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모양 그대로도 현대에 통하는 미학을 지닌 권대섭 작가의 백자 달항아리.
취향趣向이란 무엇인가? 사전에서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으로 정의한다. 한 사람의 미적 성향을 나타내주는 지표로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이요, 욕망의 다른 말이니 이 기묘한 것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애초에 어불성설일 터. 거창하게는 길을 찾게 하는 덕목이지만, 취향은 오히려 일상적 삶의 아주 가까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자신만의 방, 살림살이, 즐겨 입는 옷, 즐겨 읽는 책…. 결국 집으로 귀결되어 집은 그 주인을 상상하게 한다.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사람에 관한 다양한 단서로 바라보면 집만큼 흥미로운 공간도 없는 것.
그것이 창조적 일을 하는 이의 것이라면 그 흥미는 배가된다. 권대섭 씨 가족의 집이 그렇다. 자신을 꼭 닮은 백자 항아리를 빚는 그와 깨인 미감으로 곱게 살림하는 아내 김지영 씨, 앤티크 딜러로 옛것에서 의미를 찾아 전달하는 딸 권연아 씨의 취향이 제각각이면서 하나로 귀결된다. 공간도 부부의 공간과 딸의 공간이 좌우로 나뉘어 있어 구조적으로는 독립적이지만, 이들의 취향에는 연결성이 있어 서로 통한다. 그 핵심은 앤티크, 바로 골동이다. 옛 모양 그대로도 현대에 통하는 아름다움으로 죄다 미니멀하고 모던하되, 예스러움으로 격조 있는 것 일색이다. 마치 권대섭 씨의 백자 달항아리처럼 깊고 소박한 멋이 은은하게 밴 것들이다.
1 권대섭 작가의 공간인 다실은 옛 안방으로 앤티크 가구와 함께 빈티지 오디오도 있다. ‘뽕짝’부터 클래식까지 음악 취향도 다채롭다.
2 이 집에는 번듯한 대문이 없다. 대신 꽃과 나무가 푸른데, 5월 중순에는 2~3일간 붉은 목단(모란꽃)이 곱고 우아한 자태를 뽑냈다.
골동과 생활하는 소박한 집
검단산 자락 자그마한 마을 이석리에 내려앉은 집. 외양으로 보면 그저 평범한 시골집에 불과하지만, 이 집은 30년 가까이 달항아리를 빚어온 도예가의 삶터이자 전국에서 그의 달항아리에 반한 이들과 이 일대 지인들이 모여드는 살롱이다. 조선 백자 달항아리를 현대식으로 계승한 그의 작품은 오늘날 하나의 사조로 부상한 미니멀리즘 예술과 얼맞아 인기인데, 지난 5월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 가구 박람회와 디자인 위크가 열리는 밀라노에서 처음으로 진행한 한국공예전에서도 달항아리 세 점이 모두 판매되었을 정도다. 한데 정작 그의 집에는 다실에 들어앉은 단 한 점만 있을 뿐이다. 여느 도예가들처럼 작품을 전시한 공간도 없다. 외려 함, 궤, 상 등 조선시대 가구가 많아 마치 골동품점 같다.
“왜 달항아리가 하나뿐이냐고요? 원래 최고의 작품은 도공이 소유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럼 하수下手지요.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몇 점만 가지고 있습니다.” 욕심 없고 마음이 깨끗한 그릇, 무심無心에 가까운 차가운 백자를 빚는 걸출한 도예가다운 답변이다. 한데 골동품은? 살다 보면 필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이 있다. 그의 경우엔 20대 후반에 인사동에서 조선백자 한 점을 만난 순간이다. 홍익대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한 그를 도예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계기가 되었으니. “아무래도 미술과 연관되어 있으니까 젊을 때부터 골동품 보러 다니는 게 취미였습니다. 앤티크에는 나무는 나무의 맛이, 돌은 돌의 맛이 그대로 있거든요. 자연이 그대로 담겨 있잖습니까. 특히 고고한 기품과 풍류를 담은 조선시대 사랑방 가구를 좋아합니다. 장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절제한 아름다움이 있으니까요.”
1 하늘 창이 난 연아 씨의 옛 서재로 지금은 권대섭 작가가 사용한다. 책상 위의 그림 두 점은 그가 딸의 영국 유학 시절 런던 숙소를 방문했을 때 수채화로 그린 것.
2 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부부와 딸의 공간. 집을 다 짓고 회벽으로 남은 부분을 흰 페인트로 대충 칠했건만 이마저도 멋스럽다.
3 권대섭 작가는 달항아리와 볼bowl 작업만 한다. 작가는 현대적 개념에서 차 사발을 볼이라고 부른다고.
4 다실에 걸려 있는 연려실燃藜室 목조 현판. 역시 골동품으로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삶의 다짐이 담겨 있다.
사람의 기술과 치장이 아무리 뛰어난들 자연을 따라가지는 못하는 법. 지나친 장식을 배제하고 나무 자체의 자연미를 최대한 살린 조선시대 사랑방 가구는 소박하되 초라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은 품격 있는 삶을 추구한 조선시대 선비 정신이 담겨 있다. 이는 도예가로서뿐만 아니라 그가 추구하는 인생 철학과도 상통한다. 연려실燃藜室, 그가 마음을 쉬는 공간인 다실에 걸려 있는 목조 현판 또한 이러한 정신을 여실히 보여준다. “연려실은 ‘풀을 태우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장작 쌓아둔 부잣집이 아니라 풀을 태워 밥을 먹는 가난하고 검소한 선비의 집이 라는 뜻이지요. 저도 가마에 불을 때고 사는 이니 선비들의 고고한 정신을 받들면서 소박하게 살고자 벽에 걸어두고 보는 겁니다.”
시간과 취향이 동거하는 도예가의 고졸한 공간. 그에게 안목에 대해 물으니, 좋은 안목은 이것도 사보고 저것도 사보고… 돈을 써야 생긴단다. 애정을 갖고 관심을 두면 핵심을 알고, 핵심을 보며 단순해진다는 것이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온갖 시도를 다 해본 다음에야 비로소 단순함으로 되돌아가는 법이다.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도달하는 경지인 것. “복잡하면 피곤하고 단순하면 편안한 법입니다. 좋은 앤티크일수록 심플하고 모던하지요.”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로 사용하는 혼례상으로 다리만 뺐다. 권대섭 작가가 꼭 눕거나 엎드려 책을 가장 많이 보는 곳이기도 하다.
딸 권연아 씨의 공간인 2층은 그의 방이자 유나컬렉션의 작업실. 미니멀한 공간에 앤티크와 빈티지 일색인데 모던하고 세련돼 보인다. 책상과 의자 모두 오랜 시간 모은 것을 편하게 쓴다. 옛것일수록 심플한 가운데 격이 있는 것이 많다며, 클래식을 꼭 배워야 자기 나름대로 해석이 가능하단다.
1 2층 작업실의 벽 한 면을 다 차지하는 빨간색 판화는 구자현 작가가 선물한 것.
2 유나컬렉션으로 뛰어난 안목을 자랑하는 앤티크 딜러 권연아 씨.
3 워낙 심플한 스타일을 좋아해 주된 컬렉션인 티 컵 세트도 블루 톤이거나 화이트가 많다. 편하게 자주 쓰는 잔들로, 앤티크는 퀄리티가 많이 나뉘는데 딜러라면 누구나 무기가 되는 제품은 은밀하게 숨겨놓는다고. 서랍장은 영국에서 가져온 것.
4 소박하고 품격 있는 삶을 추구한 조선시대 선비 정신이 깃든 사랑방 가구와 파란 빈티지 장. 액자 속 그림은 1860년대 작품으로 한 여인을 계절마다 유리에 그린 것. 뛰어난 색감에 반해 서툰 솜씨가 오히려 매력적이라고. 가을에 그린 것은 판매하고 없다.
5 작업실 1층과 2층을 잇는 철제 계단은 조소를 전공한 미술학도인 권연아 씨가 직접 용접한 것.
1 권연아 씨의 티 테이블 세팅으로, 현대 예술품과 동서양의 앤티크 그리고 아버지 권대섭 작가의 백자 등을 믹스 매치했다. 포인트가 되는 까마귀 부조는 독일의 유명 설치 작가 오트말 홀Ottmal Horl 작품으로, 청담동 김리아갤러리에서 선물 받은 것. 조선 시대 놋・백자 제기에 흑설탕에 과일 조린 것을 올려 익살스럽게 세팅했다. 그는 직접 티 파티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브런치를 곁들인다. 손이 많이 가는 만큼 하루 한 팀만 가능하며, 1인 3만 원으로 6인 한정.
2 빈티지한 멋이 나는 외벽.
3 안주인 김지영 씨의 돼지보쌈은 이 집을 찾는 이라면 모두 반하는 별미.
4 권대섭 작가가 직접 만든 나무 식탁이 놓인 다이닝 공간. 파란 꽃 그림은 장덕영 작가 작품이다.
마치 예술을 닮은 공간
가족의 재능과 삶의 기술을 훌륭하게 표현한 이 집은 안주인 김지영 씨가 있기에 가능했을 터. 예술가의 아내답게 살림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멋있는지, 사는 사람은 몰라요. 그냥 내가 좋은 대로 편한 대로 정리한 거니까요. 그런데 2층에 있으면 정말 좋아요. 특히 비올 때는 모처럼 망중한을 즐기죠. 창이 많아서 낙수 소리를 들으면서 자면 정말 꿈결 같아요. 뒷산에 싸리꽃이 한창일 때는 바람 불 때마다 눈꽃이 흩날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요. 무릉도원이 따로 없지요.” 집은 두 채로 나뉘어 있는데 본채는 30여 년 전부터 있던 것이고, 나란히 붙어 하얗게 페인트칠을 한 시멘트 집은 도자기 작업을 하던 곳을 딸 권연아 씨의 공간으로 레노베이션한 것이다. 좌우 공간이 다르면서도 2층의 가운데 문만 열면 곧바로 통한다.
각 공간이 서로 짜임새 있게 연결되어 있어 다르면서도 같다는 인식을 주는 구조다. 디자인은 공간 디자인 전문 업체 나무 한그루에서 했다지만, 시공은 ‘동네 아저씨’를 동원해 가족이 함께 한 것이라니 더욱 놀랍다. 1층은 티 테이블을 선보이는 스튜디오, 2층은 작업실 겸 방으로 꾸몄다. 바로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 유럽 등에서 직접 발품을 팔며 공수해온 앤티크 컬렉션인 ‘유나컬렉션’을 선보이는 공간이다. “앤티크를 모으기 시작한 지는 10년이 넘었어요. 아버지 영향이 절대적이었죠. 어릴 때도 놀이공원 가자고 해 신나서 따라나서면 도자기 가마터였고, 전국으로 골동품을 구경하러 다니곤 했거든요. 민속촌만 가도 옛것들을 보고 ‘현대적이다, 모던하다’ 감탄하셨는데, 고등학생쯤 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제게도 안목이 생긴 거죠.”
샐러드는 마당에서 채취한 민들레 잎, 제비꽃 잎, 돌나물꽃 등으로 만들었다.
취향은 대물림되어 진화하고 있다. 예술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만 아니라 옛것에서 의미를 찾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ㆍ독일ㆍ영국으로 종횡무진 다니며 안목을 키웠으니 그의 컬렉션이 특별할 수밖에. 그의 앤티크 컬렉션은 심플한 가운데 격이 있어 오히려 화려하다. 절제 속에 담긴 화려함을 그는 볼 줄 안다. 조선시대 찻상, 유럽에서 가져온18~19세기 티포트와 찻잔 등이 주된 아이템이다. “주로 차와 관련한 아이템을 모으다 보니 자연스레 티 테이블 세팅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영국에서 공부한 4년 동안 젊은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작품이나 현대 작품으로 티 테이블 세팅에 개성을 더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죠.
앤티크로만 세팅하면 그저 예쁘기만 할 것 같아 제 나름대로 재미를 더해요. 예술 감각을 접목하는 거죠. 젊은 작가의 작품이나 물건은 물론 책이나 엽서 등을 컬렉션한 앤티크와 함께 세팅하는 것을 즐기는데, 조선시대 앤티크를 접목하면 작업 자체가 정말 재미있어요.” 집은 또 다른 그 자신이다. 그래서 집 안에 자신을 기쁘게 만들어주는 작품과 앤티크 가구를 장식해두고 항상 그것을 감상하고 즐기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예술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그 가치를 누리는 것 또한 이 가족의 취향이다. 전통과 현대의 것이 과하지 않고 정갈하게 조화를 이루었으니 풍류와 실용이 가득한 현대판 사랑방이 있다면, 꼭 이 집 같지 않겠는가.
- 도예가 권대섭 씨 가족 취향의 대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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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사는 이의 인생 철학을 담는다. 가구는 집주인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사물은 취향을 말해준다. 가장 전통적이면서 가장 현대적인 백자 달항아리를 빚는 도예가 권대섭 씨의 집은 그를 꼭 닮았다. 취향은 가족에게 전이되고 대물림되어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미감으로 녹아들어 집 안 구석구석 고졸한 멋이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