초는 있다. 한번 때면 거실이 후끈후끈한 무쇠 벽난로를 제작했지만 연통을 제대로 내지 못해 집안이 오소리 잡듯 연기로 가득 차기도 하고, 안방은 아궁이에 불을 때야 하는 구들장이라 그의 아내는 나무를 주워다 불을 피우고 무쇠솥에 물을 끓이는 수고를 30년째 매일 하고 있다.
이따금씩 대나무로 거미줄을 걷어내야 하고 여름에는 부채로 모기를 쫓는 조금은 불편한 삶이면 어떠하랴. 이른 새벽 대숲의 바람을 맞고, 보름달이 뜬 밤이면 새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까치발로 걷고, 사시사철 갖가지 꽃향기가 가득한 숲을 즐기는 환희는 온전히 이들 가족의 소유다. 주인은 동 서남북으로 난 네 개의 출입구를 막지 않고 인터폰 대신 길가에 소박한 나무 표지판을 놓아 “전화를 하고 오셨는지요?”라고 정중히 묻는다. 그러니 주로 지인이자 남도의 예술가들인 방문객은 가족의 삶의 터전인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 반드시 미리 전화를 하는 예를 갖춘다. 봄꽃이 아름답게 필 때에는 꽃밭에 지인을 불러 포틀럭 파티를 하고, 파초가 드리워진 숲 속에서는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진한 차향이 우러나는 그의 집 거실은 남도 예술인이 즐겨 모이는 살롱이다. 미술관을 지으려 비워둔 빈터에 작은 건물을 세운 후 언젠가는 이 아름다운 죽설헌을 우리 사회에 선물할 계획이라고 하니 프랑스와 미국 부럽지 않은 이야기가 담긴 정원을, 화가와 가족의 평생이 담긴 정원을 산책하는 기쁨을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월 출간한 <죽설헌 원림>은 자신이 죽설헌을 가꾸며 느꼈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정취는 물론 식물과 자연 생태계에 대한 소감과 정보까지 담았다.
화선지에 자연을 그리는 화가의 일생
자신이 가꾼 자연 정원의 생태계 속에서 해 질 무렵 정원 일을 하고 밤에는 작품에 몰입하는 화가의 화폭에 죽설헌의 이 평화로운 자연이 담긴다. 그의 그림은 화선지 면을 거의 비운 채 정갈한 자연의 찰나만 그려 넣은 미니멀한 동양화지만, 해외 아트페어에 전시한 그의 그림을 본 관람객은 여백 앞에서 유난히 오래 머물고 작가에게 수많은 질문을 한다. 아마도 멀리 한국 전라도 나주 죽설헌에서의 순수한 삶이 그 여백에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설명과 배경지식 없이도 오로지 전 세계 관람객과 감성으로 소통하고, 놀라운 화답을 얻는 경험을 여러 번 거듭하면서 박태후 화가는 주로 해외 전시와 아트페어에서만 작품을 선보이며 호평을 받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곳은 1만 2천 평 자연 정원 속의 내밀한 화실이지만, 그림으로 소통하는 곳은 드넓은 전 세계니 화가의 공력이 요란을 떨지 않아도 또렷한 존재감으로 피어나는 정원 한구석의 능소화처럼, 달빛 아래 몰래 고개 드는 옥잠화처럼 고유하게 세상에서 빛을 발한다. 그 빛을 잃지 않기 위해 그는 한국의 자연 정원을 고수固守하는 고수로, 자연을 함축해 그리는 고수高로 죽설헌의 원림에서 박태후다운 생을 고유하게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