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을 풍부하게 하는 ‘예술’, 영감을 주는 ‘집’을 통해 남다른 가족력을 키운 김리아 관장과 딸 김세정 씨. 김리아 씨 뒤편의 그림은 이두원 작가의 ‘Wind’, 테이블 위 도자는 도예가 권대섭 씨의 작품이다. 김세정 씨 뒤편의 작품은 김강용 작가의 ‘Reality Image’.
1 3층 김세정 씨의 주거 공간. 현관으로 들어서면 왼쪽이 작업실, 오른쪽이 거실이다. 아르네 야콥센의 타원형 빅 테이블을 둔 작업실은 그가 집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 여러 사람이 모여 회의하기 좋다.
2 하얀 침실의 포인트는 조명등. 레일 자체가 드러나 사각형의 등박스를 이루는데 모두 을지로나 청계천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라 저렴하게 완성한 것이다. 토끼 오브제는 독일 조각가 오트마어 호를 작품.
3 꼭 그림이 아니어도 좋다. 하얀 캔버스 천에 자유롭게 낙서(!)했을 뿐인데 멋진 설치 작품이 되었다.
4 부부의 서재로 활용하는 다락방. 옥상 정원과 통한다.
3층 김세정 씨 집의 거실. 주방을 등지고 있는 오렌지 색 소파, 창가에 무심히 둔 듯한 꽃나무 등 남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유전자는 비단 신체적 특징만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 자본(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취향)을 만드는 ‘취향’은 학교에서 얻는 것이 아닌, 가족을 통해 전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아무 조건 없이 그림을 사랑하고 모으다 갤러리 관장이 된 김리아 씨. 미대 졸업 후 30여 년을 전업주부로 살던 그가 그런 용기 있는 선택으로 터닝 포인트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남다른 ‘가족력力’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법조계에 몸담은 그의 남편은 초임 시절부터 스트레스 받는 일이 생기면 무조건 화랑을 찾아 좋아하는 미술품을 한동안 감상하곤 했단다. 30년 전부터 젊은 부부는 그림으로 ‘힐링’했고, 호당 판매가의 개념조차 모를 때부터 그림을 모았다. 그리고 새로운 그림을 식구로 맞을 때마다 가족은 거실에 빙 둘러앉아 토론을 했단다. 화풍이 독특하다, 어디에 걸까, 이런 가구와 잘 어울리겠다는 등 소소한 얘기가 오갔지만 그게 다 가족력의 밑바탕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취미로 수집한 작품이 수백 점에 이르고, 더 이상 벽에 걸 수도 베란다에 쌓아둘 수도 없을 즈음 부부는 수장고를 계획했다. 동시에 ‘작품에도 작가의 혼과 생명이 있을진대 작품이라는 명목으로 가둬두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30년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터득한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노하우 또한 나누고 싶었다. 2008년, 김리아 갤러리의 전신 k.& 갤러리가 탄생한 배경이다.
사실 김리아 씨가 갤러리를 오픈하며 가장 믿은 구석은 딸 김세정 씨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스쿨에서 건축과 파인 아트를 전공한 김세정 씨는 어려서부터 줄곧 미술품을 봐왔고 감각을 공유했기에 그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었다. “한창 집 꾸미는 데 재미를 느끼던 때에는 아이가 하교할 때까지 기다렸다 함께 가구를 옮기곤 했어요. 언젠가 ‘엄마, 아무개네 집은 우리 집과 달라’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림 때문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식탁 때문이었어요. 지금이야 흔한 일이지만 저희 집은 옛날부터 거실 한가운데나 창가의 가장 전망 좋은 자리에 식탁을 배치했거든요. 아이들은 그곳에 앉아 숙제도 하고, 학교 얘기도 하고 그림을 보며 토론도 했죠.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이 식탁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그림을 또박또박 평하던 꼬마, 엄마를 도와 가구를 옮기던 꼬마는 이제 더 큰 테이블에 앉아 전시를 기획하고, 인테리어 공사를 진두지휘한다. 지난해 갤러리를 이전하기 위해 다가구 주택을 레노베이션하며 신고식을 톡톡히 치른 김세정 씨는 이제 ‘리빙 큐레이터’라는 제2의 명함을 마련해도 좋을 듯싶다.
하나의 콘셉트로 정리되는 풍경보다 다소 이질적 풍경에서 개성과 이야기가 피어나는 법. 마치 스케치북처럼 책상 상판 위에 테이핑과 페인팅을 반복한 것만 보아도 김세정 씨가 얼마나 창조적 작업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요제프 보이위스를 형상화한 창가의 신사 오브제는 오트마어 호를 작품.
1 친구가 버린 오래된 장식장을 리폼한 코너장.
2 문에 끼어 있는 영국 병정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위트 넘치는 도어 스토퍼.
3 조명 레일에 매단 마리오 장난감은 아버지가 신혼집 꾸밀 때 손수 젯소칠해주신 것.
4 둥근 계단참에 장식한 책 오브제는 전소영 작가의 조각 ‘Book Series’.
5 10월 1일부터 일본의 건축 그룹 도라후 아키텍처의 에어 베이스 전시를 시작한다. 에어 베이스는 종이를 펴서 다양한 형태로 만들 수 있는 제품으로 10월 중순, 건축가의 워크숍을 가질 예정이다.
6 중절모자 갓이 재밌는 영국 디자이너 제이크 필립스의 조명등.
모든 것은 ‘식탁’에서 시작했다 레노베이션은 “다가구 주택에 어떤 그림을 걸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했다. 도무지 갤러리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골목, 빨간 벽돌 건물에 들어서면 1층과 2층이 갤러리, 3층은 김세정 씨의 신혼집, 4~5층은 김리아 관장의 집이다. 갤러리 1층은 통창을 통해 거리와 이어지는 1전시실과 보이드 구조로 2층까지 트인 2전 시실, 관장실로 구성했고 갤러리 2층은 사무실과 담소를 나누는 응접실, 수장고가 자리한다. 갤러리는 지나는 사람들이 편하게 들러 차 한잔 하고 갈 수 있는 사랑방과 ‘모두를 위한 예술’이라는 공공 미술의 개념을 담고 있다. 1층 1전시실의 길가와 접하는 부분을 통창으로 구성한 것도 이때문. 창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만나는 대중은 간접적이나마 매일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변에서는 새로 짓지 번거롭게 레노베이션을 하느냐며 말리는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저랑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죠. 이 골목에 갑자기 모던한 건물이 들어서면 동네 풍경을 해치는 것은 물론 갤러리의 문턱도 높아지겠죠.” 사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집을 봐왔기에, 있어야 할 것이 예상 가능한 자리에 존재하는 집은 영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이 집은 일단 그 어우러짐이 뻔하지 않아 만족한다. 많은 도시인이 마음 한편에 로망으로 품고 있는 로프트(공장이나 창고를 개조한 아파트) 같은 느낌이랄까. 3층 김세정 씨 집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에 라커룸 형식의 신발&수납장이 자리한다. 이 수납장을 가운데 두고 왼편은 빅 테이블이 있는 작업실, 오른쪽은 거실. 거실을 등진 건너편에 주방과 복도, 침실, 드레스룸이 연결되는 구조로 공간에 들어서도 어떤 공간이 어떻게 연결될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투룸과 원룸, 두 집으로 구성된 한 층을 한 집으로 만들면서 벽체를 털어낸 자리에 재미난 구조물도 생겼다. 4층 김리아 씨 집 역시 방은 딱 두 개, 널찍한 거실 한편에는 커다란 라운지형 소파를, 창가에 큰 테이블을 두었다.
“다이닝룸을 꾸며놓고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잖아요. 테이블을 주방 이나 거실에 귀속시키지 말고 분리해 자율권을 주면 그만큼 활용도가 높아져요.” 김리아 관장의 말에 김세정 씨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김세정 씨 는 얼마 전까지 작업실에서 사용하던 책상을 거실 창가로 옮기고 대신 공간을 가득 채우는 유선형의 빅 테이블을 두어 종종 이곳에서 회의를 한다. 어떻게 보면 소파는 가족만의 프라이빗한 자리다. 누군가와 마주 보며 앉는 곳, 커다란 테이블이 필요한 충분한 이유 아닌가.
무엇보다 사용자 입장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한 건 집 구석구석을 알차게 활용한 수납공간이다. 침실과 작업실 창가 쪽으로 커튼을 열면 50cm 정도의 수납공간이 나오는데, 기존 다가구 주택에 있던 테라스를 활용한 것이란다. “옛날 구조의 집을 고치다 보니 의외로 재미난 구조들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런 공간을 없애야 하나,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나 묻는다면 전 언제나 살린다는 쪽이에요. 애매한 테라스는 수납장으로 활용하고, 2층 갤러리 창가나 계단참의 단은 구조를 그대로 살려 쇼케이스처럼 활용하죠. 죽어 마땅한 공간은 없는 것 같아요.”
작은 공간이 눈에 띌 때마다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어떻게 꾸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김세정 씨. 인테리어, 무대 세트까지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그는 연말에 진행하는 무용 공연의 무대 세트 디렉팅을 맡아 한창 작업 중이다. 그리고 이처럼 콘셉트를 정하고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인테리어 분야에서도 펼치고 싶단다. 비싼 인테리어가 아닌, 있는 가구를 리폼하고 목공소나 시장에서 적당한 재료를 찾아 더 실용적이며 개성 있는 인테리어라면 좋겠다.
2층 갤러리 한쪽 카운터. 팬톤 컬러 머그잔, 영국의 빈티지 잔 등을 선반에 일렬로 놓으니 장식 효과가 있다.
1 집에서 노는 문화가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김리아 관장. 갤러리 2층은 지나는 이 모두 들러 차 한잔 하고 가는 사랑방 같은 공간이다. 테이블과 의자는 아르네 야콥센 제품, 사진을 다시 페인팅한 작품은 러시아의 미디어아트그룹 AES+F 작품.
2 집 자체가 갤러리요, 갤러리 역시 집의 연장선이 되는 청담동 김리아 갤러리(02-517-7713).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움직여 예술을 일상에 적용하도록 이끄는 골목 갤러리를 꿈꾼다.
지하에서는 김리아 갤러리 컬렉션 전시가 진행 중이다. 민병헌 작가의 사진과 권대섭 작가의 달항아리도 평소 아끼는 컬렉션 중 하나다.
대문 열고 예술을 나누는 집 3층부터 5층까지의 주거 공간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집과 갤러리 사이쯤 될 것이다. 이 집의 백미는 집 안 곳곳에 살아 숨 쉬는 예술 작품. 작품이 많으면 자칫 갤러리처럼 보일 우려가 있는데, 이 집은 차가운 느낌이 전혀 없다. 가구나 예술품이 일상에 스며 있는 듯 공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감각의 비결은 바로 30년간 예술품을 가까이 둔 김리아 씨의 관록 덕분일 터.
“집 자체가 갤러리요, 갤러리 역시 집의 연장선인 이곳에서의 일상이 참 행복해요. 전시가 끝나면 집에도 한 번 걸어보고, 작품 위치도 이리저리 바꿔보죠. 대부분의 사람이 못 박는 걸 겁내는데, 벽을 캔버스 삼아 뭐든 과 감하게 시도해보는 것이 중요해요. 우연찮게 발견되는 아름다움에 재미를 느끼고 그것이 쌓여 안목이 되니까요.”
김세정 씨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습득한 자신만의 심미안을 발휘해 직접 창조적 작업에 뛰어들기도 한다. 책상 상판이나 빈 캔버스 천을 벽에 붙이고 컬러를 입히거나 메모를 한다. 요즘은 종이 테이프를 붙인 뒤 채색하며 하나씩 떼어내는 방식으로 역동적인 직선 패턴을 만들고 있는데, 그 자체로 거대한 페인팅 작품이 되어 공간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그림 솜씨가 없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이요. 비전문가의 터치가 더욱 가슴 설레게 하거든요.” 옆에서 한마디 거드는 김리아 씨는 이러한 시도들이 생활화되고, 습관화되는 것이 진짜 문화생활이라고 강조한다. “얼마전 사위가 브라질에 출장을 다녀왔는데, 괜찮은 작가가 있다며 도록을 몇 권 권하더라고요. 평범한 회사원이 출장길에 갤러리를 둘러보며, 자신만의 셀렉션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죠. 중국에 사는 아들과 며느리도 얼마 전 집 디스플레이를 바꿨다며 메시지를 보내왔어요. 문화 선진국에서는 개인이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미술품의 감상과 구매를 뛰어넘어 누구나 창작할 수 있는 일, 집에서 비롯되고 집에서 시작됩니다.”
청담동 뒷골목에 느닷없이 등장한 김리아 갤러리. 1년이 지난 지금, ‘갤러리’라는 이 세 글자만으로도 주민들의 일상은 분명 풍족해졌으리라. “갤러리는 친한 친구가 별장을 갖고 있는 것과 같아요. 소유하진 않지만 어쩌다 한번 가면 좋고 힐링이 되죠. 지나다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사랑방, 친구 별장 같은 사명감으로 오래도록 이 자리를 지킬 겁니다. 한 가지 더, 그림은 인격이자 인테리어의 마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 김리아·김세정 씨 모녀 예술과 삶의 접점은 그리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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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 김리아 갤러리 김리아 관장과 큐레이터 김세정 씨의 집은 쓱 하고 쉽게 훑어보고 마는 패스트 홈과는 거리가 멀다. 작품이 생활의 일부가 되고, 일상 속 도구들이 다시 작품으로 탄생하니 집 안 곳곳에 볼 것투성이다. 시간을 들여 자꾸만 되새기고픈 집. 다가구 주택을 거대한 캔버스 삼아 1년 동안 하나 둘씩 천천히 채워 완성한 이 ‘리빙 프로젝트’는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