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민가에서 보기 어려운 80여 평 규모의 큰 연못이 이 집의 규모를 가늠케 한다. 풍수적으로 보면 이 연못은 언덕 경사면에 지은 집의 지기가 흘러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마련한 방책이다.
해마다 봄이 오면 중국 강남 지역에 놀러 가고 싶다. 강남이라 하면 소주・항주・양주 일대를 일컫는데, 이 세 도시는 강남의 풍요와 온화함이 배어 있는 곳이다. 강남의 그 풍요를 상징하는 건축이 바로 이 세 도시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정원 庭園이다. 중국 고급문화의 정수는 정원이고 졸정원, 개원 등 강남 지역 여러 명원 名園을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것은 중국 정원에서 석가산 石假山의 중요함이다. 이들 정원에는 어김없이 커다란 괴석 怪石이 배치되어 있다. 강이나 호수에서 건져 온 커다란 돌을 정원에 배치하는 것이 중국 정원의 특징이다. 돌이 없으면 중국 정원은 쏘는 맛이 없다. 그만큼 석가산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이 돌을 운반하고 배치하는 데 돈과 공력을 쏟아부었다. 양주에 있는 유명한 정원인 개원 介園에 가보니 커다란 돌을 쌓아 인공 산을 만들었을 정도다. 중간 중간에는 굴도 만들어놓아 미로처럼 그 굴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있다.
1 담장을 둘러 실개천이 흐르는데 이는 지리산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다. 이 물줄기를 잡아 집 안 연못으로 흘러들게 했다.
2 20세기 초반에 지은 이 집은 원래 안 사랑채와 바깥사랑채, 안채와 행랑채, 초당과 사당이 있는 큰 규모였다. 혼란스러운 근현대화를 거치면서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어 현재는 안채와 행랑채만 남아 있다. 사진은 안채 모습.
그렇다면 왜 중국의 강남 사람들은 이처럼 정원에 석가산을 조성하는 데 신경을 썼단 말인가? 한마디로 산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강남 일대는 평지가 많고 산이 적다. 산에 가보고 싶은데 돈 버느라 바빠서 산에 가볼 수가 없다. 그래서 정원에 석가산을 만들어놓고 대리 만족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위가 있고 소나무가 있고 계곡물이 흐르는 산이야말로 한평생의 염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돈 벌면 많은 돈을 들여 거대한 정원을 조성하고 그 한복판에 거대한 돌무더기인 석가산을 만든 것 같다. 산이 적은 중국 강남과 달리 한국은 국토의 70%가 산이다. 눈만 뜨면 산을 바라볼 수 있다. 봄이 되면 나물을 뜯으러, 약초를 캐러, 나무를 하러 산에 간다. 바위가 있고 소나무가 있고 구름이 걸려 있는 풍광 좋은 산이 삼천리 강산에 널려 있다. 그러므로 한국 사람은 정원에다 돈 들여서 석가산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담장 밖이 바로 명원이었던 셈이다. 담장 밖이 바로 자연 정원이다. 인공으로 조성한 가산가수 假山假水가 아닌 조물주가 만든 진산진수 眞山眞水의 정원이 바로 담장 밖 정원이다. 담장 밖에 이처럼 완벽한 정원을 갖춘 곳이 바로 하동군 악양면이다. 지리산 남쪽 자락은 하동과 구례로 뻗어 있다. 특히 하동은 섬진강이 남으로 뻗은 지리산 자락을 감아 흐르는 지형이다. 그래서 악양은 지리산 풍경과 섬진강 풍경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풍광만 좋으면 무엇하겠는가! 먹을 것이 있어야한다. 악양은 거대한 골짜기인데 이 골짜기 안쪽이 논밭으로 펼쳐져 있다. 따라서 먹을 것이 풍부하다. 이렇듯 독특한 조건을 갖춘 악양은 예로부터 명승지로 꼽혀왔다. 초록색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으면서 그 주변을 1000m 높이의 푸른 청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아파트가 둘러싼 것이 아니다. 오로지 청산이다. 둘러싼 산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마음이 허전하면 이 둘러싼 산이 나를 보호해주는 것 같은 분위기다.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자연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주는 별천지다. 세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은둔하면서도 산수화 속에나오는 자연의 정취를 흠뻑 즐길 수 있고 그러면서도 배고프지 않은 동네, 이곳이 바로 악양이다. 다른 농촌 지역은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지만, 2000대 들어서면서 악양 인구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악양의 풍요를 상징하는 옛말이 있다. “거지가 악양에 들어와서 얻어먹으면 3년을 먹어도 세 집이 남는다.” 3년 동안 얻어먹을 집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도 귀촌・귀농하려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역이 바로 악양면이다. 예전에는 약 1만 명이 살았다는 악양에 현재는 3천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이 가운데 10%에 해당하는 3백 명 정도가 귀촌(농)한 사람들이다. 스님의 토굴도 많고, 시인・화가를 비롯한 예술가도 있고, 차를 재배하거나 공예품을 만들기 위해 들어온 사람도 있다.
악양면 정서리 亭西里에 있는 ‘조 趙 부자 집’은 악양의 절대적인 산수 풍광과 녹색의 풍요를 모두 맛볼 수 있는 집이다. 중국 강남의 부잣집 정원처럼 석가산을 조성할 필요가 없는 환경인 것이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조준 趙浚(1346~1405)의 후손이 지은 집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재 살고 있는 후손인 조한승 씨는 조준의 19대손이다. 조한승 씨에 따르면 이 집의 상량문 上樑文에 ‘개국 527년’이라고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조선 왕조가 1392년에 개국했으니 여기에 527년을 더하면 1919년이 된다. 따라서 이 집은 1919년에 지은 집이라고 추정된다. 약 100년 된 집이다. 집을 짓게 된 상황을 추정해보자. 1910년에 한일병합이 된 뒤 조선의 사대부층은 나라가 망했다는 절망감에 빠졌을 것이다. 조한승 씨의 조부인 조재희 趙載禧는 가선대부 嘉善大夫라는 현재의 차관급 벼슬을 했다고 한다. 구한말 대원군과도 교분이 깊었고 조준의 후손으로서 물려받은 재산도 상당한 서울의 상류층이었던 것 같다. 그런 만큼 절망감도 더 컸을 것이다. 아마도 한일병합을 전후한 무렵에 조재희는 경저 京邸(서울에 있는 집)인 당주동(현재 정부종합청사 부근)에서 살다가 서울을 벗어난 곳에 향제 鄕第(시골에 있는 저택)를 두기 위해 전국의 명당을 물색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구전에 따르면 풍수를 잘 아는 여자 지관을 대동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 지관은 땅을 보면 영적인 영감이 즉각 떠오르는 능력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다 고른 곳이 바로 악양면 정서리였다. 악양 골짜기는 그 안이 넓고 산자락이 여러 방향에서 흘러내려오기 때문에 어떤 산자락에 터를 잡느냐에 따라 전망이 달라진다. 조 부자 집은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의 산이 거의 1000m에 육박하는 높이므로 평지인 아래쪽에 자리 잡으면 앞산에 눌리는 감이 있다. 이걸 피하기 위해서는 언덕으로 조금 올라가야 한다. 그러면 눈높이와 앞산이 맞다. 조 부자 집의 풍수적 특징은 우측 산자락인 우백호가 바로 집에 붙어 있다는 점이다. 악양에서 우백호가 이처럼 바짝 붙어 있는 터는 조 부자 집뿐이다. 이 백호 자락이 솔봉산이다. 백호 자락은 통상 재물과 관련이 있다. 재물을 지키려면 좌청룡보다는 우백호가 든든하게 지켜주어야 한다. 아마도 집터를 잡을 때 백호 자락인 솔봉산이 우측에 붙어 있는 점을 특별히 고려했던 것 같다. 악양에서 백호가 이처럼 보기 좋게 잡은 터는 이 조 부자 집 근방밖에 없다. 집 정면으로는 구재봉이 보인다. 거북이 형상이라고 해서 거북 구 龜 자를 쓴다. 그리고 정면 좌측으로는 칠성봉이 포진해 있다. 모두 지리산에서 내려온 800~900m 높이 산이다. 집 뒤로는 형제봉이 있다. 지리산 삼신봉 三神峰에서 내려온 줄기가 시루봉까지 내려왔다가 한 자락은 집 앞의 칠성봉으로, 다른 한 자락은 집 뒤의 형제봉으로 내려왔다. 칠성봉은 삼각형 모양인데 이는 문필봉으로 본다. 악양의 다른 집들은 대부분 조 부자 집보다 낮은 곳에 자리하고 방향도 섬진강 쪽을 바라본다. 그래서 전망이 더 넓게 트여있다. 조 부자 집은 방향이 달라서 다른 전망이 나온다.
조 부자 집은 박경리 소설 <토지>에 나오는 최 참판 댁의 모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박경리가 악양의 들판을 지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누렇게 벼가 익은 악양의 들판 주인이 누구인가 하고 동네 사람에게 물어보니, ‘조 부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박경리가 이 말을 듣고 나중에 <토지>를 구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재희 생전 당시의 조 부자 집은 만석꾼이었다. 전라북도 김제와 임피에까지 논이 있었고, 전라남도 광양에도 상당수의 전답이 있었으며, 경기도 고양에도 선대부터 내려온 11만 평의 전답이 있었다. 일제강점기까지 악양에만 1천 마지기의 전답이 있었다. 박경리가 본 것은 바로 이 1천 마지기의 전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이 많은 전답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현재 조 부자 집의 터는 1천2백 평이다. 서울 당주동에 있는 조 부자의 경저가 7백 평이었는데 1년의 전반기 6개월은 서울에서, 나머지 6개월은 악양에서 보냈다고 한다. 지리산 자락 가운데 가장 양명하고 전답이 많아서 풍요롭고 섬진강이 보좌해주는 최고의 명당인 악양에서 가장 럭셔리한 저택은 바로 이 1천2백 평의 조 부자 집이었다. 구례에 운조루가 있었다면 악양에는 조 부자 집이 있었다. 지리산 남쪽 자락에서 쌍벽을 이루는 두 채의 한옥이 ‘운조루’와 ‘조 부자 집’이었다. 운조루는 많이 알려진 데 비해 조 부자 집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조 부자 집은 본채만 남아 있다. 안 사랑채와 바깥사랑채, 본채 뒤의 건물은 동학과 6・25 전쟁 그리고 산업화라는 풍파를 거치면서 사라졌다. 고려대 60학번 대학생 2백 명이 여름에 농촌 봉사활동을 오면 이 집 사랑채에 머물렀다고 하니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이 집 사랑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2백 명이 머물 정도면 사랑채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위) 연못 축대 한쪽에는 가로세로 1m 크기의 석빙고가 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석빙고는 여름철 과일과 음식을 저장하는 천연 냉장고였다.
앞산의 지기에 눌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집은 언덕에 터를 잡았다. 따라서 집터가 3단계로 나뉜다. 맨 위쪽 터인 안채 뒤 언덕에는 4백 평 규모의 차 밭이 조성되어 있다. 집주인 조한승 씨가 일구는 차밭으로 원래 이 터에는 신랑 신부가 첫날밤을 치르는 초당과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허름하게 남아 있는 행랑채 창고는 쌀 2백 가마 분량이 들어가는 크기다. 왜 2백 가마인지 물어보니 이 집 식솔이 1년에 소비하는 쌀의 양이 대략 2백 가마 분량이었다고 한다. 식솔은 집 식구와 하인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식솔이 50명 정도 되었다. 매일 50명분의 밥을 하는 일도 큰일이었을 것이다. 보통 식사 준비를 하려면 커다란 가마솥 2개가 필요하다. 하나는 밥, 다른 하나는 국을 끓이는 솥단지다. 그런데 더운 여름에는 가마솥에 불을 때는 일이 문제였다. 부엌에서 불을 때면 너무 더웠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본채 마당 한쪽에 솥단지 2개를 걸어놓고 취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여름에 밥을 하던 건물은 아직도 남아 있다. 사방에 벽이 없고 지붕만 있는 건물이다. 옆쪽의 대나무로 만든 시렁에는 그릇을 얹어놓을 수 있도록 했다.
이 집 구조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80여 평 규모의 네모진 연못이다. 연못 주변에 돌을 반듯하게 쌓아서 축대를 만들었다. 공력이 많이 든 연못이다. 보통 민가에서 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형태다. 몇 년 전 여름철 장마에 축대가 무너져 복구했는데 그 비용이 집 한 채 값일 정도였다고 한다. 연못 축대 한 면에는 가로세로 각각 1m 크기의 네모진 공간이 있다. 여름에 과일과 음식을 저장하던 ‘석빙고’라고 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부잣집에서 손님 접대를 하려면 이런 시설이 필요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처럼 공력을 많이 들여 특별히 연못을 만든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집약된다. 첫째는 집을 언덕의 경사면에 지었기 때문에 그 앞으로 흘러내려가는 지기 地氣를 붙잡아두려는 풍수적인 용도다. 경사면이 급한 터는 기가 흘러가지 못하도록 연못을 파는 경우가 있다. 물은 기운을 잡아두는 역할을 한다. 둘째는 관상용이다. 지리산 계곡에서 흘러오는 물이 집 주위를 통과하기 때문에 이를 연못에다 모아놓으면 자연스럽게 물을 완상할 수 있다. 물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서를 순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세 번째는 화재 진압용이다. 목조 한옥에서 불이 났을 경우에는 곧바로 소방수로 사용할 수 있다.
집을 짓는 데 15년이 걸렸다는 조 부자 집은 전망이 아주 좋다. 지리산 자락인 칠성봉, 구재봉, 형제봉, 솔봉으로 둘러싸여 있고 발아래로는 평평한 언덕과 전답이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다. 그 사이에 아파트도 없고 빌딩도 보이지 않는다. 쇠붙이는 없고 오직 자연만 있다. 마당에서 담장 밖을 바라보면 지리산 영봉 한가운데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 집에 있어도 산속에 있는 셈이다. 그러니 무슨 정원이 필요할 것이며 석가산이 필요할 것인가! 집 주위로 수백만 평이 모두 나의 정원이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집에서 여름 한 철을 보내면 지리산 신선도 부럽지 않을 것 같다. 조 부자 집은 지리산 자락의 럭셔리 저택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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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백가기행’을 통해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이야기합니다. 위로와 휴식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1년간 <행복>과 함께 각양각색의 집을 돌아보며 그가 찾아낸 가내구원의 공간은 다실, 구들장, 중정이라 합니다. 그중에서도 현대인이 꼭 갖추어야 할 공간으로 다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 그리고 지난해 가을 출간한 <조용헌의 명문가> 등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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