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화이트를 주조색으로 사용해 짱짱한 수납장이 돋보이는 주방. 양쪽으로 수납장을 배치하니 폭이 좁아져 아일랜드 조리대는 생략하고 주방과 거실이 완벽히 분리되어 테이블을 두었다. 투명 유리 슬라이딩 도어를 닫으면 음식 냄새가 밖으로 퍼지지 않는다.
하이글로시 부엌 가구는 리첸, 다리를 투명 유리로 마감한 테이블은 제작, 식탁 의자는 영동가구에서 구입.
현관 입구에서 왼쪽에 독립적으로 배치한 자녀 방. 각각 블루와 레드로 컬러 포인트를 주었다.
1 침실과 복도 사이에 1백80도로 열리는 회전문을 설치. 문을 열면 침실부터 거실까지 확실한 개방감이 느껴진다.
2 침대가 창을 향하도록 배치해 기분 좋은 햇살에 눈을 뜨고, 저녁이면 멋진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빨간색이 돋보이는 다이닝 체어는 영동가구에서 구입.
도시 주거 공간이 갖춰야 할 편의 시설과 위치 조건은 물론 탁 트인 전망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용산의 주상 복합 아파트. 모던한 마감재와 장식장 가득한 피겨의 대비가 인상적인 이 집은 공교롭게도 지난달 같은 칼럼에 소개한 ‘주방’이 주인공인 집과 아래층 위층 이웃 사이다. 하지만 같은 아파트, 같은 평수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을 찾아보기 힘든 두 집. 이는 주방 공간을 찍은 사진 한 장으로도 단박에 알 수 있다. 흑과 백, 생활의 흔적이 완벽하게 짠 수납장 안으로 자취를 감춘 공간. 가족의 취향이나 구성원, 집 규모조차 쉽게 짐작할 수 없는 미니멀한 공간이다.
집주인 김성희 씨가 레노베이션을 계획하고 디자이너에게 요구한 콘셉트는 바로 ‘호텔 같은 집’. 호텔처럼 필요한 물건만 나와 있으려면 수납공간을 잘 갖춰야 하는 게 전제 조건이지만, 단순히 수납공간을 늘린다고 해서 과연 ‘호텔’ 콘셉트의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을까? 수납이 중요하지만 수납장조차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은 집주인의 다소 억지스러운 요구 사항을 오히려 디자인 모티프로 승화한 디자이너 김석, 나진형 씨는 ‘착시 효과’를 십분 활용했다. 마치 벽과 같은 수납장을 곳곳에 마련, 책과 가전제품은 물론 부엌 살림, 피아노까지 모두 벽 안에 숨겨 극도로 절제된 공간을 완성했다.
앞서 말했듯 이 집은 극도로 절제된 공간이 펼쳐진다. 공간을 구성하는 색감, 소재, 가구, 소품 어느 것 하나 과장되게 치장하거나 욕심을 부린 흔적이 없다. 구조는 직선만 고집했고, 화이트와 블랙 컬러를 주조색으로 한 마감재를 선택했으며, 장식적 요소 또한 기본 콘셉트에 충실하게 미니멀한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침실, 자녀 방, 주방, 복도 등 모든 부실에 수납장을 적용하면 그만큼 절대 면적은 줄어들어요. 수납장 자체가 벽처럼 처리한다면 시각적으로 덜 답답해 보이지 않을까 싶어 수납장이 마치 벽이나 패널인 것처럼 문 디자인을 최소한으로 했지요.”
디자이너는 집의 모든 공간을 둘러싼 블랙&화이트의 수납장 문이 그저 벽의 그리드인 것처럼 손잡이도 없이 심플하게 마감했고, 복도 한쪽으로 이어지는 화장실 문 역시 발크로맷 소재로 만든 슬라이딩 도어를 적용해 이동식 월처럼 연출했다.
보통 주부들은 나무 소재에 대한 로망이 강한데, 이 집은 나무 소재가 거의 없다. 그나마 슬라이딩 도어의 단면이나 현관 입구 등 언뜻 언뜻 보이는 나무 소재는 오히려 디자이너가 우기고 우겨서 시공한 것. “집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큰 기능은 누가 뭐래도 ‘편안함’이라 정의할 수 있지요. 하지만 블랙&화이트에서 편안함을 찾기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조금이나마 곳곳에 나무 소재를 접목하고, 바닥 타일은 무광 베이지 톤을 선택해 차가운 느낌을 상쇄했죠.”
1 거실 TV 아트월과 벽 사이를 띄워 CD를 수납하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2 현관 입구에 있는 다용도실과 방 진입로의 붙박이장 안에 워킹 클로젯을 설치했다. 덕분에 자녀 방에는 침대와 책상만 두어 한결 여유가 느껴진다.
3 주방 수납장 오픈장에 TV를 두었다. 김성희 씨는 평소 긴 식탁에 앉아 TV를 보거나 컴퓨터를 하며 종종 시간을 보낸다. 그는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지만 시선이 가는 물건을 마구잡이로 사들이는 쇼핑광은 아니다.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것 이상으로 신중한 성격이기에 이 집으로 이사했을 때도 다이닝 체어만 몇 개 구입해 식탁에, 창가에 두었다.
4 남자도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한 법! 복도 중간에 있는 남편 최호성 씨의 방에는 책상과 함께 싱글 침대, TV를 설치했다. 축구 경기를 방송하는 날이면 마음껏 응원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단다. 침실과 서재 방은 천장에 스틸 팬을 달아 시크한 느낌을 더했다.
5 빨간색 무지주 수납장과 철제 서랍장, 뱅앤올룹슨 오디오로 확실한 컬러 포인트를 준 큰딸 수연 씨 방.
6 부스 형태의 샤워 트레이와 건식 화장실로 구성한 공용 욕실.
수납장 겸 파티션 역할을 하는 헤드보드 너머로 복도 공간이 펼쳐진다.
침실은 호텔 콘셉트가 가장 명확히 구현된 공간이다. 높은 헤드보드를 경계로 창밖을 바라보게 배치한 침대와 헤드보드에 설치한 부분 조명등이 그것. 침실과 복도 사이에는 1백80도로 열리는 회전문을 설치해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개방감이 느껴진다. 이는 드레스 룸과 욕실의 면적을 조금씩 넓히면서 욕실 문이 메인 침실 문 경계를 넘어 복도에 자리했기 때문. 문으로 가로막히지 않아 침실에서 욕실, 주방으로 동선이 편리한 것은 물론, 문이 열려 있어도 수납장 겸 파티션 역할을 하는 헤드보드가 프라이버시를 지켜준다. 또한 긴 복도를 따라 침실로 들어서면 만나는 야경은 매일 낯선 호텔에 머무는 것 같은 이채로운 즐거움을 안겨준다.
남편도, 아내도 레노베이션한 후 가장 마음에 드는 공간은 욕실이다. 욕실은 건식으로 화장실을 분리하고, 부스형 샤워 트레이와 욕조를 따로 설치해 바닥에 물때가 낄 염려가 없다.
“집주인은 색깔 있는 디자인보다 살림하기 편한, 지극히 생활적인 요소들을 강조했어요. 디자이너 입장에서 먼지 안 쌓이고, 청소하기 간편한 보편적 생활 디자인을 만족시키면서도 개성을 더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했죠. 거실과 주방을 구분해주는 투명 유리 슬라이딩 도어가 멋과 기능을 모두 만족시키는 깨알 같은 아이템이죠. 음식을 하면서 가족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음식 냄새가 밖으로 퍼지지 않아 좋아요.”
블랙&화이트 컬러로 꾸민 주방은 주방 안에 또 다른 박스 공간이 있는 듯한 느낌이다. 거실에서 주방을 바라볼 때 오른쪽 하이글로시 수납장은 내력벽의 기둥을 감싸는 역할을 한다. 주방에서 거실을 바라볼 때 왼쪽의 거울로 감싼 기둥 역시 내력벽으로, 거울로 마감하니 어느 방향에서나 남산이 보여 좋다. 거울을 붙이기 전에는 자리만 차지하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면 유리를 붙인 후에는 자연을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차경 역할을 하는 것. 반사 소재의 매력은 천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조명 박스도 유광 바리솔로 마감해 도회적이면서도 미니멀한 느낌. 단 하이글로시, 유광 바리솔, 거울 등 반사 소재끼리 매치하면 자칫 산만해질 수 있어 TV 아트월과 벽면 도장, 바닥재 타일은 모두 무광으로 선택했다.
“애들 방은 옷과 책, 온갖 잡동사니로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잖아요. 빌트인으로 수납장을 짜 넣으니 공간도 한결 넓어 보이고, 따로 치울 필요 없이 늘 정리 정돈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요.”
아직까지 남의 손에 살림을 맡겨본 적이 없다는 김성희 씨. 청소기 돌리는 날, 먼지 닦는 날, 소독하는 날 등 청소하는 날을 정할 만큼 생활을 정돈하는 데 뚜렷한 기준이 있는 그에게 ‘미니멀리즘 스타일’은 곧 취향보다는 기능이다. 이 집에는 키덜트 감성을 지닌 그가 모은 수천 개의 인형과 피겨가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지정석을 마련해두니 어질러지지 않고 하나하나 채워가는 기쁨이 더 크다.
네 식구가 살고 있는 251㎡(76평) 주상 복합 아파트. 거실 천장을 유광 바리솔로 마감해 날씨와 풍경에 따라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만들어낸다. 다리를 펴면 세워지는 테이블을 소파 테이블로 사용. 손님이 오면 아일랜드 빅 테이블에 붙여 사용한다. 오디오 시스템은 뱅앤올룹슨.
디자인과 시공 튠플래닝(02-412-2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