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시 봉강동 언덕에 자리 잡은 봉소당. 영화 <가문의 영광> 촬영지이기도 했다. 이 집에서는 어디를 봐도 여수 앞바다가 펼쳐진다. 사진은 예부터 마을을 지나는 객들이 머문 행랑채로, 지붕 너머 한창 짓고 있는 여수 제2대교가 바라다보인다.
왜 ‘여수麗水’라고 부를까? 왜 고울 여麗 자에다가 물 수水 자를 썼단 말인가? 철이 들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철이 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리타국을 떠돌아 다녀봐야 철이 든다. 항구의 뒷골목에서 서성거려보고, 이름난 명산에 올라가 안개와 노을을 감상하고, 히말라야의 만년설을 바라보고, 사막의 고요한 정적 속에 빛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기도 하고, 이름난 호텔에서 호사스러운 대접을 받아보기도 하고, 대도시의 박물관에서 종일 얼쩡거려보기도 하고, 중앙아시아의 끝없는 초원 지대에서 지평선 너머를 응시해보기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30대가 지나고, 40대도 지나고 50대가 되었다. ‘해놓은 것도 없이 나이만 먹었다’는 무상함이 한 번씩 올라올 때마다 ‘내가 헛산 것이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여수의 바닷물빛은 이 과정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내 조국의 바닷물빛이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답구나! 이렇게 아름다운 해안과 바다가 있었건만 왜 그동안 몰랐단 말인가? 여수는 일조량이 아주 많은 도시라고 한다. 햇볕이 많이 비추다 보니 바닷물이 더 깔끔하고 빛나는 것이다. 이 여수의 항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바로 영광靈光 김씨金氏 종가인 봉소당이 자리 잡고 있다.
격변기에 발휘되는 명당의 영험함
봉소당鳳巢堂은 ‘봉황의 집’이라는 뜻이다. 동네 이름도 봉강동鳳崗洞이다. 모두 ‘봉鳳’ 자가 들어간다. ‘강崗’은 봉우리라는 뜻으로 봉황같이 생긴 봉우리가 둘러싼 동네가 바로 여수 봉강동이다. 흥미롭게도 여수 봉강동에서 1백 리쯤 떨어진 광양 백운산 자락에도 ‘봉강면鳳岡面’이라는 지명이 있다. 백운산에서 뻗어온 봉황의 지맥이 여수에까지 이어져 내려오다가 바다를 보고 멈춰선 동네가 봉강동이 아닌가 싶다. 봉황이라는 지명이 들어간 지역의 산세는 둥그런 바가지 또는 철모 모양의 산이 주변에 많다. 이 바가지 모양의 산봉우리를 봉황의 머리로 생각한 것이다. 봉소당은 그야말로 봉황의 둥지에 해당하는 집터다. 참새 집터가 아니다. 그만큼 고지대이면서 위풍당당한 격국格局인 것이다. 이런 명당자리에 살면 전쟁과 난리라고 하는 사회적 격변기를 통과할 때도 효험이 있는 것일까? 큰바람이 불 때 뿌리 깊은 나무를 알아볼 수 있듯이, 난리가 나야 명당의 영험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집의 종손인 김재호(70세) 씨에게 물었다. “해방되고 3년 만인 1948년에 좌우익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여순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여수인데, 봉소당 사람들은 피해가 없었는지요?” “저희 집안은 다행히 인명 피해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저의 아버님(김성환, 1915~1975년)은 34세였습니다. 1만 2천 석 이상 되는 저희 집은 여수에서 가장 큰 지주였죠. 폭동을 주도한 14연대 지휘부는 가장 부자인 저희 아버지를 제일 먼저 임시 사령부로 쓰던 당시 여천군청 2층으로 호출하였습니다.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시킬 의도였죠. 당시 “너는 착취 계급이므로 사형이다”라는 한마디면 바로 아래층으로 끌고 내려가 죽창으로 찔러 죽이던 살벌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죽을 각오를 하고 여천군청 2층에 가니 반란군 최고 책임자가 책상을 놓고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제 아버님이 올라갔을 때 그 책임자는 좌우에 있던 호위병 두 명에게 “너희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라”라고 명령한 다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문만 쳐다보며 있었다고 합니다. 10분이 되어도 신문만 보고 있고, 20분이 되어도 계속 신문만 보고 있는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처음에 제 아버님은 ‘불러놓고 왜 아무 말도 없이 신문만 보고 있을까’ 하고 의아해했는데, 30분이 흐를 무렵 그 이유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도망가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던 거지요. 2층 창문을 열고 물 홈통을 타고 밖으로 탈출했습니다. 물론 그 반란군 책임자는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요. 탈출을 방조했죠. 이렇게 해서 여수 최고 지주인 제 아버지는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오른쪽) 여수 봉소당을 지키는 12대 종손 김재호 씨. 여수 한영재단의 이사장으로 지역 개발에 힘쓰는 그는 여수 엑스포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대형 호텔과 콘도 시설을 짓고 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책임자는 우리 집안의 농사를 짓던 소작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소작인은 자식이 많다 보니 먹는 입이 많아 소작료를 제대로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그 사정을 파악한 조부께서 소작료를 감면해주었지요. 그냥 감면해주면 다른 소작인들이 불공평하다고 항의하니까 방법을 썼어요. 여수의 외곽에 고진古鎭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여기에도 수확량이 많았는데, 가을이 되면 수백 가마의 쌀을 봉소당 창고로 옮기는 것이 큰일이었습니다. 당시 제대로 된 도로가 없고 자동차도 없던 시절이므로, 수확한 쌀가마를 고진에서 배에다 선적하여 노를 젓고 여수항으로 들여와 다시 저희 집으로 옮기는 하역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이 선적과 하역 작업을 그 자식 많은 소작인 집에다 시킨 것이죠. 그 운반과 하역 작업 대가로 소작료를 면제해주었습니다. 그 혜택으로 이 집에서는 다소 경제적 여유가 생긴 덕분에 자식을 신식 학교에 보낼 수 있었는데, 그 자식이 성장하여 반란군 책임자가 된 것입니다. 자기 집이 혜택을 받는 것을 보고 자란 그 책임자는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제 아버지를 자기 입으로는 죽이라고 명령을 내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집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안채 봉소당.
(왼쪽) 봉소당에는 현재 김재호 씨의 큰아들이 머문다. 안채 뒤쪽으로 현대식 주방과 화장실 등을 신축했다.
(오른쪽) 안채에서 사랑채로 나가는 문 너머로 지붕을 훌쩍 넘는 보호수가 있다. 여수는 태풍이나 눈 피해가 거의 없어 집 주변에 키 큰 나무가 많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해 여순사건에도 피해 없어
12대 종손인 김재호 씨의 증조부인 김한영金漢永 대에 이르러 봉소당은 큰 부자가 되었다. 순천에서 사천군수를 지낸 ‘김사천’이 8만 석을 하던 큰 부자였다면, 여수에는 1만 2천 석을 하던 ‘김한영’이 있었다. 이재에 밝은 김한영은 구한말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다. 그는 집에 묵으러 오는 과객들을 잘 관찰하여 자립시켜주는 능력이 있었다. 가난한 과객이 봉소당에 머물고 있으면, 그 사람의 특기가 무엇인지를 관찰하였다.“너의 특기는 무엇이냐?” “덕석 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부터 집에서 밥 먹고 나면 덕석을 짜거라” 하고 시킨 다음에, 그 돈을 모아 나중에 목돈으로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집에 찾아오는 과객의 특징을 파악하여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밑바탕을 다져주는 일을 많이 한 것이다.
1948년 여순사건 당시에 현 종손인 김재호 씨는 우리 나이로 7세였다. 여순사건이 뭔지 아무것도 모를 나이다. 봉소당의 머슴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당시 17세였고, 난리가 나자 좌익에 가담하여 팔에 빨간 완장을 차고 봉소당에 나타났다. 난리가 나면 이 연령대가 무서운 법이다. 마당에 들어선 이 완장 찬 머슴 아들을 보고 철부지 일곱 살짜리 김재호는 마침 손에 들고 있던 찐 밤을 부지불식간에 머슴 아들에게 건넸다고 한다. “형, 이 밤 좀 먹어.” 어린 재호로부터 밤 한 주먹을 받아 든 머슴 아들은 한참 동안 주인집 아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한 주먹 밤이 그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봉소당 집안은 왜정 때에도 28평坪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평坪 자 항렬 28명이 모두 대학을 나온 것이다. 일본의 와세다대, 구주제대, 릿쿄대를 비롯해 일본 유학생도 많았고, 경성제대 출신도 많았다. 해방 후에는 이 ‘28평’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한국 사회의 저명인사들이었다. 옛날 이북의 기독교 집안 후손들은 미국 유학을 많이 갔고, 아주 A급 집안들은 영국 유학을 갔고, 지주 집안 후손들은 일본 유학을 많이 갔다. 그중 호남 지주 집안 후손들은 일본 유학을 많이 갔다. 인촌 김성수나 현대 현정은의 조부이자 일제강점기 호남은행 창립자이던 무송茂松 현준호 같은 인물들이 호남의 일본 유학 흐름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이제는 이 28평의 인물들이 사라지고 현 종손인 김재호 씨를 거쳐 그 아들 대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크게 베풀어야 크게 산다
봉소당은 일반 집터로서는 격국이 큰 자리다. 집 크기만 해도 1만5009㎡(5천 평)가량 된다. 김재호 씨가 젊은 시절 사업 자금을 마련하느라, 마을에 큰길을 내주느라 사랑채와 행랑채를 위로 조금씩 올리고 정자를 마당 한쪽을 옮겼지만 대들보, 서까래 등을 들여다보면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봉소당은 가장 위쪽에 있는데, 큰아들이 쓰고 있다. 여수에서 제철 사업을 하는 큰아들은 나흘은 서울에서, 사흘은 여수에서 지낸다. 봉소당 옆 담 너머로 두 개의 봉긋한 산봉우리가 보이는데, 김재호 씨는 엄마 젖가슴 같은 이 봉우리가 이 집의 재물을 12대째 유지해준다고 믿는다. 앞서 말한 ‘격국’이 크면 거기에 사는 사람도 비례해 국량이 커야 한다. 터는 큰데 사람이 작으면 유지하지 못한다. 사람이 크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한 가지만 꼽는다면 베푸는 능력이다. 돈을 쓸 데다가 쓸 줄 아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다. 이게 받쳐주면 큰 터에 살아도 그 터를 누르고 집안을 유지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사람이 오히려 터에 눌린다. 봉소당은 큰 터다. 그릇이 작으면 이 집을 유지하지 못한다.
몇 년 전 봉소당의 초대를 받고 여수에 간 적이 있다. 여수는 여러 가지 생선 요리가 발달한 지역이다. 특히 여수에 가면 서대기 요리를 먹어야 한다. 보통 서대기보다 서너 배 큰 서대를 ‘용서대’라고 부른다. 종손이 여수의 맛을 보여주겠다며 필자를 무작정 데리고 간 집이 여객 터미널 근처의 ‘봉정식당’이다. 식당에 가는 길에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좌판을 깔고 100m쯤 죽 늘어서 있었는데, 봉소당 종손은 그 생선 장수 아주머니들 손을 일일이 잡으면서 안부들을 물어보는 게 아닌가. “큰아들은 취직했느냐, 남편은 수술 잘되었느냐, 셋째 딸 대학에 들어갔느냐” 등등이었다. 100m 좌판 길을 통과하는 데 어림잡아 30분은 걸린 것 같다. 그날 용서대 맛도 잊을 수 없지만,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필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난리를 겪어본 부잣집 후손의 처신은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오래된 부자의 경륜이 저런 거구나!’를 배웠다.
(오른쪽) 여순사건에도 피해 없이 큰살림을 유지했던 봉소당.
한국은 1860년대부터 민란民亂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진주민란’이 대표적이다. 먹고살기 어려운 민초들이 참다 참다 견디지 못하고 이판사판으로 들고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민란의 대미가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이때 부자가 많이 죽었다. 평소 주변으로부터 인심을 얻지 못한 부자들은 이때 패가망신했다. 그다음에는 6.25전쟁이었다. 6.25전쟁도 표면상으로는 남북 전쟁이고 좌우의 충돌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평소에 쌓인 개인감정을 정리하는 부분도 상당히 있었다. 여수ㆍ순천 지역은 6.25전쟁 이전 ‘여순사건’을 겪었다. 서로 간에 엄청난 인명이 살상당했다. 그 살상과 충돌의 한복판에 있던 봉소당이 오늘날까지 집안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존재 그 자체가 카리스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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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용헌 사진 김동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