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스팜 Ⓒ Daria Scagliola
새로움은 다름에서 출발한다 자로 잰 듯 정확한 면적에 건물들이 오밀조밀 나란히 붙어 있는 독특한 풍경을 보며, 미국의 디자이너 마이클 록은 마치 ‘레고랜드’ 같다고 말했다. 치밀한 수학적 계산과 통계로 나라를 유지해왔으며, 국토의 5분의 1 이 간척지인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이기 때문이다. 최근 네덜란드는 세계적 디자인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1990년대부터 네덜란드 정부가 국가 차원에서 디자인에 힘을 쏟아부은 결과일 테지만, 간척지라는 지리적 특수성에서도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바다보다 낮아 늘 물과 전쟁을 치러야 했기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일찍이 자연과 상생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써왔다. 즉 그들에게 ‘지속 가능’이란 매우 현실적인 화두이며, 건축과 환경의균형을 잡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10월 30일까지 열린 한국국제교류재단의 기획전 <네덜란드에서 온 새로운 메시지>는 네덜란드의 최신 건축과 디자인을 소개하는 자리다. 늘 머릿속에 ‘Why not’을 품고 사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개성과 라이프스타일이 담긴 디자인 작품 12점과 건축물을 선보였다. 건축 작품은 ‘RE:USE’라는 테마 아래 최근 10년간 만든 것들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실제로 최근 네덜란드의 젊은 건축가들이 세계 최초로 3D 프린터로 인쇄한 주거 공간을 선보여 화제가 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가난한 사람들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라는 것. 이렇게 아이디어와 기술이 첨단화되고, 진화하는 데에도 이들은 ‘지속 가능한’ 건축을 계속 고민한다. 전시한 건축물 모두 새로 짓지 않고 기존 건물을 증축하거나 다른 형태로 개조해 더욱 특별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들이 말하려는 ‘재사용’을 승화해 네덜란드만의 개념 있는 디자인이 주는 메시지를 짚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그 중 눈에 띈 건축물 10점을 소개한다.
계획적으로 탈바꿈한 유리 건물 글래스팜
단언컨대 네덜란드이기에 가능한 건축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심한 손상을 입은 네덜란드의 스헤인덜 지역에 자리한 이 건물은 스헤인덜의 전통 농가 모습을 표현하고자 한 레스토랑이자 가게 겸 건강 센터다. 특정 농가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전통 농가의 길이, 높이, 너비를 모두 분석해 평균 데이터로 건물을 만들었다. 실사 프린트한 이미지를 붙여 마치 벽돌 건물처럼 보이는 외관이 인상적이다. _ 설계 MVRDV
지붕을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 디던 빌리지
‘디던Didden 가족’은 창고 건물을 개조해 1층 창고, 2층 작업실, 3층 주거 공간으로 알뜰히 사용했다. 그러던 중 아이들이 자라며 공간을 확보해야 했고, 이에 재미있고 효과적인 증축 방법을 고안해낸 것. 마치 옥탑방처럼 지붕에 얹은 집 모양의 독립 박스 두 개는 아이 방으로 구성했다. 지붕을 관통하는 회전 계단을 매달아 아이 방과 집 안을 재미있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도시의 고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건물 증축 방법이자, 지붕 공간을 활용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다. _ 설계 MVRDV
건물의 한 허리를 베어내다 크레머 뮤지엄
목화 창고로 쓰던 층고가 2.2m인 건물을 박물관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건축가는 과감하게 건물의 허리를 잘라냈다. 마치 케이크를 자르듯 건물 중간을 가로로 잘라낸 후 1층은 지하로 바닥면을 내리고 3층은 위로 올려 층고를 높인 것. 건물이 잘리며 생긴 수평 공간은 유리로 둘러싸고 이동을 위해 외벽 쪽으로 계단을 설치했다. 목화 창고를 부수고 새로 박물관을 짓는 것이 비용 면에서도 훨씬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단지 비용을 절감하는 것만이 좋은 건축물의 요인인지를 생각하게끔 만드는 작품이다._ 설계 세아르흐&렘 콜하스
T자 형태의 전통 농가에서 아이디어를 얻다 볼작
옛 농가에 새로운 주거 공간과 객실, 작업실을 덧 붙인 작품. T자 형태로 구성한 전통 농가 형태를 차용해 농 가와 별채를 하나의 건물로 이었다. 기존 별채와 연결했기 때문에 건물은 자연스럽게 비스듬한 형태로 증축되었다. 수직 목판재로 마감한 외벽 곳곳에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유리 면을 만들었는데, 그 간격을 잘 조절해 건물 전체가 유기적으로 보인다. _ 설계 세아르흐
레노베이션은 계속된다 빌라 4.0
빌라 4.0을 처음 지은 1967년. 처음 육각형으로 설계한 빌라는 이후 두 번의 레노베이션을 통해 육각형 형태를 고수하며 증축되었다. 하지만 공간이 덧붙여지면서 벽이 많아지고 외부와 단절되는 면이 많아, 잃어버린 외부 경관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세 번째 레노베이션을 감행했다. 증축과 철거, 확장을 반복하며 앞으로도 다음 버전을 기대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레노베이션으로 손꼽힌다. _ 설계 딕 판 하메이런
에너지 소비율 0% 에너지 뉴트럴 헤리티지 빌딩
역사적으로도, 친환경적으로도 ‘지속 가능한’ 흥미로운 작품. 20세기 초에 지은 주택을 열펌프, 지열, 태양광 에너지 등을 사용하는 제로 에너지 주택으로 재건축했 다. 재미있는 것은 단열벽을 보강하기 위해 기존 창에 조금 넓은 창을 한 겹 덧대어 말 그대로 ‘이중창’을 사용했다는 점. 새로운 창을 통해 기존 벽돌 벽까지 보여위트 있다. _ 설계 아 르 히텍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다 암스테르담 시립 근대미술관
형태와 재료의 과감성으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암스테르담 시립 근대미술관. 역사적인 기존 건물에 욕조, 혹은 우주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증축 건물을 덧댄 형태다. 증축 건물이 기존 건물과 ‘대비’되는 것을 넘어서 ‘독립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것은 기존 건물의 외형적 특징보다 건물을 처음 지은 1930년대 당시의 백색 실내 벽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다소 이질적이라는 부정적 의견도 있지만, 역사와 시대의 흐름을 한눈에 포착할 수 있다는 긍정적 의견도 많다. 증축 이후 벌인 논란 덕에 네덜란드 인을 넘어 전 세계인의 관심을 받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_ 설계 벤트험 크라우얼
재활용의 진수를 보여주다 노르더파크바
공원에 지은 파빌리언의 예쁜 외관에서는 전혀 RE:USE의 방식을 예측할 수 없을 테지만 이곳은 모든 건축 자재를 중고 온라인 마켓에서 구매해 만든 리사이클링 파빌리언이다. 적은 예산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인 만큼 건축가는 스스로 디자이너이자 시행사, 시공사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게다가 중고 자재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자재의 쓰임새와 위치에 따라 디자인을 유연하게 변형한 것이 특징이다. _ 설계 SLA 오피스&오버르트
내부와 외부를 ‘전환한‘ 건물 루드허호프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헤이그에 지은 교회 건물을 재사용하면서 기존 벽을 유지한 채 공간 내부와 외부를 바꿨다. 교회의 천장을 제거한 덕분에, 스틸 구조에 목재로 마감한 기존 벽을 기준으로 외부 공간과 건물의 내부 공간을 뒤집은 것. 건축가는 교회의 내부 공간을 채우면 이전 공간의 의미를 해칠 것이라 판단해 이러한 독특한 구조의 레노베이션을 계획했다. 건물의 일부를 보존하면서도 동시에 기존 건물의 성격을 보존하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 주목받은 작품이다. _ 설계 아틀리에PRO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레노베이션 드렌츠 박물관
역사적인 도심의 모습은 최대한 지키면서 늘어나는 관람객을 여유롭게 수용하고자 한 것이 드렌츠 박물관을 증축한 목적. 건물의 스카이라인은 전혀 건드리지 않으면서 지하로 파고들어 순백색의 추가 공간을 만들어냈다. 유서 깊은 건물과 함께 의미 있는 정원을 보존하고자 기존 지상 주차장은 공원으로 바꾸었다. 또한 기존 건물을 1m 정도 위로 띄워, 밤이 되면 빛나는 빛 때문에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_ 설계 에릭 판 에헤라트
Mini Interview 아틀리에PRO의 건축가 한스 판 빅 “1995년에 기존 교회 건물을 지은 건축가와 친분을 쌓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그에게 이 교회에 대해 들었는데, 실제로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교회를 직접 보게 되었죠. 직사각형 나무 박스처럼 보이는 교회 건물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구조가 단순하게 보이면서도 굉장히 독특했어요. 그래서 공간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과거의 흔적을 남기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드느냐,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을 만드느냐 하는 가치관을 스스로 테스트해볼 수 있는 좋은 작업인 셈이었죠. 대체로 건축가들은 새로 짓는 것을 추구합니다. 사실 기존 건물에 작업을 더하는 것이 훨씬 어렵거든요. 저는 평소에도 RE:USE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 새 건물보다 더욱 멋있어지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RE:USE의 목적입니다. RE:USE가 아닌 NEW USE를 창조해내고 싶은 것입니다.” |
젊은 디자인을 통해 가능성을 엿보다
이 전시에서는 건축물의 ‘RE:USE’와 함께 ‘RE:MIND’라는 테마로 선보인 디자인 작품도 만날 수 있었다. 큐레이터 이재준 씨는 이번 전시가 네덜란드 현재의 특별함보다 인문학적이고 사회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문화적 특수성에 초점을 두었다고 이야기 한다.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생활에 호기심과 질문을 던지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아이디어는 가히 눈여겨볼 만하다.
때로는 아날로그 방식이 더 지혜롭다 냉장고 없이 음식을 보관하는 방법
식재료 본연의 특성을 이용해 농부들과 선조의 구전 지식을 모아 지혜로운 보관법을 제시했다. 각 선반마다 채소, 과일, 향신료, 뿌리채소, 달걀 등 서로 다른 식재료를 저장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예를 들어 뿌리 식물은 원래 심은 대로 모래에 세워 보관하고, 감자와 사과를 함께 보관해 서로 뿜어내는 화학 반응을 이용해 보관하는 식. 과연 대량 냉장고만이 이 시대에 식재료를 보관하는 최적의 방법일까 하는 의문점을 던진다. _ 스튜디오 이히윈 지현 다비트
풍차에 주어진 또 다른 임무 풍력 편물기
바람의 나라라는 명성이 무색하지 않은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제품이다. 풍력을 이용한 편물 기계로, 도심의 바람을 이용해 긴 스카프를 짤 수 있다. 풍량이 세면 기계의 속도가 빨라지고, 약하면 느려지기 때문에 스카프마다 만든 시간과 날짜를 알려주는 라벨이 부착된다.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해온 에너지를 유용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유머러스하게 제시했다. _ 메럴 카르호프
무용과 건축이 만날 때 콘크리트 안무
무용과 건축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를 하나로 결합한 흥미로운 작품. 여러 개의 보도블록을 나열해 누구라도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춤을 추고 싶게끔 디자인했다. 볼록한 타일과 물결무늬는 점프, 턴 등의 댄스 스텝을 연상시킨다. 일상의 흔한 공간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관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_ 포머 판 호프
소리에 반응하는 인터렉티브 조소 작품 피트
‘새’라는 뜻의 피트는 소리에 반응하는 살아 있는 조소 작품. 수백 개의 원뿔 아이콘으로 뒤덮인 이 조명등은 주변 소리에 반응해 몸을 뒤틀듯 수축과 이완을 거듭한다. 마치 사람에게 말을 걸면 생각을 한 뒤 대답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내부의 센서가 주변 환경을 모아 반응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 같은 작품이다._ 스튜디오 토투르
음식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파는 곳 식료품 약국
이곳에서 파는 모든 음식에는 패키지마다 라벨이 있어 몸에 왜 좋은지, 왜 먹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준다. 디자이너는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약’이 아닌 ‘건강한 음식’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우리가 매일 당연하게 먹고 마시는 음식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이 아주 신선하다. _ 마이커 스하위테마
옷을 갈아입듯 늘 새로운 호텔 익스체인지 호텔
세계적 도시 암스테르담의 중심지에서도 마약, 매춘, 게이 등으로 문제가 된 거리에 들어선 호텔이다. 디자이너는 마치 패션모델이 옷을 갈아입듯 객실 하나하나의 인테리어를 다르게 디자인했다. 덕분에 호텔은 물론 주변의 어두운 거리까지 모두가 한 번쯤 들러보고 싶은 명소로 변모했다. 디자인의 힘을느낄 수 있는 작품. _ 스튜디오 이나 마트
취재 협조 한국국제교류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