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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작가 구자현 씨 모든 의미는 과정 속에 깃들어 있다
씨땅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믿는 농부처럼 땀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이 미련한 예술가는 오늘도 농부보다 성실하게 작업하고, 촌부보다 순박한 하루를 보낸다. 과정은 사라지고 근본 없는 기교만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는 무심의 경지에 이르는 지난한 노동의 과정을 거쳐 단순한 화폭 속에 진심을 담아내고 있다.

벽에 걸린 판화는 지난해 서울 국제 판화 사진 미술제에 선보여 큰 호응을 얻은 작품이다. 구자현 씨 뒤로 걸린 세 번째 작품은 에디션 15점을 찍은 것으로 미술제에서 5점이, 이후 서울 케이앤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나머지 10점이 모두 완판되었다.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커다란 독의 주둥이를 감싼 한지를 풀어내고 있었다. 큼지막한 국자를 항아리 속에 집어 넣고 휘휘 젓자 산뜻한 술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솔잎을 더해 만든 현미찹쌀 막걸리다. 담근 지 5일째, 지금이 딱 알맞게 익은 때라며 한 국자 떠서 내민다. 술지게미를 헤치고 퍼 올린 뽀얀 막걸리에 푸른빛 가신 솔잎이 동동 떠 있다. ‘아, 막걸리가 이런 맛이었던가?’ 향기롭게 입안을 감도는 맛에 놀라 “우아” 하고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일요일 오전 11시, 부지런한 농부의 새참이라면 모를까 술을 마시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 작가 구자현 씨와의 만남은 그렇게 한 사발의 막걸리로 시작되었다.
술이 잘 뜬 것을 확인한 그는 못내 흐뭇한 표정이 되어, 이제 차 한잔 나누자며 일행을 거실로 안내한다. 그래픽적인 면 분할을 이뤄내는 채광 창이 인상적인 계단을 오르니 살림집이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공간, 거실에는 덩그러니 식탁 하나 놓여 있을 뿐이다. 온 집 안을 둘러봐야 가구도 몇 점 되지 않는다. 적재적소에서 아우라를 발하는 그의 대형 작품과 창을 통해 전해지는 푸른 산야의 봄기운 때문일까? 비워진 공간이 쓸쓸하거나 궁핍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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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의 서재 공간이다. 의자에 앉으면 창밖 멀리 펼쳐지는 산세를 즐길 수 있다. 1층은 작업실, 2층은 살림 공간으로 설계한 이 집은 건축가 최욱 씨가 설계했다. 구자현 씨는 최욱 씨의 아내가 화가라는 사실을 알고 두말없이 그에게 설계를 맡겼다. 그림 그리는 아내를 둔 건축가라면 화가의 작업실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도 높을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과정이 없으면 결과도 없는 법 미술가 구자현 씨.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80년대 말 한국으로 돌아와 현대 미술 화단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어언 20여 년. 그는 한국 판화 미술계에서 입지전적인 존재다. 그러나 나는 그를 템페라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 그저 하얀 평면,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원형의 흰색 캔버스 가장자리에 붓이 스쳐가듯 얇은 금박을 더한 작품이었다. 그 작품이 템페라인지, 템페라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바라본 새하얀 평면, 그 단순함 속에 깃든 고요가 자꾸만 나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템페라는 6백 년 역사를 지닌 서양의 전통 회화 기법으로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템페라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세 번이나 손빨래한 삼베를 붙여 판을 만들고, 그 위에 아교를 섞어 갠 생석회 덧칠하기를 열두 번. 겹겹이 더해진 생석회 표면을 칼로 다듬고 그라인더로 갈아서 완성한 흰 바탕. 땀방울로 얼룩 지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노동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얻어지는 순백의 평면. 과정은 무시되고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각박한 세상이라지만, 과정이 없으면 결과도 없는 법이다. 그저 새하얀 평면일 뿐인데 내 마음을 움직인 심연의 세계, 그 알 수 없는 힘은 바로 그 지난한 과정 속에 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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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 마련한 응접 공간. 벽에 걸린 작품은 템페라의 일종인 금지화다. 삼베로 만든 캔버스를 아교로 반죽한 생석회로 덧바르기를 열두 번. 칼로 다듬고 그라인더로 곱게 만든 표면 위에 얇디 얇은 백금 종이를 더한 것이다. 3 그는 요즘 대형 목판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4 템페라 작품의 경우 아크릴 박스로 액자를 만드는 데, 그는 작품을 액자에 넣고 마무리하는 작업도 스스로 한다.


그는 판화와 회화 작업을 꾸준히 병행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구자현 하면 판화를 떠올린다. 일본에서 돌아온 1980년대 후반, 한국 미술계에서 판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대학에 판화과가 생기고 많은 작가들이 판화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판화는 그 어떤 작업보다 테크닉이 중요한 장르인지라 판화에 관한 한 독보적인 노하우와 지식을 갖고 있는 그에게 많은 작가들이 판화 제작을 의뢰했다. 1995년 서울 국제 판화 사진 미술제가 생길 때까지 7~8년간 그가 판화를 제작하거나 감수해준 작가만 무려 1백 명이 넘는다. 지난해 15회를 맞은 판화 미술제의 중심에 언제나 그가 있었기에 “구자현 없는 판화 미술제는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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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풍요로운 자연이 그려내는 풍광이 빛을 발하는 2층 거실. 구자현 씨 부부가 함께 책을 보며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다. 2 이 집은 특이하게도 집의 전면에 복도를 내고 유리창으로 벽을 마감했다. 벽에 걸린 작품은 구자현 씨의 금지화. 3 지난 주말 문경에서 사온 이름 없는 도공의 막사발을 꺼내 보이며 그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경기도 양평의 산자락에 자리한 이 집으로 이사온 지 올해로 4년째. 서너 달이면 다 지을 집을 짓는 데 꼬박 2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수중에 있는 6백만 원을 밑천 삼아 겁도 없이 시작한 집 짓기는 그림 한 점 팔려야 먹고살 수 있는 그림쟁이에게 시간을 요구했다. 그 덕에 시멘트 독이 다 빠지고 나서야 이사왔다며 그는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집 짓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설계는 건축가 최욱 씨가 맡았다. 건축가 최욱 씨의 아내가 작가 지니 서 씨라는 것을 알고는 더 물을 것도 없이 그에게 설계를 맡겼다. 미술가의 작업실을 겸하는 집을 디자인하는데 있어 작가 아내와 사는 건축가보다 좋은 경우가 어디 있겠나. 구자현 씨의 아내는 운 좋게 이곳으로 이사와 행복하고 감사한 일뿐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남편이 넓은 작업실을 갖게 돼 대형 작품도 원 없이 할 수 있고, 소음과 먼지를 동반하는 고된 작업에 이웃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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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작업실에서 2층 살림 공간으로 오르는 계단실 벽에 액자처럼 유리창을 달았다. 5 30년 전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구입한 제주 반닫이. 위쪽에 걸린 판화는 이우환 씨 작품이다.


손님은 나의 휴식 작가들이 풍광 좋은 근교로 작업실을 옮기면 한 2년 동안은 손님을 치르느라 작업할 겨를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주변 친지와 지인들이 휴가철과 주말이면 별장마냥 드나드는 통에 고생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손님을 무척 반긴다. 그에게 손님은 곧 휴식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들녘으로 나서는 농부처럼 한 번 작업실에 내려가면 해가 저물 때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단순한 생활. 1년 3백65일을 한결같이, 때로는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묵묵하게 작업하는 그에게 손님은 예술가를 방해하는 불청객이 아닌 그나마 쉴 수 있는 짬을 내주는 고마운 존재다. 그렇게 고마운 벗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그는 직접 막걸리를 담근다. 1년 전 이웃에게 배운 솜씨다. 오늘 아침 독을 헌 막걸리는 며칠 후 만나게 될 제자를 위해 담근 것이라 했다. 1990년대 초반,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에서 가르친 애제자가 미국에서 교수가 되었단다. 아이를 셋이나 둔 성실한 가장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교수로 자리 잡은 제자를 생각하니 흐뭇하기 이를 데 없다며, 어찌 새 술을 담그지 않을 수 있겠냐며 함박웃음 짓는 그의 눈매가 참으로 포근하다.손님 이야기가 나오자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준다. 첼로를 전공하는 딸아이가 서울대 음대에 합격했는데, 어쩌다 보니 집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열어주게 되었다. 아내는 광목으로 이불을 지어 서른 명에 육박하는 아이들의 잠자리를 마련하고, 그는 오랜만에 기계식 카메라를 꺼내 들어 사진을 찍어주었다. 조금 이른 시기지만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봄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마당에 있는 아름드리 벚나무에 일주일 동안 매일같이 물을 주었더니 아이들이 도착하는 날 아침, 딱 맞춰 나무가 흐드러지게 벚꽃을 피워내더란다. 도시에서 경쟁에 찌들려 지내던 아이들이 모처럼 자연에 나와 표정과 눈빛에서 긴장을 거두니, 그 모습이 그리도 예쁠 수가 없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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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구자현 씨. 2 그림은 마리 킴 씨의 작품이고, 인형은 딸아이가 한 살 때부터 갖고 놀던 것. 3 창가의 테이블은 그의 아내가 중학교 2학년 때 “테이블이 너무 좋으니 나중에 제게 주세요” 했던 것을 잊지 않은 친정어머니의 친구가 유품으로 남겨주었다. 4 집터가 산기슭에 자리해 앞에서 보면 1층인 작업실이 뒷편에서 보면 지하층이다. 5 올해로 결혼 30년이 된 부부의 젊은 시절 사진.


부지런한 농부처럼, 순박한 촌부처럼 빚을 내야 재료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궁핍했던 시절에도, 그는 언제나 최고의 재료만을 고집했다. 삶이든 예술이든 기본에 충실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에…. 지난 세월 좋은 종이를 찾기 위해 그는 전국 방방곡곡의 종이 공장을 죄 찾아다녔다. 맘에 맞는 종이를 찾지 못해 종이 공장을 인수할 생각까지 한 그는, 아예 종이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 덕에 한지와 양지를 혼합해 그가 개발한 판화지가 여럿이다. 그는 지금도 새로운 종이를 보면 혀끝으로 맛을 보고,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는다. 어느덧 그는 종이 박사가 되었다. 작업에 있어서는 이처럼 철저한 그이지만, 일상에서 만나는 그는 그저 순박한 촌부를 닮았다. 아니, 그보다 더 하다. 처음으로 운전을 시작한 것도 양평 산자락으로 이사오면서부터고, 휴대전화를 마련한 것도 불과 보름 전이다.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 서울에서 구리 작업실로 출퇴근할 때도 매일 같이 버스를 갈아타고 걸어다녔다. 물욕이 없는 그는 그림을 팔아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가락시장으로 향한다. 생선도 사고 고기도 사고 푸짐하게 장을 봐서 식구들을 불러 모으고, 친구들을 불러 모아 밥을 먹는다. 그저 그뿐이다. 전시를 끝내고 머리 좀 식혀야겠다 싶으면 주머니에 50만 원쯤 챙겨 넣고 지리산 자락에 다녀오는 것이 오락의 전부다.

(왼쪽) 올해로 결혼 30년이 된 부부의 젊은 시절 사진.

예술가의 아내 빚을 내서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하던 시절에도 그의 아내는 한 번도 작품이 팔릴 것을 기대한 적이 없다 했다. 오히려 그림 팔리는 것이 신기했을 뿐. “현대 미술은 20년 고생해야 한다”는 어느 선배의 말처럼 꼭 20년을 지나왔다. 궁핍한 생활을 원망했다면 건널 수 없는 시간이다. 돈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미련해 보일지라도 한 가지 일을 꾸준하게 해내는 것, 그렇게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그 끝을 보게 될 것이라 굳게 믿는 그는 천상 예술가의 아내다. 언제부터인가 성공적인 삶을 만나면 그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배우자를 바라보게 된다. 이 아내가 없었더라도, 이 남편이 없었더라도 오늘의 그가 있겠는가? 싶어서 말이다.
부부로 산 지 올해로 30년. 큰아들이 유학을 떠나고 잠시 휴학한 딸아이가 여행을 떠나고 보니, 부부는 30년 만에 또다시 신혼 아닌 신혼을 맞았다. 30주년을 기념해 뭔가 특별한 계획이 있느냐는 촌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매일이 기념일이고, 매일이 새로운 날이니 우리는 그런 것이 필요치 않다며 지난 일요일 다녀온 문경 사발 축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백문이 불여 일견. 부부가 그릇장에서 막사발을 한아름 꺼내 놓는다. 이름 없는 도공이 무심하게 빚은 그릇들이다. 제각각 그 모양새와 빛깔이 기가 막히다. 기교와 가식이 없는 사발을 바라보며 부부는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한 표정이다. 막걸리를 담아도 좋고, 밥그릇으로도 좋다. 다녀가는 손님들 손에 하나씩 쥐어줘도 좋다.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도 보내줘야겠다. 신이 난 부부는 사발 하나로 할 일이 많아진다. 숨겨 놓은 사발을 꺼낸 김에 “새 술은 새 술잔에”라며 촬영을 얼추 마무리한 일행에게 막걸리를 한 잔씩 권한다. 나는 오늘 만난 예술가에게 형식적인 인터뷰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누구의 작품인지, 무슨 작품인지도 모른 채 그의 그림을 좋아했기에, 작품만큼은 작가의 문장이 아닌 작품이 들려주는 침묵의 언어로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땅은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믿는 농부처럼 땀은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 미련한 예술가의 순박한 일상을 보며, 그가 그린 순백의 평면에 그리도 마음이 끌렸던 연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술맛도 모르면서 오늘은 참으로 술이 달다.
김성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