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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하정우 미로를 지나 나에게로


‘Take a rest’, acrylic, pen on canvas, 50x39cm, 2013

그림, 무의식의 구조
“일이 많을 때 그림을 더 많이 그립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이지요.” 2010년 첫 개인전 이후 해마다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 전시로 관객을 만난 하정우 작가. 그가 영화 속 인물로 분해 카메라 앞에서 혼신의 힘을 쏟은 날이면 지친 그를 구조하러 무의식이 펜과 붓을 들고 출동한다. 서울, 베를린, 하와이, 싱가포르 그 어느 곳에서든 한결같다. 그 구조 과정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연기하느라 온갖 감각을 다 끄집어낸 촬영장에서의 동물적 열정과 달리 섬세하고 안온한 ‘쉼’이며, 비에 젖은 식물처럼 차분하고 미동조차 않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꼭 밤이 아니어도 된다.

촬영장 구석, 낯선 도시의 호텔 방, 다음 기차를 기다리는 플랫폼 벤치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비로소 ‘쉰다’. “내가 살기 위해서 그린다”는 작가의 말처럼 자아와 혼동되는 캐릭터를 벗고 순정의 하정우로 되돌아가려는 이 그림 그리기는 영화배우로, 감독으로 이른바 살인적인 스케줄을 해마다 소화해내는 그를 살리기 위해 그의 무의식이 선택한 가장 안전한 구조 활동인 셈이다. “영화 촬영 중간 쉬는 시간에 무대 세트 합판이나 스케치북에 드로잉을 합니다. 촬영이 끝나고 그림을 그릴 때면 식물이 되는 느낌에 젖을 정도로 몰입해서 작업하지요.

촬영할 때에도 여행할 때에도 휴식을 취할 때에도 그림은 빠져서는 안 되는 나의 에너지이자 원동력입니다.” 별도로 미술 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미술 작품을 컬렉션하는 아버지를 보며 자라서인지 대학 졸업 후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불안의 시절, 오디션 결과를 기다리며 집중할 무언가가 필요해 막연히 그림을 떠올렸다. 그가 에세이에서 “나의 달란트가 쌀이라고 가정한다면, 영화는 쌀로 밥을 짓는 것이고 그림 그리는 것은 남은 것으로 술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설명한 것처럼 그림 그리는 것은 그의 인생 행로를 따라 자연스레 시작되었다.

머무는 그곳에서 그리다
“스물일곱, 미래가 두렵고 불안해 정말 막연하게 그림을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아 마냥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은 나의 뻐근한 감정을 완화하고 편안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정신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작년 한 해 그는 독일의 베를린에 체류하며 영화를 찍었고, 한동안 하와이에 머물렀으며, 싱가포르의 예술상 시상식에도 다녀왔다. “촬영 중의 이미지나 극 중 배우들의 캐릭터에서 영감을 얻을 때도 있습니다. 여행하면서 느낀 감정을 드러낸다든가, 우연히 어떤 잡지에서 만난 사진 이미지, 길 가다 깊은 풍경을 보며 인물을 설정하고 이미지와 형태의 조합을 통해 그림을 만들어냅니다.” 오랜 외유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면 늘 그러하듯 작년 한 해 머문 곳에서 배우로, 사람으로, 화가로 느낀 감정과 경험을 담아 한남동 표갤러리(3월 5일까지)에서 다녀온 지역명을 제목으로 붙인 작품을 전시한다. 또한 패션 브랜드 까르띠에와 함께 메종 까르띠에에서도 개인전(2월 28일까지)을 열었는데, 총 35점의 작품을 선보인 이 전시는 작품 판매 금액을 아동들의 개안 수술에 기부한 뜻깊은 행사이기도 했다.

‘Money Tree’, acrylic, pen on canvas 100 x56cm, 2013

거침없는, 하지만 사려 깊은
색채 바스키아, 피카소, 잭슨 폴록, 뷔페의 작품에 공감하고 동경한다는 하정우 작가는 특히 주도면밀하게 작업을 완성해나갔다는 점을 들어 피카소를 가장 이상적 삶을 산 예술가로 꼽는다. 하정우 작가 역시 그림의 선과 형태를 주도면밀하게 이어나가며 작품을 완성한다. 대신 색은 거침없이, 하지만 사려 깊게 쓴다. ‘베를린’ 시리즈에서는 날카롭고 검은 직선과 코발트블루 컬러로 유럽 도시 특유의 고독감을 표현했고, ‘하와이’ 시리즈에서는 대자연에서 느낀 에너지와 휴식의 기쁨을 눈부신 원색으로 드러냈다.

“저는 파란색을 지향하지만 노란색과 어울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빨간색을 싫어하지만 써야 할 자리를 아는 사람, 검은색의 힘을 아는 사람 그리고 아직은 초록색을 어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색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상과 감정에 끊임없이 영향을 줍니다. 거침없이, 하지만 사려 깊게 색을 쓰고 싶습니다. 제 그림을 보는 누군가가 색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원초적 기쁨을 누리도록 말입니다.” 특히 이번 전시의 많은 작품에는 인물과 사물 속의 선으로 구성한 미로가 눈길을 끈다. 이 미로는 몹시 원초적이다.

“몸이 원하는 대로 선을 이어나가고 한참 집중해서 선을 그리다 보면 나 자신이 투명하게 비워지는 느낌이 든다”라는 설명처럼 이 수많은 선을 따라 배우 하정우에게 뒤섞여 있던 감정과 이야기를 흘려보내고 그곳에 사람 하정우의 속살을 반복해 채우며 그의 삶이 이어진다.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라는 근원적 바람이 그 많은 선을 지나 작가의 무의식에 당도한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스스로 구조된다. 문의 표갤러리(02-790-0595)

3월호 표지 작품은 하정우 작가가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작업한 ‘Man(acrylic, pen on canvas 44 x35cm, 2014)’ 입니다.
문의 표갤러리(02-790-0595) 

글 김민정 수석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