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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도예가 송일근 씨의 무월리 방외한옥 "사람이 자식도 만드는데 어찌 집 하나 못 짓겠소?"
달빛이 아름다운 마을, 담양 무월리에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12년간 직접 집을 지은 부부가 있다. 어찌 목수도 없이 제 손으로 집 지을 용기를 냈느냐는 물음에, 사람이 자식도 만들어 키우는데 하물며 집 하나 못 짓겠느냐는 현답을 건네는 도예가 송일근 씨 부부다. 돈이 없어 시작한 집 짓기지만, 자연에서 배운 지혜와 삶을 대하는 용기로 지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특별한 집을 만났다.
(왼쪽) 공방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토우. 송일근 씨는 집과 공방을 손수 지으면서 곳곳을 다양한 토우로 장식했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담양에 면앙정을 지은 뒤에 그 감회를 지은 가사다. 이 멋진 가사를 지은 송순(1493~1582)은 호남가단 湖南歌壇의 종장격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학문에다 인품을 갖추고 벼슬도 했고, 90여 세까지 장수를 누린 송순은 3칸 초옥인 면앙정을 지극히 사랑했다. 비록 3칸짜리 집이지만 짓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술회한다. 담양 무월리 송일근 씨도 10년이 넘게 걸려 집을 지었다. 선조인 면앙정 송순을 닮은 것인가. 12년 걸려서 지었는데, 이처럼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으므로 자재를 한꺼번에 구입할 수 없었고 인부도 살 수 없었다. 오로지 자력갱생으로 집을 지었다. 빈손으로 출발해 12년 동안 대들보를 다듬고, 서까래를 구하고, 벽돌을 찍어내고, 마루를 짜고, 흙벽을 발라 집을 지어낸 것이다. 집을 짓는 데 유일한 조력자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부인 정다정 씨다. 12년 동안 농사지으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부부가 집을 지었다.
담양군은 우리나라에서 정자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소쇄원도 있고 명옥헌도 있고 식영정도 있고 면앙정도 있다. 호남 풍류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다. 담양군 대덕면 무월리는 동네 이름도 하필이면 무월리 撫月里다. 무 자가 어루만질 무자다. 달을 어루만지는 동네인 것이다. 달이 얼마나 좋기에 동네 이름을 ‘무월’이라 했을까. 동네 전체가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분지로 달이 뜨면 그 달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고 모아지는 느낌이 드는 동네라고 한다. 마을의 좌청룡 자락이 역시 ‘달을 본다’는 의미의 망월봉 望月峰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바위가 솟아난 거친 봉우리는 없다. 이렇게 되면 살기 殺氣는 없는 셈이다. 기운이 부드러운 동네로 아취 雅趣 있는 문사가 살 만한 동네다. 송일근 씨 부부가 무월리에 지은 집은 겉보기에는 한옥이다. 금속 기와를 덮은 지붕에 집의 뼈대는 나무로 되어 있고, 마루도 길고 넓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가면 전통 한옥의 구조가 아니다. 부엌과 거실의 구조, 유리 창문의 위치가 한옥과 다르다. 실내 디자인이 아주 재미있다. 목재가 반듯하지 않고 약간씩 휘어져 있다. 중간 중간에 설치한 수납공간도 어디서 보지 못한 독창적인 구조다. 실험적이라고나 할까. 마치 한옥에다 공방을 접합시킨 분위기다. 무어라 규정 내리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곤란하다. 말하자면 격식에서 벗어난 방외한옥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유니크한 형태의 집이다. 우리 사회가 먹고살 만해지면서 사람들은 의식주 가운데 의와 식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어느 정도 충족한 감이 있다. 먹고 싶은 것도 먹어보았고 입고 싶은 것도 입어보았다. 그러나 살고 싶은 집은 아직 살아보지 못했다. 국민의 60%가 아파트에 산다. 자기가 바라는 집을 짓고 살아본다는 것이 한국 사람에게는 하나의 로망이다. 그만큼 한국 사람은 자기가 살고 싶은 집을 짓거나 갖는다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곳 집주인은 건축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전직 목수도 아니다. 그런데도 집을 지었다. 무월리가 고향인 집주인은 그동안 도자기를 만들어왔다. 이 집을 짓기 전에 자신의 도자기 공방인 ‘허허공방’도 손수 지었는데, 그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살림집에 도전한 것이다. 송일근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송일근 씨 부부가 단둘이서 12년간 손수 지은 집이다. 2년 전부터 이 집에서 살고 있지만 마무리가 끝나지 않아 아직도 상량식을 하지 못했다.


“목수도 없이 어떻게 본인 손으로 이러한 집을 지을 생각을 했는가?” “사람이 자식도 만드는데 왜 집을 못 만들겠는가!” 이치에는 맞는 말이다. 자식이라는 생명도 만들었는데, 하물며 무정물인 집을 못 만들겠나. 보통은 자식 만드는 것을 쉽게 생각하고 집 짓는 것을 어렵게 생각한다. 이 한마디 속에 송일근 씨의 생명관과 인생관이 집약되어 있는 것처럼 들렸다. “집을 지으려면 보통 사람은 돈부터 생각한다. 돈 없이는 엄두를 못 낸다. 어떻게 돈 없이도 시작할 수 있었는가?” “돈이 없더라도 내가 짓고 싶은 집을 지어보자고 생각했다. 돈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가로막지 못한다.” 글을 쓰는 문필가 입장에서 이야기는 밑천이자 재료다. 그런데 이야기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내 경험에 의하면 금기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금기에 달려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금기를 금기로 여기고 무서워하면 이야기는 없다. 금기에 달려들어야 이야기가 생긴다. 왜냐하면 스파크가 튀기 때문이다. 스파크가 이야기인 것이다. 맨땅에 헤딩을 해야 들을 만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러자니 이마에 피가 맺힌다. 송일근 씨가 집 지은 이야기를 들어보니 맨땅에 헤딩한 사람이다. 어디에서 이처럼 도전 정신이 솟구쳤을까. 담양 출신들은 이처럼 도전적인 건축 정신을 타고나는 것일까. 관상을 보니 눈이 작고 코도 작고 섬세하다. 눈이 작으면 겁이 없고 코가 작으면 허세가 없고 세심한 일을 잘한다. 두 가지가 합쳐진 관상이다. 송일근 씨는 집을 짓다가 손가락을 심하게 다치기도 했다. 전기톱질을 하다가 손가락이 거의 절단 직전까지 갔지만 운이 좋아서 잘 봉합되었다. 집 옆에는 전기톱과 대패를 비롯해 경운기 등의 각종 공구를 보관한 창고가 있다. 나무는 모두 소나무를 사용했는데, 뒷산인 금산 錦山에서 몇 년을 두고 한 그루씩 채취했다. 직접 이고 내려온 나무를 그늘에서 말린 다음 정성스럽게 대패로 다듬어놓았다. 그 소나무들이 그렇게 큰 나무는 아니다. 작은 나무를 선호했다고 한다. 집 짓기에 들어간 돌이나 흙도 모두 자급자족했다. 금속 기와와 유리 그리고 몇 가지만 돈을 주고 사 왔을 뿐이다. “집을 지으면서 염두에 둔 핵심 원리가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세 가지가 있다.

너와집은 한옥으로 이사하기 전에 살던 곳으로 골목길 바로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옆으로 축사를 개조해 10년째 짓고 있는 전시장이 있는데, 자연목의 생김새를 그대로 활용한 탓에 마루를 까는 데만 3년이 걸렸다 하니, 완성된 후의 모습이 기대된다.


첫째는 집이 편안해야 한다. 집이 사람을 누르면 안 된다. 사람이 집을 만만하게 보아야 편한 느낌이 든다. 집은 쉼터여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따라서 집을 너무 거대하게 지으면 집의 기운이 사람을 누를 수 있다. 사람이 편안하게 느끼도록 내부에 사용한 목재도 작은 것을 썼다. 너무 크면 부담을 느낀다. 작을 뿐 아니라 자세히 보면 목재가 휜 것이 많다. 직선은 긴장감이 있는데 휘면 긴장감이 적고 허술한 느낌이 든다. 집 안에 있는 목재로 된 문의 손잡이나 수납공간도 전부 내가 디자인했는데 편안함을 고려했다. 곡선과 자연스러움을 많이 참작한 것이다. 둘째는 기능이다. 사는 사람이 편리해야 한다. 특히 살림을 하는 아내가 편리하도록 연구했다. 집사람도 같이 집을 지었으니 수시로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했다. 그 편리함이란 우선 주방이 가까운 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 한옥은 부엌이 멀리 있어 왔다 갔다 하기가 불편했다. 뿐만 아니라 부엌은 남자 또는 아들이 출입할 수 없는 금기의 공간이기도 했다. 부엌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공간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먹어야 한다. 제일 편리해야 하는 공간인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해서 주방을 거실에 바로 붙여서 만들었다. 거실에서 차를 마시다가도 남자가 곧바로 주방에서 과일을 내오거나 찻그릇을 씻을 수 있는 동선이다. 이 집은 마루가 넓은데 그 넓이만 8평에 달한다.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왼쪽)
건물 벽을 비롯해 마당과 장독 등 울타리 안 곳곳에서 해학적인 모습의 토우를 만날 수 있다.
(오른쪽) 송일근 씨 가족의 단란한 모습. 집 앞에 나란히 놓여 있는 덩어리의 물체는 돌이 아니다. 도예가인 송일근 씨가 흙을 덩어리로 빗어 장작가마에 구워낸 작품이다.

날씨가 더운 여름에는 마루에 앉아서 바깥 공기를 직접 접할 수 있도록 마루를 넓게 만들었다. 마루에서 간단한 차회 茶會를 할 수도 있다. 셋째는 건강에 도움이 되는 집이어야 한다. 겨울에 실내가 따뜻하면서도 환기가 잘되는 집이다. 실내가 따뜻하다 보면 환기가 잘 안 될 수 있다. 반대로 환기가 잘되면 추울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절충할 것인가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다.” 보온과 환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송일근 씨가 착안한 것은 불과 물의 성질이다. 불은 올라가는 성질이있다. 물은 아래로 내려가는 성질이있다. 그러나 좀 더 관찰해보면 나중에 불 기운은 아래로 내려간다. 반대로 물은 수증기로 변해서 하늘로 올라간다. 이처럼 오르고 내리는 불과 물의 속성을 이용했다. 그러자면 창문의 크기와 위치를 생각해야 했다. 어느 쪽에서 바람이 들어와 빠져나갈 것인가. 빠져나가는 창문 크기를 어느 정도로 조절할 것인가. 계절별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은 어떻게 변하고, 이를 어떻게 창문이나 환기통에 반영할 것 인가. 결국은 단열과 순환이 잘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다음에는 천장 높이를 어느 정도 할 것이며 지붕은 어떤 것으로 할 것인가였다. 거실 쪽 천장 높이는 3m지만 작은 거실의 천장은 2m 높이다. 차이가 있다. 공기 흐름과 시각적 안정감을 고려한 것이다. 지붕 재료는 복잡하고 두껍다. 지붕의 두께가 1m가 넘는다. 우선 대나무를 엮어서 흙을 발랐다. 대나무와 흙 사이에는 자연적으로 미세한 균열이 생긴다. 이 균열 사이로 공기가 숨을 쉰다. 지붕 중심에는 1m 두께의 지푸라기가 깔려 있다. 짚은 보온 효과가 높으면서도 공기가 들락거린다. 지붕에 별도의 방수제나 비닐을 사용하지 않고 최종 마감재로 금속 기와를 선택했다. 지붕에 깔린 지푸라기의 두께가 1m에 달하니 겨울에 보온 효과가 아주 높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인 환기가 되니 겨울에 실내에 있어도 답답한 느낌이 없고, 실내 공기가 적당히 쾌적하다.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지붕이 마치 옹기와 같다. 옹기는 물을 담고 있으면서도 외부 공기와 소통하지 않는가. 열려 있으면서도 닫혀 있고 닫혀 있으면서도 열려 있는 ‘개폐 겸용’, 이것이 옹기의 묘용이다. 어찌 옹기뿐이겠는가. 사람도 그래야만 고수가 된다. 방바닥에는 보일러 선을 깔았는데 이 보일러는 목재 보일러다. 장작을 때어 보일러를 가열한다. 방바닥의 재료는 흙이다. 흙으로 보일러 선을 덮은 다음 염색한 천으로 그 위를 덮었다. 그리고 그 천 위에 생콩을 갈아 콩댐을 했다. 방바닥 촉감이 좋다.

(왼쪽) 아담한 모양새의 통나무집은 땔감으로 가득한 보일러실이다. 이 집의 보일러는 기름이 아닌 나무를 땐다. 별채로 마련한 보일러실에서 나무를 때면 본채 안으로 난방이 공급된다.

이번에는 집 짓는 데 목수로 참여한 부인에게 물었다. “12년 동안 온갖 고생 다 했을 텐데, 가장 보람되고 기뻤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집의 기둥을 완성했을 때가 가장 보람 있었다. 마치 영국의 스톤헨지 돌기둥처럼 집의 목재 기둥을 모두 세워놓고 보니까 내가 우주의 일부분을 완성한 것 같은 기쁨이 전해왔다. 물론 이 기둥을 세우기까지 7년의 세월이 걸렸다. 뒷산에서 소나무를 운반해와 말리고, 처음에는 기둥을 잘못 세워 넘어지고 다시 세우고 나무를 잘못 깎는 등 온갖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사이 7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러다가 낮은 기둥인 평주와 높은 기둥인 고주를 합쳐 모두 34개의 나무 기둥을 세워놓고 보니 ‘나도 할 수 있다!’ ‘내가 해냈구나!’ 하는 보람이 밀려왔다. 특히 아침 해 뜰 때와 저녁 석양 무렵에는 해가 기둥들을 비추고 그림자가 생긴다. 그 그림자의 방향이 태양 위치에 따라 하루에도 수없이 변한다. 그 그림자 변하는 모습이 너무나 신성하게 여겨졌다. 이 기쁨이 그동안의 고생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제일 힘들었던 작업은 어떤 것이었나?” “천장에 흙 바르는 일이었다. 이 일은 힘들어서 토수 土手들도 잘 안 한다. 한 칸 바르고 쉬었다가 다시 하기를 반복하면서 관절과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아주 힘들었다.”
“어떻게 먹고사는가?” “쌀농사를 20마지기쯤 짓는다. 1년 소출 쌀이 80kg으로 50가마 정도 나온다. 이걸로 먹고산다.” 그가 요즘 맡고 있는 직책은 무월리 이장이다. 한 달에 20만원 받는다고 한다. 그는 요즘 이장으로서 무월리의 돌담 공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돌담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에 맞물려 있으므로 누군가 중재자가 필요하고,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송일근 씨가 그 중재자로 안성맞춤인 것이다. 현재 골목골목 동네 전체에 돌담을 세우고 있는데 완공되면 볼만하겠다. 그의 본업인 도자기 만드는 일은 이장을 맡으면서 휴업 중이란다. ‘허허공방’이 쉬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집을 한 채 더 짓는다면 어떤 집을 짓고 싶은가?” “일출과 일몰 시간에 그 빛을 신비롭게 받아들이는 집을 짓고 싶다. 한옥의 한지가 그 수단이 될 수 있다. 햇볕이 한지를 통해 들어오는 느낌을 어떻게 하면 더 신비롭게 구현할 수 있는지를 집 지으면서 고민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계절별로 변하는 일출과 일몰 지점, 처마 각도와 길이를 계산해야 하고 창문 위치와 크기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채광에 관심이 간다.”
자력갱생으로 12년 동안 부부가 지은 방외한옥을 보면서 집주인이 던진 한마디가 머릿속에 남는다. “사람이 자식도 만드는데 왜 집을 못 만들겠는가!"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백가기행’을 통해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이야기합니다. 위로와 휴식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1년간 <행복>과 함께 각양각색의 집을 돌아보며 그가 찾아낸 가내구원의 공간은 다실, 구들장, 중정이라 합니다. 그중에서도 현대인이 꼭 갖추어야 할 공간으로 다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 그리고 지난해 가을 출간한 <조용헌의 명문가> 등이 있습니다.
조용헌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