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갑 대표가 서 있는 곳은 그가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를 따라 낚시를 다니던 자리라 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친숙했던 이 풍광의 매력에 빠져 이곳에 두 번째 갤러리, 오스하우스를 마련했다.
1 전해갑 대표가 오스갤러리(063-244-7116, www.osart.co.kr)를 오픈했던 14년 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공을 예견하지 못했다. 지방의 중소 도시에, 그것도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전시장을 누가 찾겠느냐며.
2 건축가이기도 한 전해갑 대표의 건축에는 언제나 자연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내는 창이 있다. 오스갤러리의 전시관과 카페를 잇는 공간이다.
전주 시내에서 20분 정도 달려 도착한 완주군 소양면. 작은 시골 마을을 가로질러 산길로 돌아드니 평화로운 호숫가 풍경 속에 고풍스러운 벽돌집과 현대적인 콘크리트 건물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참으로 다른 모양새에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알고 보면 둘도 없는 친구 같다 할까. 처마 끝까지 기어오른 담쟁이가, 누에고치 창고로 지어 한동안 별장으로 사용했다는 벽돌집의 세월을 말해준다. 벽돌 벽과 대리석 바닥, 알프스 산장 같은 아치형 창문, 중국식 소파 세트가 묘한 조화를 이루는 응접실. 시대극에서나 볼 법한 이곳에서 오늘의 주인공, 오스갤러리 전해갑 대표를 만났다.
“이 집을 지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저에게 미쳤다고 했어요. 이렇게 외진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모두들 고개를 저었지만 자연이 좋아 산골에 집을 짓고 10여 년을 살다 보니 집 앞으로 농업용 저수지가 개발되고 호숫가 풍경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빨간 벽돌집은 잿빛 콘크리트로 지은 친구, 오스갤러리를 만났다. 1층은 전시장으로, 2층은 게스트하우스와 다실로 이루어진 건물은 노출 콘크리트 마감을 기본으로 고재와 철판 소재의 은근한 디테일이 가미되었다. 건물이 품고 있는 물성으로 보자면 차디찬 공간이어야 하겠지만, 이곳은 벽돌집 못지않은 온기를 품고 있다. 창으로 전해지는 자연의 온기다. 풍광에 맞추어 흉한 것은 벽을 세워 가리고, 고운 것은 창을 내 안으로 끌어들였다.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 산은 은은한 담채화에 다름 아니고, 허리춤으로 길게 난 창밖 풍경은 수려한 필치로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
3 8년간 개인 별장으로 사용한 벽돌집은 오스갤러리가 문을 열면서 갤러리를 찾는 손님들을 위한 카페로 활용되고 있다.
4 오스갤러리 2층 다실 풍경. 뒷산을 향해 낸 창은 사시사철 담채화 같은 맑은 풍경을 그려낸다.
5 다실 옆에 마련한 게스트하우스. 무조건 창을 크게 내기보다 주변 풍광을 고려해 창문 모양에 변화를 주었다.
6 시대극에서나 볼 법한 고풍스러운 응접실이 멋스럽다.
건축가에서 갤러리스트로 두 건물 모두 오스갤러리 전해갑 대표의 작품이란다. 그저 안목이 높아 컬렉션이 좋고, 전문가 못지않은 감각으로 갤러리를 지을 때 훈수깨나 두었으려니 생각했는데 말이다. “젊어서 건축과 인테리어 일을 했어요. 20대 후반,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은 것이 벽돌집이고, 30대 중반에 지은 건물이 갤러리지요. 덜어내지 못한 욕심이 곳곳에 묻어 있죠. 지금 보면 부끄러운 것 투성이지만, 그저 그 시절 제 모습인 것이지요. 스물여덟 살부터 서른여섯 살까지 9년 동안 50곳 정도 일을 한 것 같아요. 물론 돈도 많이 벌었지요.” 건축이나 디자인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타고난 감각과 재능으로 공간 디자이너로 명성을 쌓아나갔다.
공간 디자이너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즈음 그는 이 산골에 갤러리를 열었다. 인생의 무게중심이 건축가에서 갤러리스트로 서서히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한동안 고생도 많았죠. 지역 작가들을 염두에 두고 마련한 공간인데 그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거든요. 지방의 중소 도시, 그것도 먼지 풀썩이며 울퉁불퉁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도착하는 산골 갤러리에 누가 그림을 보러 오겠느냐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오스갤러리가 소문나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중견 작가들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1 2백50년 된 한옥을 이축해 세운 아원은 태백산맥 남쪽 끝자락인 종남산을 마주하고 있다. 20평 남짓 작은 풍채지만 종남산의 산세를 충분히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무게감과 힘을 지녔다.
돈도 벌고 이름도 얻은 건축가의 길을 뒤로한 연유는 무엇일까? “건축과 공간, 자연과 사람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더군요. 오스갤러리를 오픈한 지 14년이 되었어요. 그동안 전시한 작가만도 60명이 넘고 많은 사람이 이곳을 다녀갔죠. 공간의 아름다움은 건축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용과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사람들이 오스갤러리를 찾는 이유는 주변의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이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가 말한다. “결국 공간을 완성하는 것은 그 안의 사람입니다.” 자식같이 아끼는 마음으로 건축을 했지만, 그 공간의 미학과 철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건축주를 만나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오스갤러리를 통해 사람으로 인해 공간이 살찌는 것도 보았고, 클라이언트가 있는 건축 일을 통해 공간이 피폐해지는 것도 보았다. 소소하게는 취향부터 공간에 대한 철학까지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기에 그는 이제 더 이상 일반 건축 사무실에서 하는 것처럼 일하지 않는다. 학교 시설처럼 공유하는 건축이나, 드물지만 그와 생각이 통하는 지인의 공간 작업이 전부다. “그러니 저는 전문가가 못 되는 것이지요. 건축주가 원하는 집을 지어주고 내 손에서 떠나보내면 그만인 것을….”
2 아원의 한옥을 둘러싸며 지은 현대 건축은 안에서 한옥의 외관을 감상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좌식 다실로 꾸민 방 창밖으로 보이는 고택과 저 멀리 중첩되는 산등성이가 멋스럽다.
3 8년 전 전주 한옥 마을의 한옥 리모델링을 하면서 그는 한옥과 우리 차를 만났다. 아원을 마련하면서 내부 공간을 모두 다실로 꾸몄다. 다실 중앙에 커다란 돌확을 두고 물길을 연결해 운치에 실용성을 더했다.
4 겨울 산의 밤은 눈 깜박하는 사이에 찾아온다. 짧은 순간이지만 산속에서 맞는 초저녁의 정취는 언제나 감동적이다.
자연을 훔친 집, 오스하우스 오스갤러리에서 40여 분 거리의 임실군 운암면. 겨울철 설경이 그만이라는 옥정호를 가슴으로 품은 자리에 그의 두 번째 갤러리, 오스하우스가 있다. “초등학생 때 아버님이 낚시를 하러 자주 오던 곳이에요. 저도 이 자리에서 낚시를 배웠고요. 땅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흥정 한 번 안 하고 부르는 대로 돈을 다 줬어요.” 아버지와 낚시에 얽힌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나 하며 귀를 쫑긋 세우니 의외의 답이 날아든다. “오스갤러리에서 수업료를 톡톡히 치렀거든요.” 오스갤러리를 지을 때만 해도 몰랐다. 사람이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가 더 값지고 아름답다는 것을. 오스갤러리를 지을 때는 울긋불긋 꽃나무를 심기 위해 땅을 돋워 축대를 쌓고 조경수를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 철마다 꽃을 심고 나무를 다듬어 ‘깎은 밤톨처럼’ 정원을 관리해오기 십수 년.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만든 자연’을 바라보니 그렇게 유치해 보일 수가 없었다. 만든 정원은 손댈수록 유치해지고 방치하면 흉물이 되는데, 손대지 않은 자연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손대지 않은 자연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풍광을 품은 땅에 욕심이 날 수밖에. 그는 이곳에 건물을 지으면서 원래의 것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한 지인은 그에게 “당신은 자연을 훔친 남자”라는 말을 남겼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자신은 30년 동안 4천 평 규모의 정원을 손수 일구었는데, 전해갑 대표는 한순간에 대자연을 품 안에 품었으니 말이다.
1 임실군 옥정호숫가에 자리한 오스하우스 2층에 마련한 게스트하우스 전경.
2 오스하우스 앞마당.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자귀나무는 물가에서 자생하는 수종으로 봄이면 흐드러지는 분홍꽃을 선사한다.
우리의 한옥, 아원 4년 전 그는 다시 완주군의 숲으로 향했다. 오스갤러리 근처 산 중턱에 2백50년 된 한옥을 이축하고 현대 건축물을 지어 전통문화 체험 공간 ‘아원’을 마련했다. 한옥과 처음 만난 것은 8년 전, 한옥 리모델링을 하면서다. 현대 건축에서 맛보지 못한 한옥의 매력을 알게 된 그는 고택을 이축하기로 마음먹었다. 5년간 찾아다닌, 1백 년 이상 된 한옥만 30여 채. 드디어 경북 진주에서 2백50년 된 고택을 구했다. “한옥은 풍채가 작아도 웅장한 기개가 있어요. 저 지붕 선과 처마 선을 좀 보세요.” 돌덩어리로 집을 짓는다 한들 저런 힘을 품을 수 있겠느냐며 현대 건축에 비할 수 없는 한옥의 힘을 이야기한다. 보통 한옥을 이축하려면 4~5개월이 걸린다. 그런데 아원은 3년을 소요했다. 이미 70~80년 전에 쌓아 올린 돌담, 50여 년 전에 조성한 대나무 숲 등 집터가 원래 지닌 것들의 훼손을 최소화하려다 보니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옥은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져 있고, ㄱ자 형태의 노출 콘크리트 건물은 안채를 감싸 안으며 구름다리를 통해 대청마루와 연결된다. 한옥에 양옥을 더한 이유를 물으니 “한옥은 실내의 정서도 좋지만 시각적 미감은 외관에 있지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면 알겠지만 이 건물은 실내에서 한옥의 외관을 즐길 수 있도록 지은 집입니다. 동시에 한옥에 없는 부엌과 화장실 공간을 해결했지요. 물론 한옥을 개조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한옥의 깊은 맛은 떨어지니까요”라고 말한다. 안팎에서 한옥의 멋을 충분히 만끽하면서 실용성과 편리함를 겸비한 공간. 전통과 현대의 접목이 참으로 지혜롭다. 조경은 돌담을 따라 차나무 4만 그루를 심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고창의 녹차 밭을 통째로 사서 옮겨 온 것이다. 앞으로 5년 정도 지나면 나무가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해마다 봄이 되면 좋은 차를 즐길 수 있을 것이란다. 1백 50년 된 샘돌도 두고 장독대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연못을 만들고 보니 이 집도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란다. 그는 이 공간을 우리의 정원, ‘아원 我園’이라 이름 짓고 지난 1년 동안 전통문화 교육이나 다도 모임 장소로 오픈했다. “생각해보세요, 이 집이 개인 공간이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지역의 소리꾼이나 장인들이 와서 모임을 갖고 새로운 풍류와 문화를 만들어갈 때 진짜 아름다운 집이 되지 않겠습니까.”
3, 4 아원의 내부 전경.
이제, 세 평이면 충분해 “인테리어요? 비우는 게 비결입니다. 사람들이 집에 대해 물으면 백화점에서 집 안으로 물건 들이지 말라고 합니다. 공간을 비워야 머릿속에도 여백이 생겨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공간이 비어야 그곳의 진짜 주인인 사람이 보입니다.” 전시도 마찬가지란다. “저는 그림도 많이 못 걸게 해요. 전시를 시작하면서 작가들이 10점 걸고 가면 나중에 4점은 몰래 내려요.” 장식이 많은 공간이 실패하듯 전시도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하면 실패하게 마련이란다. “전시와 전시 사이에도 갤러리를 충분히 비워두어야 합니다. 비어 있어야 공간에 맞는 작품을 선택하게 되고, 작가 스스로 공간에서 영감을 받아야 그 전시가 성공하는 법입니다.”
인터뷰 초반에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니 행복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에는 그 말이 ‘가진 것이 많아 행복합니다’로 들렸다. 그러나 그와 함께 꼬박 하루를 보내고 나니 그 행복의 비결은 ‘가진 것’이 아닌 ‘욕심내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진 것이 많아 지켜야 할 것도 많고 잃을 것도 많은, 전전긍긍하는 인생이 한둘이던가. 공간도 마음도 욕심을 덜어내고 비우려는 노력, 아름답고 귀한 것은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마음. 그 삶이 행복한 이유는 바로 가진 것이 많아 나눌 것도 많은 넉넉한 마음 때문이리라.
5 전해갑 대표는 요즘 망가지고 버려진 건축을 되살리는, 일종의 재생 건축에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