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전시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구찌 아카이브. 이번 전시를 위해 구찌가 특별 제작한 무궁화 스카프와 뱀부백을 먹감나무 장 안에 연출했다. 오른쪽 성북동에 자리한 한국가구박물관 입구.
아마 10년도 훨씬 전부터였을 거다. 당시 굽이진 성북동 북한산 자락 도로를 지날 때면 이곳을 보는 재미가 남달랐다. 풍취 좋은 너른 터에 한옥을 짓는 광경.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재미는 설렘 아닌 지루함이었고, 기대 아닌 포기였다. 한 달, 아니 계절이 바뀔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담장 너머 기와 능선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듯했고, 해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현실의 시계를 무시한 채 정성 들여 짓는 한옥이겠거니, 그렇게 여러 해가 흐르는 동안 여유롭던 마음도 한계에 이르러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반사적이던 촉각이 무뎌졌다. 하지만 2년 전, 이곳에 다시 눈길이 머물렀다. ‘한국가구박물관’이라는 현판이 걸린 담대한 풍채의 한옥.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니!
다양한 삶을 담은 다채로운 한옥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에 터를 잡은 지 17년 만인 지난 4월, 한국가구박물관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탈리아 명품 패션 브랜드 구찌Gucci의 91주년 특별 전시가 열리는 박물관이자, 이를 큐레이팅한 갤러리로서 공식적으로 처음 대중에 오픈한 한국가구박물관. 사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구찌의 역사를 한국 전통 공간에 서술한다는 콘셉트도 획기적이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박물관 자체가 한국 주거문화를 제대로 보여주는 특별 전시에 다름 아니었으니 말이다.
여백의 미가 살아 있는 한 폭의 산수화 속에 열 채의 한옥이 들어선 형국이라면 맞을까? 2천5백여 평 광활한 대지 위에서 무려 15년간 우리 옛 주거 문화가 되살아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와 한 장, 작은 꽃나무 하나에도 모든 지식과 정성을 담아 완성했다는 한국가구박물관. 일찍이 우리 전통문화, 그중에서도 생활 미학에 높
은 관심과 안목을 쌓아온 정미숙 관장이 궁극적 삶의 지표로 삼은 이곳은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겠다. 단순히 조선 시대 전통 목가구를 모아놓은 게 아니라, 지방마다 다른 자연환경과 생활 양식에 따라 탄생한 가구를 선별하고, 그 쓰임새를 완벽하게 파악해 이를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한옥을 만들었다니 이 어찌 살아 있는 곳이 아니랴. 게다가 이 한옥 중 일부는 ‘오리지널’을 복원한 것이다. 보존 가치가 높은 한옥이 헐릴 때마다 정미숙 관장이 열 길을 마다 않고 달려가 고이 ‘모셔 온’ 기둥과 기와를 재조합해 ‘흉내’ 아닌 ‘복원’한 것.
크게 궁채, 곳간과 부엌채, 사대부 집 등 다양한 양식의 한옥으로 구성한 박물관은 어느 하나 근본 없는 것이 없다. 메인 전시관인 궁채는 실제 궁의 일부를 재현한 곳.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바뀌면서 일부 궁을 해체할 때 나온 기와를 사용했는데, 눈여겨보니 실제 그 문양과 섬세함이 남다르다. 보통 한옥의 지붕 끝 부분을 둥근 장식으로 막는 ‘막새기와’를 볼 수 있는데, 궁궐에서 사용한 막새기와에는 용 문양이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다는 사실. 이런 차이를 모르고 기와를 보면 그 의미를 눈치채기 어렵겠지만, 대문채에 들어서자마자 펼쳐지는 궁궐채에서 남다른 위엄을 느꼈던 건 바로 이런 섬세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 일 터. 한편 남산과 서울 성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기막힌 전망을 갖고 있는 사대부 집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비妃 순종효황후가 궁을 나와서 살던 사가를 복원한 것이다. 조금은 슬픈 역사를 간직한 집이지만 이곳처럼 아름다운 한옥은 또 없다는게 관계자의 설명.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던 옛 사대부가에서는 정경부인의 방을 가장 좋은 자리에 배치했는데, 실제 이곳 사대부 집방 안에서 바라다본 전망은 그림을 그린 듯, 서울 성곽과 남산의 능선이 리드미컬하게 교차한다.
1 궁궐에서 볼 수 있는 긴 복도인 회랑채가 있는 메인 전시관. 중정에 푸른 이끼는 3대째 내려오는 것으로, 매일 물을 주고 관리한다.
2 사대부가의 대청 마루에는 책가도를 펼쳐놓고 탁자 위에 병풍과 어울리는 색감의 구찌 아카이브 두 점을 전시했다.
3 부엌채 한옥. 전라도 송관사 요사채를 재해석한 것으로 반원형 광창이 특징. 그래픽 패턴같은 모던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가운데 그와 어울리는 둥근 절구를 매치했다.
4 창덕궁에 있는 ‘불로문’을 요즘 사람 체형에 맞춰 조금 더 크게 만들었다. 이 문을 지나면 늙지 않는다는 이야기 때문에 그야말로 인기 만점.
한국 목가구가 한옥에 놓여야 하는 이유 “이건 강원도 목기 등잔대인데 어머니께서 현관에 두고 사용하셨죠.” 정미숙 관장이 평생을 두고 모은 전통 목가구는 무려 2천 여 점. 일찍이 우리 전통 주거 문화의 가치를 생활 속에서 이어가던 어머니에게서(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던 고 이태영 박사) 영향을 받았다는 그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탄탄히 다진 미감을 바탕으로 한국 전통 가구와 건축을 공부했다. 전통 목가구와 살림살이를 비롯, 한옥과 정원 등 주거 문화 전반을 섭렵한 것은 물론, 이런 한국 주거문화의 세계적 가치를 가늠하기 위해 일본과 프랑스 등에 있는 전통 주거 문화 ‘박물관’을 찾아다녔다. 그리하여 우리 전통 가구, 한국의 주거 문화처럼 실용적이고 세련된 미감을 지닌 것이 없다는 걸 확신하고 지금의 박물관 건립을 결심했다고.
1 구찌에서 그레이스 켈리를 위해 1973년 특별 제작한 플라워 패턴의 스카프와 1959년 대 뱀부 백. 주칠이 된 먹감나무 장 안에 놓아 한층 화사한 느낌을 강조했다.
2 한국의 대나무와 이탈리아의 대나무 쓰임새 차이를 보여주는 디스플레이. 잘게 쪼갠 대나무를 엮어 만든 사자리 농은 쉽게 볼 수 없는 전통 가구로 구찌의 뱀부 백과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3 구찌에서는 이 전시에 사용된 먹감나무 가구를 구찌 아카이브로 착각할 만큼 완벽한 매치를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승마를 하고 난 후 오락을 하며 휴식을 즐기는 방을 연출했다.
4 지장 안에 넣어 잔잔한 로고 패턴이 도드라질 수 있도록 배려한 디스플레이가 인상적이다.
정미숙 관장이 박물관 건립을 앞두고 치열하게 고민한 내용은 두 가지로 좁혀진다. 하나는 이런 가구와 이러한 집이 생성된 필연성을 오롯이 보여주는 것, 다른 하나는 전통 미학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세계인이 동시에 공감할 수 있도록 과거와 현대의 접점을 찾는 것, 그리고 찾은 해답은 정도正道를 걷는 정면 돌파였다. 요령을 부리고 재치를 더하기보다는 정석과 진리를 간결하게 제대로 보여주는 기지를 발휘하면 ‘절대 미감’에 동화될 수 없는 법이다. “한옥은 알고 보면 과학적 ‘모듈’ 건축이에요. 흔히 한옥의 ‘한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일컫는데, 조선시대에 이 한 칸의 사이즈는 궁이 3m, 사대부가가 2.4m, 민가는 1.8m 규격이었죠. 그리고
이에 비례해서 창문 크기도 나름의 규격이 있었는데 사대부가 창한 쪽의 폭은 55cm 정도로,창 앞에 놓는 사방탁자 크기 역시 이와 같지요.” 설명을 듣고 보니 곳곳에 놓인 고가구, 어느 하나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게 없다.
그리고 이내 발길을 돌려 지하에 마련된 별도 전시실에 이르니, 이곳에서 만나는 가구 역시 마찬가지. 2천여 점의 소장품 중 5백여 점을 전시한 이곳은 조선 시대 당시에도 집대성할 수 없었을 분류법으로, 한국 전통 가구가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전통 가구의 기본형은 사각 함이에요. 이 함의 문이 반만 열리면 ‘반닫이’가 되고, 함을 위로 쌓으면 ‘농’이 됩니다.” 한옥 전시실과 달리 가구만 모아놓은 전시관은 이 같은 가구의 생성 원리를 따라 컬렉션이 디스플레이된다. 그리고 또 이 ‘기본기’를 이해할 무렵에는 휘가시나무, 먹감나무, 느티나무 등 전통 목가구에서 중요하게 쓰인 목재에 따라 분류한 가구를 소개한다. 다음 코너에서 또 한 번 등장하는 반닫이는 각 지방마다 달라지는 특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놓여 있고, 마침내 우리가 잘 모르던 가구, 즉 제례・의례용 가구, 남자와 여자 성별에 따라 특화된 가구까지 만날 수 있다.
정경부인의 방을 테마로 한 전시. 구찌의 둥근 모자 트렁크와 우리 전통 갓 보관함을 비교한 가운데 팔각 문양의 창호를 더해 그 형태미를 강조했다. 한국 전통 문양에서 팔각은 우주를 뜻하는 것으로, 구찌의 원형 트렁크와 교묘히 맞아 떨어진다. 우리 전통 문화가 구찌를 품겠다는 콘셉트가 잘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가구, 서양의 패션을 품다 한옥의 창호는 사람의 어깨너비를 기준으로 이상적인 비례와 크기를 찾았고, 그 안에 놓는 가구는 사람과 공간을 동시에 고려해 제작했다. 팔을 올려놓는 위치, 눈높이, 그리고 바깥 풍경이 보이는 창문 높이 등 사람과 공간을 기준점으로 탄생한 조선 목가구는 그래서 한옥 안에 놓고 또 한옥 안에 앉아서 볼 때 그 참의미와 매력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전통 목가구를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감으로 충분히 감흥할 수 있도록 박물관 자체가 살아 있는 생활 공간이 되고자 한 한국가구박물관. 그 진가는 지난해부터 확실히 인정받기 시작했다. G20 정상회의 때 영부인 오찬을 이곳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한 이후 한국 전통 문화를 알리기 위한 국내외 주요 행사 섭외 대상 1순위로 떠올랐고, 미국 CNN 방송에서는 한국가구박물관을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이라 소개하기도했다. ‘박물관으로서 완벽하기 전에 절대 문을 열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던 정미숙 관장이 이런 국제 행사를 위해 대문을 활짝 연 이유는 단 하나. 한국 전통 주거 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함이다.
1 궁궐의 담을 재현한 것으로 훗날 역사적 사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제대로 만들었다.
2 굴뚝을 아름답게 장식해 집의 일부로 끌어들인 점은 우리 주거 문화의 독보적 미덕 중 하나.
3 여럿이 차를 즐길 수 있는 다실에 연출된 소반.
4 민화의 은은한 화려함 덕분에 가장 좋은 전망을 갖고 있는 정경부인의 방이 한층 더 밝아졌다.
* 구찌 91주년특별 아카이브는 6월 16일까지 열린다. 화/수/토요일은 오전 11시~오후6시까지, 목/금요일은 오후2시~오후9시까지. 일요일과 월요일은 휴관. 입장료는 2만 원이다. 문의 한국가구박물관(02-745-0181)
그리고 이를 성공적으로 치렀음에도 ‘여전히’ 정식 개관을 선포하지 않은 상태, 올해 초 한국가구박물관은 또 한 번 전기를 맞이했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가 탄생 91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아카이브 전시를 한국가구박물관에 의뢰한 것. “구찌는 당신 손에 있습니다(Gucci is in your hands)!” 한국가구박물관을 둘러 본 구찌 아카이브 담당자는 정미숙 관장에게 전시 콘셉트부터 아카이브 선정까지 거의 모든 것을 위임하며 ‘삼고초려’했고, 이에 대한 그의 답은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전통문화가 구찌를 아름답게 품는 것으로, 세계가 한국의 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변하지 않는 장인의 손길(Timeless Touch of Craftsmanship)>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구찌 91주년 특별 아카이브 전시는 정미숙 관장의 다짐대로 한국의 가구가, 한국의 전통미가 구찌를 완벽히 보듬었다. ‘조선 시대, 구찌를 좋아한 한 여인의 주거 공간 속’으로 들어간 구찌 아카이브. 대나무로 만든 사자리농 위에 대나무 손잡이 구찌 백이 놓여 있고, 둥근 장석의 이층장 위에 동그란 구찌 로고 잠금장치가 도드라진 클러치백이 자리한다. 구찌가 대나무를 통으로 휘어 사용했다면 한국에서는 대나무를 잘게 쪼개고 엮어서 장을 만들었고, 구찌가 원형 잠금장치에 고유의 로고를 표현했다면 이층장의 원형 장석은 ‘하늘’을 뜻하며 우주를 담았다. 구찌가 한국 브랜드인지, 한국 전통 가구를 구찌에서 제작한 것인지! 90여 점의 구찌 아카이브는 이렇게 한국가구박물관에서 우리 문화와 혼연일체를 이뤘고, 닮은 듯 다른 미묘한 ‘착시 현상’은 전시를 보는 사람들에게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색다른 감흥을 선사했다. 이 전시는 구찌 이탈리아 본사뿐만 아니라 국내 관람객의 적극적인 호응에 힘입어 6월 16일까지 연장 전시하는 것으로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다.
5 눈높이와 풍경 그리고 창의 폭을 고려해 만든 조선 목가구의 과학적인 비례미를 엿볼 수 있는 공간.
한국가구박물관의 존재를 몰랐거나, 생각만 하고 아직 가보지 못했다면 이번 전시 기간을 놓치지 말 것. 여전히 박물관으로서 ‘완성도를 높이고 있는 중’이라 생각하는 정미숙 관장은 이 전시가 끝나면 박물관을 잠시 휴관할지 모른다. 한옥과 그 안에서 꽃피운 우리의 생활 문화가 아름다웠던 것은 대문을 열고 행랑채를 지나 정
원을 거닐고 돌담 사이 문을 넘어 마당을 가로질러 대청마루가 있는 본채에 다다르기까지, 한 곳 한 곳 문을 열고 닫으며 곳곳을 둘러 보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 이제 세계를 향해 살아 있는 한국 미학을 알리기 시작한 한국가구박물관은 앞으로 이와같은 리듬을 통해 보다 가치 있는 문화를 제안한다고 하니, 우리도 그 박자에
장단을 맞춰보는 것은 어떨까. 이것부터가 어쩌면 진짜 우리네 생활 문화가 지닌 멋이었을지 모르니 말이다.
촬영 협조 한국가구박물관(02-745-0181, www.kofu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