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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정미경 씨 부부의 퇴촌 한옥 '함양당' 행단일기杏壇日記
은행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어느 날, <생명의 노래> 연작으로 유명한 김병종 화백의 퇴촌 한옥을 찾았다. 보름달이 맺어준 인연으로 햇볕을 담뿍 머금고 가을마다 노란 옷으로 갈아입는, 작지만 의젓한 집 ‘함양당含陽堂’. 전통은 지키되 불편한 점은 개선한 실용 한옥의 모범 답안이다.

한 주 전만 해도 푸른 기운이 남아 있던 나뭇잎들이 어느새 샛노랗게 변하더니 하루가 다르게 잎사귀들이 떨어져 듬성듬성 하늘이 보인다. 거리마다 조금씩 흩날리는 은행잎을 보니 문득 화가 김병종 씨의 퇴촌 한옥이 떠올랐다. 3년 전, 왕십리에서 1백 년 된 한옥을 찾아 퇴촌으로 옮겨 지은 그는 몇 번의 취재 요청에 ‘진면목은 은행잎이 떨어지는 계절에 볼 수 있다’며 시기를 맞춰보자 약속했고 두 해를 넘기고서 만남은 성사되었다. 

김병종 화백의 퇴촌 한옥. 이 한옥은 이름이 세 개다. 양의 기운을 받는다는 함양당(안채), 모든 것이 협력해 선을 이룬다는 뜻의 협선재(별채), 그리고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행단에서 모티프를 얻은 ‘행단시사’(뒷마당). 특히 이 터에는 뒷마당 너머 늠름한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은행나무를 보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진다.

볕 좋은 은행나무 집, 색을 입다 
햇살이 명주 이불처럼 낭창낭창하던 늦가을 오후, 양의 기운을 받는다는 뜻을 지닌 ‘함양당’을 찾았다. 당호처럼 팔당 호수가 내다 보이는 볕 좋은 터에 돌담을 끼고 아담하게 자리 잡은 한옥. 마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함박 웃음을 짓고 있는 듯한 독특한 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니 지붕 너머로 운치 있는 소나무와 단풍, 은행나무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15년 전쯤, 문화진흥원장을 지낸 김정옥 선생의 초대로 이곳에 보름달 구경을 왔어요. 조각보 같은 집 마당에서 바라보는 달이 어찌나 예쁘던지… 제가 이 터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더니 선생이 선뜻 ‘자네라면’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생각지도 않던 시골 주택을 장만하고 10여 년 동안 글 쓰는 아내의 글방으로, 주말 휴식처로 잘 사용했지요. 집이 낡아 보수와 재건축을 고민하던 중, 아예 한옥을 짓자 결심하고 전국의 고택들을 찾으러 다녔어요.” 

12지를 상징하는 목각 인형을 창틀, 선반에 조르르 장식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면 건축을 공부했을 거라는 김병종 씨. 서울대학교 동양학과 학부 시절, 스승이던 서세옥 화백의 한옥을 구경갔다가 큰 감동을 받았다는 그는 평소 전통 건축에도 관심이 많았다. 서울 생활이야 대부분이 현대 건축물 안에서 지내지만 사실 한국인의 DNA는 한옥을 기억하지 않겠냐는 것. 또 대청에서 시회도 열고, 소수 정예의 대학원 제자들과 야외 수업을 하는 상상도 펼쳤단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행단杏壇’과 시를 짓는 터라는 뜻의 ‘시사詩社’ 가 합쳐져 ‘행단시사’로도 부르는 이 집은 마침 뒷마당에 커다란 은행나무도 있으니, 그의 로망을 풀어내기에 제격이었다. 

“한옥 짓기는 인연이 중요해요. 신재로 짓고자 하면 언제든 지을 수 있지만, 옛날 집을 그대로 옮기려면 2년이고, 3년이고 기다려 제 짝을 만나야만 가능하죠. 짓고자 한들 집이 나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며, 집이 나온다 한들 지으려는 사람이 없으면 그저 낡은 집일 뿐이니까요.” 김병종 씨의 한옥 짓기는 왕십리에서 마음에 꼭 드는 구옥을 발견한 뒤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지은 지 1백 년 정도 되는 한옥은 작은 규모에 비하면 공간 배치도 야무진 편이었고, 서까래와 굴도리 모두 실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대로 뜯어서 번호를 매겨 옮긴 뒤 대목, 소목, 문짝, 마루, 담장, 칠, 가구, 조경 등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장인들을 섭외해 진행한 10개월의 집짓기. 목수와 장인 섭외 등 총감독은 이웃에 사는 고미술 전문가 최종진 씨가 맡았고 대전의 양영식 씨가 대목으로 참여했다. 김병종 씨는 한옥 짓기에 참여한 모든 이에게 집 곳곳에 이름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흔적을 남기게 했는데,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구석구석의 흔적을 찾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황토로 마감한 별채의 당호 ‘협선재(협력해서 선을 이루는 집)’는 아마도 모든 장인을 향한 그의 고맙고도 애틋한 마음이 반영된 것이리라. 


1 2층 책장과 경상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고 선반장을 달아 도자, 베개 등 컬렉션을 조르르 장식했다. 2층 장은 오동나무의 결을 살리기 위해 인두로 지져서 까맣게 만드는 낙동법으로 제작한 것. 책을 눕혀 수납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도자는 권대섭 작가 작품이다. 2 책가도를 형상화한 책장과 자투리 공간을 활용한 다락 등 살림집의 실용성을 고려한 면면이 눈에 띈다.

불편한 점을 개선한 실용 한옥
함양당의 장점은 동선이 편리하다는 것이다. 마당에서 마루로 올라오면 마루 양쪽으로 방과 부엌, 안쪽으로 방이 하나 더 이어지는 구조. 마루를 중심으로 부엌 맞은편 방문을 열면 하나의 열린 공간이 된다. 한옥이 스무 평만 되어도 커 보이는 이유는 이처럼 자유자재로 공간을 확장할 수 있기 때문. “집의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문사의 집이 아니었나 추정합니다. 대청을 가운데 두고 양쪽 방문을 열면 족히 수십 명이 모일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죠. 이 대청에 앉아 시회도 하고 판소리도 감상하지 않았을까요.”

대청에는 통나무 고재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우물마루는 짧은 널을 가로로, 긴 널을 세로로 놓아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짠 마루를 말하는데, 아름답기는 하지만 마루 두께가 4~5cm나 되니 난방은 불가능하다. 자고로 집의 어느 한 부분은 난방을 하지 않는 곳이 있어야 하는 법. 한겨울 불기 없는 대청을 지나 안방에서 건넌방으로, 부엌에서 화장실로 깍지 발로 뛰어가는 것 또한 한옥 살이의 낭만 아니겠는가?

함양당의 대청마루는 걸을 때마다 삐거덕 소리가 나는데, 이는 나무 아래 숯을 넣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마루에 앉아 있으면 숯향기가 솔솔 올라오는 것은 물론 습도 조절, 방충 효과도 있다. 집 짓는 모든 재료는 전통 육송을 사용했다. 고택의 구재임에도 색이 밝은 연유를 물었더니 여섯 번 닦아낸 결과란다.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는 서까래, 기둥, 보는 샌딩해 뽀얀 속살을 찾았고, 한옥의 포인트라 할 수 있는 창호 문살은 모두 김병종 씨가 직접 디자인해 달았다. 문 위쪽과 문짝 바깥 창을 모두 페어글라스로 마감해 채광과 단열을 확보한 것 또한 이 한옥의 특징이다.

1 부엌은 우물마루 대신 온돌 마루를 깔고 시스템 주방 가구를 설치해 누구나 사용하기 편리한 공간이다. 2 삼나무 향이 그득한 화장실. 샤워 부스 아래 나뭇 결 사이사이로 물이 배수된다. 3 스무 평 남짓한 규모에 비해 대청마루가 넓다는 것은 주인이 문사이거나 적어도 가객을 즐겨 청할 만큼의 취향이나 재력을 갖추었으리라고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4 <생명의 노래> 스케치를 본떠 금속으로 제작한 대문은 한옥에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디자인이다. 5 황토로 마감한 별채 ‘협선재’에 마련한 기도방. 모든 것이 협력해 선을 이룬다는 것 또한 성경 로마서에 나오는 구절인데, 이처럼 성경 구절로 당호를 지은 경우는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다. 별채 협선재는 황토로 마감해 한겨울에도 뜨끈하게 지낼 수 있다. 6 외부 곳곳에서 김병종 작가의 작품을 형상화된 스케치를 볼 수 있다.
이처럼 요즘 지은 한옥은 현대식 주방과 화장실, 냉난방에 보안 시스템까지 현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함양당 역시 주방은 온돌 마루를 깐 편리한 입식 공간으로, 전통적 아름다움에 충실하면서 한편으로는 누구나 사용하기 적합한 편리함을 갖췄다. 또한 화장실 천장 위쪽 남는 공간을 벽장으로 만들어 수납공간으로 활용하는 재치도 발휘했다.

“벽장 아래 책장은 책가도를 응용해 만든 거예요. 책만 넣는 것이 아니고 도자기, 액자 등 오브제도 함께 장식하는 용도로 제작했지요. 방에 있는 고가구는 전통 기법 그대로 제작한 리프로덕트죠.” 아기자기한 컬렉션이 제법 많아 방과 부엌에 선반장을 설치했는데 주로 도자나 베개 등을 조르르 장식한다. 문짝 위 틀에는 12지를 상징하는 목각 인형을, 틈새 공간에는 福이라고 적힌 금속 장식물을 곳곳에 장식하고 붓, 한복을 걸쳐두던 횟대 또한 벽 장식에 활용한다. 그렇다면 한옥 방에는 어떤 그림을 걸면 좋을까? 작은 벽면에는 편화, 곧 아주 작은 그림을 거는 것이 좋고, 완당 글씨의 인쇄물 같은 것을 액자에 넣어 걸어도 좋다고 조언하는 김병종 씨. 함양당은 집 안은 물론 마당 곳곳에서도 손맛 나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생명의 노래> 연작 스케치를 비뚤빼뚤하게 황토집 벽, 문틀, 바닥에 새긴 것. 또 한옥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색색의 철 대문, 아궁이 덮개까지… <생명의 노래> 연작이 공간 곳곳에 살아 숨쉬는 느낌이다. 

김병종 씨는 이곳에 오면 마음이 그냥 편하다. 커다란 나무가 태풍 때문에 쓰러져서 속상했는데 곧 더 먼 산이 보이더라는 것.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는 사실을 그는 이 대청에 앉아 다시금 깨달았다. “콘크리트 건물에 앉아 바라보는 은행나무와 한옥 대청마루에 앉아서 바라보는 은행나무는 분명 다르지요. 대청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먼 산까지 그대로 내 집 정원이고, 콘크리트 건물 너머로 바라보는 산맥은 그저 산맥일 뿐입니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면, 꽃피는 봄이 되면 이 집의 대청에 또 앉아보고 싶다. 은행 잎이 우수수 떨어지며 비처럼 흩뿌려질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했지만, 볕이 따사로워지는 봄에 대청에 앉아 먼산을 바라보면 또 다른 심상을 느낄 수 있을테니.


글 이지현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