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 키보다 더 큰 선인장이 인상적인 애리조나의 자연환경. 그 가운데 리조트처럼 넓은 대지 위에 올린 부부의 집이 위치해 있다.
2 나완균 씨가 직접 만든 의자와 조명기구 등 독특한 소품으로 꾸민 리빙 룸. 색감이 뚜렷한 가구에 스케일감이 느껴지는 작품이 어우러져, 영화에서나 본 듯한 대저택을 연상케 한다.
2009년 10월 21일, 뉴욕 코리아아메리칸 커뮤니티재단(KACF) 연례 만찬에서는 시트김 인터내셔널 인베스트먼트의 공동 창업자 김병수 고문(73세, 미국명 앤디 김)이 ‘자랑스러운 경영인상’ 수상자로 무대에 올랐다. 김병수 고문이 ‘자랑스러운 경영인’으로 선정된 이유는 그가 월가에 진출한 첫 한국인이고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인이어서만은 아니다. 1985년 다트머스대에 아시아 갤러리 기증(지금까지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2007년 코넬대 존슨 박물관에 코리아 갤러리 기증 등 지난 20여 년동안 그가 보여준 미국 대학에 한국의 문화를 심는 선구자적 역할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이름을 알리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후배들에게 이정표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지요. 미국에서 한국 예술품을 만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제가 사는 피닉스는 미국에서 여섯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그런데도 피닉스 미술관에 가보면 중국과 일본 작품은 많은데 한국 작품은 딱 한 점 있습니다. 이것이 미국 전역에 있는 한국 문화의 현실입니다.” 우선 가족이 살아온 커뮤니티부터 시작하겠다고 생각한 김병수 고문은 가족의 이름으로 ‘Kim Family Foundation’을 설립, 큰아들이 다닌 다트머스대에 아시아 갤러리를 기증하면서 본격적인 기부 활동을 시작했다. 코넬대는 본인의 모교다.
3 미국 월가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인, 시트김 인터내셔널 인베스트먼트 김병수 고문.
1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 한국의 전통 도자기를 수집해놓은 공간.
2 한국은 물론 아시아의 혼을 미국 문화에 심고 있는 김병수・나완균 씨 부부.
자타가 인정한 감각, <뉴욕 타임스>도 알아보다
김병수 고문과 부인 나완균 씨는 1970년대부터 미술품, 도자기와 골동품을 수집해왔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중국 현대 화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기도 했는데, 이 수집품 다수가 아시아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나완균 씨는 화학을 전공했지만 집 인테리어 디자인은 물론 자신의 패션 스타일링에도 독창적 재능을 보이며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2년 전 피닉스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뉴욕 시내 어퍼 이스트사이드의 집은 2002년 <뉴욕 타임스> ‘하우스 & 홈’ 섹션의 커버 스토리 ‘자랑스러운 집’에 두 쪽에 걸쳐 소개될 정도로 웅장한 미술관 같은 집이었다. 1982년에 구입한 19세기식 6층 집의 전 주인은 영화배우 페이 더너웨이. 페이 더너웨이가 깨끗이 수리하고 입주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사정이 생겨 런던으로 이사 가며 내놓은 곳이다. 여러 사람이 이 집을 사려고 했는데, 정작 페이 더너웨이는 나완균 씨에게 팔고 싶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나와 퍼스낼리티가 맞는 것 같아서’였다고. 중국 현대화가가 그린 보티첼리 모작부터 나완균 씨가 손수 그린 그림 등 벽과 바닥은 물론 천장까지 온갖 그림이 즐비한 그 집은 각 층마다 다른 테마로 꾸몄다고 한다. 6층은 루소풍의 광야, 5층은 장미 정원, 3층은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 2층은 나완균 씨의 모교 스미스 칼리지의 연못을 화장실 바닥에 그렸다. 나완균 씨는 저녁 파티에 초대한 손님들에게 하얀 식탁보에 서명하게 해 그 서명에 수를 놓아 그날 저녁의 여흥을 기록하는 작품을 만들고, 다음 파티에 그 식탁보를 사용하는 등 늘 흥미로운 이벤트을 기획하는 독창적 아티스트다. 2년 전 이사 와 정착한 애리조나 피닉스에 있는 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집 안 곳곳에 컬러풀한 그림과 가구, 전시물에 예술적 감성이 생동하고 있다. 나완균 씨가 디자인했다는 입구의 바닥 타일과 집 안에 늘어선 대여섯 개의 거문고와 가야금 등의 악기에서는 이 집 주인의 조국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태극은 우리나라를 상징하기도 하고, 중국의 음양 사상을 상징하기도 하지요. 동서남북의 표시와 함께 가운데 태극을 배치해 몬드리안식으로 디자인해봤어요. 한국과 중국, 미국의 문화를 조화시켜가며 즐기는 우리 삶의 방식이 반영된 것이지요.”
3 미국 남서부에 황무지 같은 애리조나의 평원. 그곳에 색감이 뚜렷한 아트로 특색있게 꾸민 김병수 고문의 정원.
4 수십 년의 미국 생활 중에도 자신의 뿌리는 한국에 있음을 잊지 않는 나완균 씨의 작업실. 회화는 물론 가구 디자인까지,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독창적인 감각, 남편을 내조하는 힘이 되다
원래 물리생물학을 전공한 나완균 씨는 스미스대 시절 컬럼비아 대학원에 다니던 김병수 고문을 뉴욕 주재 한국 영사가 자주 베풀던 유학생 파티에서 만나 결혼했다. 서울대 의과대학장을 지낸 부친이 들려주신 조언을 나완균 씨는 평생의 지침으로 삼아왔다. “‘결혼하면 남편과 아내가 반반씩 역할을 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너는 80%는 네가 한다고 생각하며 결혼 생활을 하라는 말씀이셨지요.” 그런데 80%를 하려고 노력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오히려 아내가 ‘자신의 캐릭터’를 맘껏 살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박사 학위를 따든지 집을 꾸미든지 하겠다”는 나완균 씨에게 집을 꾸미도록 해준 덕분에 그녀는 소파 커버를 바꾸는 일로 시작한 집 꾸미기를 ‘박사’보다 더 전문가답게 해내고 있다. 추억의 장소를 그려 넣으면서 ‘행복의 역사’를 기록하는 나완균 씨에게 집은 ‘나의 일기’다. 현재 나완균 씨는 ‘백자둥이 병풍’ 작업에 몰두해 있다. 동자 한 명 한 명에 자신이 그리고 싶은 모습을 그려 넣는 이 병풍을 완성하는 데 10년이 걸릴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뉴욕에서 이들 부부를 오래 지켜본 한 지인은 김병수 고문이 미국 주류 사회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데는 아내의 내조가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말한다. 아내의 이러한 독창적 집 꾸미기와 파티 센스 그리고 무엇보다 어디서나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패션 감각이 늘 깊은 인상을 남기며 호감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언젠가 여러 디자이너의 옷을 믹스 매치해서 입고 나갔는데 유명 디자이너인 오스카 드 란타가 ‘원더풀 아이디어!’라고 극찬했지요.” 얼마 전에는 피닉스의 기금 모금 갈라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누군가 열심히 자신을 사진 찍더란다. 그녀의 패션을 보며 “I love it!”을 외친 그이가 나중에 알고 보니 차도 랄프 루치(파리 오트쿠튀르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미국 디자이너)였다. 자랑스러운 경영인상 시상식에도 손수 비즈를 붙여 만든 모자를 쓰고 나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베스트 드레서로 눈에 띄었다. “저는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해요. 어릴 때 보고 배운 한국 문화가 제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지요. 우리 한옥의 문은 몬드리안 못지않은 예술이고요, 한국 음식도, 옷도 얼마나 맛있고 멋있어요? 오페라와 같은 서양음악을 많이 즐기면 즐길수록 우리의 판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더 절실히 느끼게 되지요.”
김병수 고문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상대, 애들피대와 컬럼비아 대학원을 졸업했고, 1963년 코넬대에서 MBA를 했으며 세톤홀대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CFA(공인재무분석사)에 합격했으며 JP 모건 체이스의 수석 부사장을 지내는 등 월가에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현재는 코넬대 이사회와 존슨 박물관 자문위원회의 이사로, 워싱턴 D.C.의 코리아 이코노믹 인스티튜트 자문위원회의 멤버 등 여러 단체의 요직에 있으며 최근에는 피닉스 미술관 이사회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 KACF(Korean American Community Foundation)은?
미주 내 거주하는 한인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공동체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2002년 창립된 비영리 단체다. 미주 한인 교포들의 자발적 기부와 자원봉사 활동으로 운영되는 KACF는 2006년부터 한국인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함께하는 Building Bridges 행사 만찬과 옥션 등을 통해 기금을 모금, 도움이 필요한 기관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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