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한라산을 품은 세컨드 하우스
쭉쭉 뻗은 방품림 사이로 희끗희끗 보이는 집의 한 자락.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하얀 상자가 귤밭에 떠 있는 모양새다. 건축가 조재원 씨가 설계한 제주 돌집. 그는 집을 지은 지 2년이 지난 지금 할 얘기가 더욱 무궁무진해졌다고 한다.
이 집의 스토리를 풀어놓으려면 먼저 건축주와 건축가의 특별한 관계를 언급해야 한다. 건축가 조재원 씨는 건축주 조 영Jo Young 씨의 조카다. 젊은 건축가의 첫 번째 작업으로 부모나 친형제, 친척의 집을 설계하는 경우가 많은데, 조재원 씨 역시 독립 후 첫 프로젝트로 고모 집 설계를 맡은 것. 미국에 거주하는 고모 부부는 은퇴한 후 한국에 살기를 원했고, 신혼여행의 추억이 있는 제주에 집을 짓기로 결정했다. 보통 건축가는 땅을 보고 설계를 시작하지만 조재원 씨는 고모를 대신해 땅을 고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는 6개월의 수소문 끝에 건축가 문신규 씨 소개로 앞으로는 귤밭이, 양옆으로는 한라산과 중문 바다가 펼쳐지는 멋진 땅을 찾았다.
1, 2 한라산과 바다, 귤밭과 삼나무 숲 너머 사뿐히 자리한 제주 돌집. 집은 지난 2년간 주변 경관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3 은퇴한 노부부의 심플한 삶을 반영해 단순한 ㄴ 자 구조로 설계했다. 왼쪽 돌담처럼 현무암을 엉성하게 쌓아 완성한 제주 돌집의 파사드.
1 거실과 야외 덱에서 내려다보이는 귤밭은 늦가을부터 겨울 내내 노란 열매로 가득하고, 봄에는 작고 하얀 꽃을 피우며 상큼한 오렌지 향기로 집 안팎을 채운다. 매일매일이 다른 변화무쌍한 한라산은 지루할 틈 없고 햇살 좋은 날에는 먼 바다까지 볼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하게 배치한 창문을 통해 풍경이 서로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그림도 이 집의 볼거리다.
2 시원한 통창 너머 푸른 귤밭이 발아래로 펼쳐지고 야외 덱 끝자락에 서면 마치 천공의 성 라퓨타처럼 공중 부양한 듯 신비로운 기분이 든다.
세컨드 하우스의 원칙, 풍광을 디자인으로
현재는 가족의 세컨드 하우스지만 미래는 은퇴한 노부부가 살 집. 조재원 씨는 설계에 앞서 세 가지 부분을 고민했다. 첫째, 은퇴 후 심플한 삶을 영위하고픈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하는 것. 둘째, 향후 몇 년간은 가끔씩 이용하는 별장이기 때문에 관리하기 쉬워야 한다는 것. 셋째, ‘제주’라는 지역 특수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시공상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 세 가지를 고려해 완성한 집은ㄴ자 구조의 92.5㎡(28평) 단층 주택이다.
제주를 연상케 하는 현무암 파사드를 제외하고는 ‘너무 평범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그도 잠시. 내부로 들어서면 그 생각이 백팔십도 바뀐다. “설계를 맡고 땅을 찾을 때까지 의욕에 앞서 무려 50여 가지 스케치를 준비했어요. 하지만 땅을 보는 순간 모두 지워버렸죠. 형태는 최대한 간결하되, 주변 풍광을 이용해 공간에 드라마틱한 표정을 불어넣고자 했어요.” 그는 언덕 중턱의 경사면을 영리하게 활용했다. 경사가 심한 끝 부분에 집을 지으니 건물 한 모퉁이가 땅에서 살짝 떠 있는 형태. 외관은 평범하지만 집 안에 있을 때는 공간 저마다의 높낮이가 달라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 긴장감이 느껴진다. 또 이 집에는 벽으로만 된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창이 많은데, 백미는 바로 거실 툇마루의 ㄱ자형 통창이다. 왼쪽으로 한라산, 오른쪽으로 중문 앞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지는 창. 단, 공간 안쪽의 꺾인 면에 창을 내어 거실 툇마루에 앉아야만 양쪽으로 확 트인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보통 전망이 좋은 곳에서는 어느 방향에서든 그 풍광이 시원하게 펼쳐지기를 원하지만 사실 가려진 부분이 있어야 트인 부분이 더욱 드라마틱해 보인다는 사실! 어디를 막고 어디를 틔워야 효과적인지에 대한 건축가의 세심한 판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또 내가 움직이는 동선에 따라 그 전망이 다른 느낌을 준다는 ‘인간 중심’적 해석에 치중한 것. “이 집을 설계하며 상상한 삶의 모습을 공간 곳곳에 구체적으로 반영했습니다. 침실에는 침대에 누웠을 때 풍경이 들어오도록 가로로 낮은 창을 냈죠. 침실 창문이 조금 더 컸다면 빛이 강하게 쏟아져 들어와 무척 눈이 부셨을 거예요. 침실은 아침 볕이 들어오는 각도에 맞춰 침대를 배치하고, 거실 툇마루에 앉았을 때 테라스의 난간 높이가 전망을 가리지 않도록 조절했어요. 이처럼 집 내부에서 이뤄지는 사용자의 ‘전망 프로그램’과 외부 풍경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한 번 더 생각하면 더 세심한 디테일이 완성됩니다.”
3 거실과 주방 바닥재는 타일을 사용해 열전도율이 높아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다.
구하기 쉬운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진짜 친환경
기본적인 단열에 힘쓰고 근거리에서 수급 가능한 재료로 완성하는 것이 바로 친환경 주택의 기본 원칙이 아닐까. 특히 제주 같은 섬에 집을 지을 때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는 그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다. 조재원 씨는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무암과 삼나무를 적극 활용했다. 제주는 바람이 많이 불고 공기 중 습도와 염분이 많아 외장재로 주로 콘크리트를 사용하는데, 그는 콘크리트에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무암을 붙여 파사드를 완성했다. 가족이 모여 하나 둘 쌓은 돌담처럼 최대한 엉성하게 쌓아달라고 요청한 돌벽은 삐뚤빼뚤해서 더욱 정감 있다.
또 거실 툇마루와 아일랜드 조리대, 붙박이장을 비롯한 가구는 모두 제주산 삼나무로 현장에서 맞춤 제작한 것. 삼나무는 귤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심은 방풍림으로 편백나무처럼 향이 짙고 물에 강한 게 장점이다. 그는 현지에서 솜씨 좋은 목수를 섭외해 잘 말려 뒤틀어질 염려가 없는 나무 수급은 물론, 마감부터 가구 제작까지 한 번에 해결했다. 제재소에서 삼나무를 재단한 후 서너 달 동안 말려 아일랜드 조리대와 침대 프레임, 의자, 옷장까지 차례로 만들었다. 주택은 조명등이 중요한데,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아 대부분 간접등으로 숨기고 포인트 조명등은 생략했다. 벽등은 천장에 다는 반달등을 벽면에 붙인 것. 이처럼 현지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고, 재료에 맞춰 디자인을 바꿔가며 마감한 덕분에 시공비를 줄일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욕실을 가장 끝쪽에 배치한 것. 제주는 연료비가 비싸기 때문에 늘 따뜻한 온도를 유지해야 하는 욕실 같은 공간은 집의 안쪽, 방과 방 사이에 배치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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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대에 누우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자연을 벗 삼아 잠이 들고, 아침엔 건강한 햇빛을 받으며 눈을 뜬다.
2 주방의 아일랜드 조리대, 한식 창호를 사용한 붙박이장과 침대 프레임, 의자 등은 모두 현지 목수가 제작한 것.
3 거실, 주방뿐 아니라 욕실까지 공간 끝자락에는 어김없이 야외 덱을 마련했다.
4 풍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한 노력은 욕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욕조 위의 꺾인 창은 소나무 가지가 뻗은 형태를 그대로 살리기 위한 것.
5 한라산과 바다, 귤밭과 삼나무 숲 너머 사뿐히 자리한 집.
2년간 살아보니 제맛
조재원 씨는 지난 2년 동안 가끔 제주에 내려와 생활하면서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거나 낡은 부분을 보수하
며 집 또한 사람처럼 나이 들어가는 과정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주거 문화에서는 집을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집을 짓는 순간부터 그곳에서 살기까지, 집을 돌보는 것 자체를 즐긴다면 아파트든 세컨드 하우스든 행복한 집 짓기가 완성될 터. 그는 지난해 여름휴가 때 깜짝 ‘오픈 하우스’를 진행했다. 트위터에 ‘00월 00일 00시~00시 오픈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올렸더니 마침 제주에 놀러 온 여행객들이 집을 구경했다. 제주를 찾는 지인에게는 종종 집을 빌려주기도 한다. 마치 행복의 건축을 주창한 알랭드 보통의 ‘리빙 아키텍처’ 프로그램처럼 삶의 양식을 제안하는 공간을 사진으로만 보거나 슥 훑어보는 것이 아닌 실제로 자고, 밥을 해 먹는 등 체험이 중요하다는 것. 세컨드 하우스의 활용도를 높이는 방법이자, 결국 건축이나 도시 문화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이 돌집 옆 자투리 땅에 부모님이 살 초소형 주택을 설계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15평 큐빅 하우스예요. 화려하거나 클 필요 없이 딱 필요한 요소만 갖춘 집이죠.”
건축가에게 묻다 지방에 집 지을 때 시공업자는 현지에서 찾는 것이 유리한가? 지방, 특히 제주에 집을 지을 때는 재료 수급이 관건. 기후, 지형 조건에 따라 적합한 재료가 따로 있을뿐더러 물류비가 큰 부분을 차지하므로 되도록 현지 재료를 활용하는 게 좋다. 따라서 현지의 재료 사정을 잘 아는 시공업자를 찾는 게 유리하다. 집을 짓고도 1~2년은 하자 보수가 계속되는데, 현지 시공팀에 맡겨야 시공 후 A/S도 원활하기 때문. 이 돌집은 바닥 타일, 벽지, 조명등을 모두 현지에서 구했는데, 이처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을 때는 심플한 것을 고르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또한 집짓기를 총괄하는 루트는 반드시 하나만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조경에 필요한 석조나 덱 자재를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업체를 직접 찾아냈더라도, 시공업자에게 담당자 연락처를 넘겨주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나중에 혼선이 없다. 건축가 조재원 씨는…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뒤 공간에서 실무를 쌓고, 네덜란드 베를라게 건축대학원을 수료했다. 2002년부터 도시 건축 연구소 0_1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으며, 연세대 건축공학과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0년 제주 돌집으로 제주건축문화대상 본상을, 2011년 대구 어울림극장으로 공공디자인대상을 수상했다. |
디자인 김홍숙 기자 작품 이미지 제공 민성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