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은당의 붉은 대청마루에서 바라본 풍경. 대웅전을 떠올리게 하는 장중하고 남성적 기운의 한옥 너머 북한강의 산수가 가득 들어온다. 대청마루에 앉아 즐기는 티타임은 초은당을 가장 완벽하게 느끼는 방법이다.
‘ㄱ’자형 구조의 초은당 내부에서 사택 공간으로 이어지는 복도. 이곳 역시 안팎을 옻칠로 마감하고, 실크 벽지로 벽면을 꾸몄다. 창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어 오는 자연 조명이 내부를 은은하게 비춘다.
뒤로는 굽이진 산이 있고, 앞에는 강이 흐르는 그 중심에 흥과 멋을 품은 한옥이 앉아 있다. 한국 고전의 가치와 선비 문화를 재조명하는 데 앞장서온 해동경사연구소 권오춘 이사장이 주인장인 명품 한옥, ‘초은당招當’이다. 초은당을 의역하면 ‘어진 이를 초대해 노니는 집’으로, ‘초은’은 권오춘 이사장의 호號이기도 하다. 중국 요순시대에 나라를 맡기려는 임금의 제안을 사양하며, “새가 나무에 앉을 땐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물을 먹을 때는 한 모금이면 충분하다”며 강가에서 귀를 씻은 허유와 그것을 본 그의 친구 소부가 소에게도 그 물을 마시게 할 수 없다며 돌아갔다는 ‘은자’ 정신이 바로 권오춘 이사장과 초은당에 담겨 있다.
그는 사표를 내던진 마흔다섯 살까지는 증권 회사에서 17년간 근무한 이른바 ‘증권맨’이었다. “치열한 회사 생활에 머리가 아플 땐 북한강으로 드라이브를 떠나곤 했지요. 침묵하며 명상하고 생각하기 좋았습니다.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이란 말이 있습니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고,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겠다는 뜻으로, 온 세상이 탁하면 은둔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어요. 북한강 변에 터를 잡아야겠다는 마음이 항상 있었고, 운명처럼 초은당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권오춘 이사장은 단 하루도 한복을 입지 않은 적이 없다. 그것도 백로처럼 새하얀 무명 한복이다. “어머니가 직접 재배한 목화를 물레로 실을 뽑아내 베틀로 짠 옷입니다. 70년 전 만든 옷인데 아직도 촉감이 탱글탱글해요. 희다는 것은 원초적 기질, 근본을 뜻합니다. 흰색만큼 화려한 색깔도 없어요. 어린 시절 한복 두루마기를 걸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산소 다니며 도랑도 건너고 들국화도 구경하던 풍경이 선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제 손주도 할아버지가 대청마루에서 하얀 한복을 입고 선비 춤 추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가슴에 남겠지요?”
소나무를 통으로 깎아 만든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권오춘 이사장과딸 권지영 대표.
꽃살 문양을 화려하게 장식한 장은 초은당에서 가장 여성스러운 부분이다. 삼베 위에 옻칠한 장판 등 어느 하나 만든 이의 정성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다.
최고의 장인들이 만든 집
초은당은 웅장하다.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볼 만큼 장중한 기둥과 2m는 족히 돼 보이는 처마가 남성적 기운을 풍긴다. 이는 인간문화재 최기영 대목장의 솜씨다. 그가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 계획이었기 때문에 혼을 담아 완성했다. 그리고 온통 붉다. 인간문화재 정수화 칠장이 한옥 전체에 주칠을 했기 때문이다. 기둥, 서까래, 문,장, 천장, 외벽 등 그의 주칠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심지어 화장실의 수납장까지 붉게 반짝인다. 나무 위에 생칠로 초칠하고, 사포질하고 다시 흙과 옻칠을 섞은 골회를 바르고… 수십 번의 고된 공정이 필요한 것이 옻칠이다. 마룻바닥은 아홉 번, 기둥은 다섯 번을 칠했으니 그 기다림의 시간을 생각하면 초은당은 값을 매길 수 없는 한옥이다. 건물 안팎 전체를 옻칠로 마감한 한옥은 초은당이 유일하다. 구석구석 살펴보면 그 노고에 다시 한 번 감동한다. 삼베 위에 다시 옻칠해 만든 장판과 실크 벽지로 꾸민 방에는 꽃살 무늬 장을 넣어 바깥 기운과는 달리 따뜻한 느낌이다. 문고리는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었는데 문양과 굵기가 각기 다르다. 방충망까지 고려해 만든 삼중문에는 창문이 서로 맞닿는 부분에 홈을 만들어 바람이 새어 나오지 않게 했다. 가구와 장판, 문고리와 창문까지 어느 하나 만든 이의 정성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다. “이런 마루 본 적이 있나요? 나무 앞뒤로 옻칠하고 틈이 벌어지지 않아 물을 끼얹어도 흐르지 않아요. 보통 물가에 살면 습기가 많아 전자 제품이 상하기 마련인데, 옻칠을 해놓아 집이 언제나 보송보송합니다. 방수와 방습, 방화, 방충 모두 탁월하니 이 얼마나 지혜로운가요.”
8여 년 전부터 선비춤을 추기 시작한 권오춘 이사장이 초은당과 산수를 배경으로 순백의 한복을 입고 춤을 추고 있다.
대문보다 한 고지 높은 곳에 위치한 초은당. 주변에 방해되는 건물이 전혀 없어 탁 트인 자연 전망이 특징이다.
하나에 전체가 있고 전체에 하나가 있다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화엄 사상을 모티프로 한 테라코타 2011점. 박종식 작가가 2011년 제작한 토우로, 담장을 따라 전시한 작품들은 초은당을 수호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하늘엔 바람이 불고, 발끝엔 새가 지저귀고
초은당의 정원은 크게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대문을 열었을 때 마주하는 조경화된 정원, 그곳에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널찍한 초원, 그리고 초은당 전체를 감싸는 낮은 담장 사잇길. 대문에 서면 한 고지 높은 곳에 있는 한옥의 추녀 선이 보일 듯 말 듯 시선에 들어온다. 손님을 맞이하는 첫 번째 공간으로 학이 날개를 펴고 귀인을 맞이하듯 절하는 형상의 소나무를 비롯해 싸리나무, 병꽃나무, 아까시나무, 할미꽃, 찔레꽃, 나리꽃, 기린초, 밤꽃 등이 연못과 작은 폭포수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꽃향기, 물소리에 취해 너럭바위 위에 한참을 앉고 싶을 정도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대문 앞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두 번째 정원이 펼쳐진다.
“우리 정원은 ‘비움’의 문화입니다. 온갖 산수의 정치를 정원으로 끌어들이니 이보다 더 좋은 정원이 어디 있을까요? 비우면 여러 사람이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경은 사이드에 집중하고 실제 한옥 안마당은 비운 채로 두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건축가가 지은 건물이라도 자연의 건축을 따라갈 수 없는 법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철새들이 찾아와 지저귀고 꽃을 누리고 인사를 건네는 이 황홀한 경험은 도시 한옥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쁨입니다. 정원에 있는 나무와 돌 하나도 음양의 조화를 고려해 배치했어요. 소나무 세 그루는 우리나라 전통 금강송으로 한옥의 붉은색과 조화를 이루지요. 삼정승을 닮지 않았나요? 우뚝 솟은 소나무를 보고 초은당을 찾기도 쉽고, 솟대의 의미도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공간은 거북이 형상의 맥반석입니다. 여름에는 한낮의 기운이 바위에 스며들어 밤 11시까지 온기가 남아 있지요. 귀한 손님이 오면 서너 명 모여 앉아 이곳에서 풍경을 만끽하며 차와 흥을 나눕니다.”
권오춘 이사장의 말처럼 초은당의 정원은 비어 있지만, 자연으로 가득 채운 공간이다. 눈을 감고 들으면 송홧가루가 휘날리는 소리부터 ‘꿩, 꿩’하는 새소리까지 오롯이 들린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지키는 전통 초은당에 가면 아버지와 딸이 있다. 한국의 전통을 지키고 깊이 있는 문화 공간으로 가꾸고자 하는 부녀의 애틋한 마음이 있다. 10여 년간 권오춘 이사장의 개인 별장이던 초은당을 현재 그의 딸 권지영 대표가 맡아 대중에게 문을 연 것. 초은당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특히 널찍한 안마당과 아름다운 풍광은 결혼식을 치르기 완벽한 공간. 지난해 권오춘 이사장의 장남이자 권지영 대표 오빠의 결혼식을 이 곳에서 치렀다. 웨딩플래너이기도 한 권지영 대표가 오랫동안 정성 들여 기획한 초은당의 첫 번째 결혼식이었다. “최고 장인들의 정성으로 만든 한옥, 물과 산, 바람과 하늘이 어우러진 초은당은 뭘 해도 어울리는 곳이에요. 공을 들인 만큼 무한의 값을 지닌 공간이지요.”
권오춘 이사장은 평생 한 번 치르는 인생의 귀한 축제뿐 아니라 예술 공연, 인문학 강의, 친목 모임 등 특별한 시간을 위한 장소로 초은당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전화 예약을 하면 대청마루에 앉아 다과와 차를 즐기는 특별한 시간도 누릴 수 있다. 또 6월에는 권오춘 이사장의 인문학 강연 소식도 전해왔다. 6월 한 달간 매주 목요일 오후 3시에 두 시간가량 열리는 동양 고전 특강으로 <논어> <도덕경>, 굴원의 ‘어부사’, 백거이의 ‘장한가’를 주제로 강연을 연다. 초은당 대청마루에 앉아 다과를 즐기며 고전을 논하고 친교를 나누는 즐거움을 만끽해보면 어떨까? 권오춘 이사장의 선비춤도 감상할 수 있다. “관세음觀世音, 즉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뜻입니다. 소리를 듣는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보세요. 풍경을 찍는 것이 아니라 풍경의 소리를 찍을 수 있어야 합니다. 초은당은 그런 곳입니다. 오감이 열리고 온몸으로 보게 되는 곳입니다.” 초은당이 도시 한옥이었다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바람은 잠을 자고 물을 얻을 수 있는 곳, 오감을 울리는 자연이 유랑하고 멋스러운 사람과 몸을 치유하는 쉼이 있는 곳, 그래서 천하의 재물을 거절한 ‘은자’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 바로 초은당이다.
주소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439-11
문의 070-4118-0770
- 해동경사연구소 권오춘 이사장의 한옥 어진 이들이 노니는 집, 초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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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문호리 마을 언덕길 끝자락에 큼지막한 황토빛 대문이 보인다. 대문 앞에 있는 작은 텃밭엔 여린 잎이 올라오고, 하늘은 청명하다. 짙푸른 숲에는 송홧가루가 비처럼 떨어지고, 눈앞에 펼쳐진 북한강은 고요하게 흐른다. 아, 이곳에 숨어 있는 한옥이라니! 이처럼 한옥과 잘 어울리는 산수가 있을까?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