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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빠의 여행 계획엔 특별한 것이 있다 딸과 떠나는 인문학 기행
“우린 자녀들을 명품 건축물에 데리고 가서 가르쳐야 한다. 건축가는 건물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인격을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딸에게 이 세상 제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건축 기행을 감행한 건축 평론가 이용재 씨. 그를 가이드 삼아 올여름엔 우리나라의 명품 건축 기행을 해볼 참이다. 명문가의 고택과 성당과 정자를 유람하고 난 그의 딸의 대답처럼 우리 아이들도 ‘마음으로 느끼는 방법’을 배울 게 분명하다.
기 센 가문의 종갓집
충북 보은의 선병국 가옥

보성 선씨. 단일 본. 시조 선윤지는 명나라 문연각 文淵閣 학사로 1382년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귀화. 전라도 안렴사 按廉使(도지사) 부임.
“아빠, 문연각이 머하는 데야?”
“지금의 국립도서관.”
고려는 지방을 5도로 분리해 통치. 5도를 보자.
① 양광도(지금의 충청도) ② 경상도 ③ 전라도 ④ 서해도(지금의 황해도) ⑤ 교주도(지금의 강원도) 조선 건국 후 보성으로 은퇴.
그래 본관은 보성이 되고. 가문을 빛낸 ‘선씨 5충신’을 보자. ① 선형. 1467년 이시애의 난 평정하고 적개공신 敵愾功臣에 오르고. 병조판서, 형조판서 역임. ② 선거이. 선조 때 임진왜란에서 왜군 대파, 정유재란 때 울산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 ③ 선약해.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역임. ④ 선세강. 병자호란 때 안동영장 安東營將(안동 군사령관)으로 광주에서 호군과 격전 끝에 전사. 선윤지와 더불어 이들 5충신은 보성의 오충사 五忠祠에 배향.
“아빠, 적개공신이 머야?” “적을 분연히 쳐부수는 데 큰 공을 세운 신하.”
보성 선씨 참의공파 선정훈(1888~1963)은 호남 제일의 만석꾼. 돈은 됐고. 어라 큰 인물이 안 나오네. 당대 제일의 풍수지리 고수를 찾았다.
“지관 地官 선생, 우째 집안에 큰 인물이 안 나오는감유?” “터가 안 좋네요.” “머라, 가자.” “아빠, 지관은 머야?” “풍수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의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 사람.”
전국 유랑. 속리산 아래 도착. 어라,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인 연화정수형 蓮花淨水形이네. 인물 많이 나오겠군. 1만 평 사들였다. 당대의 목수 구하러 한양 도착. 조선의 목수들은 선공감 소속 1백 명이 최고의 실력자들. 지금의 신문로 구세군회관 건너편 선공감을 찾았다.
“아빠, 그럼 목수가 공무원이었어?” “그럼. 정3품에 오른 목수도 있었어.”
나라는 망해가고. 도편수 한 명을 꼬셨다.“야, 너 이제 잘릴걸. 보은 가자. 지금 월급의 더블 줄게.” “감사합니다, 대감.”

(오른쪽) 안채 현판에는 ‘위선최락(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전각이 새겨져 있다.


1 보성 선씨 종갓집인 이 가옥은 호남 제일의 만석꾼 선정훈이 23년 동안 속리산 적송으로 공들여 지은 집이다. 현재 21대손인 선민혁 씨가 살고 있다.

속리산을 뒤져 적송을 찾았다. 나라가 망해가는 관계로 베는 사람이 임자. 메고 이고 현장으로 갖고 내려와 천막을 쳤다. 1년 6개월간 그늘 아래서 건조. 다 터지고 갈라질 때까지 기다린다. 인고의 세월. 1925년 완공.그럼 공사 기간만 23년. 장난이 아니군.
짓다 보니 제한 칸 수인 99칸. 머라, 우리 애들을 왜놈들이 가르친다고라. 직접 가르치겠다. 1926년 서당인 35칸의 관선정 觀善亭(선함을 관조하는 집) 건립. 이제 1백34칸. 동네 아그들도 무료로 가르치고. 빨리 자라 나라를 일으키거라. 머라, 한글만 가르쳐! 1944년 왜놈들이 강제 철거. 그나마 깊은 계곡의 서당이라 오래간 거다. 우리 시대의 한학자 임창순은 1927년부터 6년간 이 관선정에서 성리학자 홍치유에 사사. 1974년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에 한문 서당인 지곡정사 芝谷精舍 설립, 관선정의 대를 잇는다. 선생의 유언은 이렇다. 매일생한불매향 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역시 세군.
“아빠, 지곡정사는 머야?” “깊은 골짜기에서 버섯이나 기르면서 도 닦는 집.”
딸과 함께 법주사 들렀다가 선병국 가옥을 찾았다. 1984년 중요민속자료 134호로 지정될 때 20대손인 선병국이 살고 있어서 선병국 가옥으로 불리고 있지만 지금은 21대손인 선민혁이 주인. 입이 쫙 벌어지는 장대함.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는. 마당에 장독대 즐비. 21대 종부 김종옥은 2006년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전’에 덧간장(햇간장 만들 때 넣는 묵은 간장) 1리터 전시. 5백만 원에 팔렸다. 간장 한 병에 5백만 원이라고나. 3백50년 된 간장이라. 4천 평의 이 집은 주택이라기보다 하나의 마을 규모.

2 사랑채에서 본 앞마당.


3 21대 종부인 김종옥 씨가 1백 년을 이어온 종갓집 간장 맛을 이어가고 있다. 3백50년 된 귀한 씨간장독 때문에 장독대 앞에 문을 만들어놓았다.


4 종갓집과 지척에 있는 별채 역시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먼저 H 형태의 사랑채. 밀려드는 탐방객들에게 차라도 한잔 대접하려고 1998년 찻집을 열었다. 찻집 이름은 ‘도솔천’. 미륵불이 살고 계신 극락. 여기 절이야 주택이야. 헷갈리는군. 기단은 다듬은 화강석. 어라, 원형 기둥까지. 개인 주택에 사용할 수 없는. 아 참, 나라가 망했지. 5천 원짜리 대추차를 시켰다. 시원. 사방에서 바람이 들락날락허니. 서빙은 주인 마나님이. 영광. 저기 인터넷 보니까 무량수각 无量壽閣이라는 현판이 여기 걸려 있었던 거 같은데. 도둑이 훔쳐 갔어요. 머라. 완당의 모조 현판이라 그나마 다행.
“아빠, 무량수각이 머야?” “영원히 사시는 아미타불의 집.”
제2 영역인 안채로 들어갔다. 몰래. 역시 H형 평면의 우람한 전각. 현판은 이렇다. 위선최락 爲善最樂. 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 딸, 외워라.
1백 미터는 됨직한 기다란 행랑채는 1995년 고시촌으로 변신. 이곳을 다녀간 고시생만 4천 명. 종부는 매일 30여 명의 고시생들에게 유기농 식사 제공. 전국 최고의 합격률을 자랑한다는 소문. 관선정이 다시 살아난 거다.
“아빠, 요새는 고시 합격해도 취직 안 된대.” “그러니 넌 남들 안 하는 거 해라.” “그게 먼데.” “독서 열심히 하다 보면 나올 거야.” “알았어.” “이번 주 책은 최인훈의 <광장>이다.” “다 읽으면 만 원 줄 거지?” “당근.”
뒷마당에 제3 영역인 사당. 선조를 모시면서 미래를 대비하는 센 집안. 보은군은 최근 62억 원을 투자, 선병국 가옥 인근에 대추테마공원 조성에 들어갔다. 선병국 가옥 덕에 보은군 좀 떠보자, 뭐 이런 거다.

Travel info
위치
충북 보은군 보은읍 외속리면 하개리 구병아름마을의 99칸 전통 고가옥
주변 관광지 대한민국 팔경 중 하나인 속리산, 1680m에 이르는 신라시대의 석축 산성인 삼년산성, 553년(신라 진흥왕 14년)에 창건한 법주사, 서원계곡과 만수계곡 등 함께 둘러볼 만한 관광지가 많다. 특히 속리산과 법주사는 조금만 부지런하게 나서면 하루 여정으로도 돌아볼 수 있는 코스다.
숙박 레이크힐스호텔 속리산(043-542-5281, www.lakehills.co.kr), 속리산파크 호텔(043-543-3900, www.snspark.com) *그 밖의 구병아름마을 정보는 www.sulsul.org(구병아름마을) 또는 www.tourboeun.go.kr(보은관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너른 바위’라는 뜻의 나바위마을에 1906년 지은 나바위성당.

천주교와 유교가 함께하는 성당
전북 익산의 나바위성당
1841년 사제 서품을 받은 파리외방전교회의 다블뤼(1817~1866)는 전교 傳敎 신부가 꿈이다.
“아빠, 전교가 머야?” “전 세계를 다니면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신부. 목숨 걸고.”
1845년 마카오에서 목선 라파엘호를 탄다. 어라, 김대건 신부도 타고 있네. 자네 여기 웬일인가. 1845년 김대건은 제물포항에서 라파엘 타고 중국 상해로 넘어간다. 금가항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대한민국 1호 신부가 된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블뤼를 만난 거다. 제주도 들렀다 42일 만에 전북 익산 근처 나바위 도착. 거 참, 산이 예쁘군.
“이 산 이름이 머냐?” “화산 華山이옵니다.” “꽃으로 뒤덮인 빛나는 산이라. 역시. 산 이름은 누가 지었대냐?” “우암 송시열이옵니다.” “역시 왔다 가셨군.” “아빠, 나바위가 머야?” “너른 바위.”
1846년 선교사의 안전한 입국을 위한 비밀 항로를 찾아 나섰다가 백령도에서 체포. 새남터에서 사형. 이제 27세. 대한민국 최초의 신부는 이렇게 가고. 신화가 되나니. 역시 갈 때 잘 가야 된다니까. 김대건 신부의 귀국선 라파엘호는 지금 제주도 용수리 하멜표류기념관에 복원 전시 중. 11명이 타고 온 작은 나룻배. 이걸 타고 바다를 건넜다고라.
“딸아, 이런 작은 한 척의 배를 일엽편주라고 한단다. 외워라.” “아빠, 김대건 신부 본관은 어디야?” “김해.” “엄마랑 같네.” “응.”
죽인다고 사랑이 멈추나. 파도는 계속 치는 법. 그래 또 죽여라. 넌 안 죽나 보자. 대원군.
1887년 사제 서품을 받은 파리외방전교회의 베르모렐 신부에게 전화가 왔다. 야, 서울로 가라. 예. 근데 서울이 어디 있는 도시지. 6개월 만에 백령도 도착.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비밀 항로. 나룻배 타고 제물포 잠입 성공. 용산신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친다. 얘들아 조선은 백 년 후 올림픽을 개최할 위대한 나라란다. 열심히 갈고 닦아라. 신부님 백년 후를 어떻게 아세유. 내가 점을 좀 보걸랑. 전라도가 시끄럽다. 한 맺힌 동네. 1897년 전화가 왔다. 1년 선배인 보두네(1859~1915) 신부는 “전라북도의 북쪽, 너는 남쪽을 평정해라.” “예.” 당나귀 타고 출발.


1, 3 서양의 고딕 건축 양식에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의 나바위성당. 처음 지었을 때 흙으로 메웠던 벽을 뜯어내고 벽돌을 채웠다.


2 나바위성당 뒤편 암반 위에 있는 김대건 신부 순교비.

“얘들아, 이 지역에 극적인 드라마를 간직한 동네가 어디냐?” “43년 전 김대건 신부가 몰래 입국한 나바위인디유.”
머라. 가자. 음, 죽이는군. 금강도 내려다보이고. 본국에 전화. 천 냥만 보내주세유. 동학운동 때 망한 김여산의 초가집 사들여 성당을 차린다. 현판을 걸었다. 나바위성당. 소문이 났다. 라파엘호가 도착한 나바위. 헌금은 밀려들고. 역시 터가 좋아야 돼. 건축도 그렇고.
명동성당을 찾았다. 음 고딕이군. 포아넬 신부님, 설계도 좀 주셔유. 좀 베끼게. 그러지 머. 돈은 모자라고. 나무 기둥을 대충 세웠다. 직사각형 단순한 평면.
“신부님, 저희는 남녀칠세부동석이걸랑요.” “머라, 그게 먼데?” “아이가 여섯 살이 되면 수와 방향의 이름을 가르치고, 일곱 살이 되면 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여덟 살이 되면 소학에 들어가야 되걸랑요.” “그러지 머.”
그 지역의 문화에 관여하지 않는 게 외방전교회의 법. 중앙에 기둥을 죽 세우고 칸막이 설치. 좌측은 남자석, 우측은 여자석. 입구도 따로. 지금도 이 법을 따르고 있다. 칸막이는 제거했지만. 천주교와 유교가 함께하는 위대한 성당.
“아빠, 왜 남자가 좌측이야?” “좌고우저. 좌가 더 높은 법. 그래 종묘도 근정전 좌에 있고.”“왜 남자가 더 높아야 돼?” “아님 말고.” “신부님, 지붕엔 뭘 얹죠. 명동성당엔 동판 얹었던데.” “돈 없다. 기와 얹어라.”
토착적인 재료. 늘 보아왔던 친근한 재료. 값도 싸고. 고딕에 기와지붕이라. 팔작지붕도 있고. 죽이는군. 이거 절이야 성당이야! 예수와 부처의 사랑이 넘나들고. 허긴 종교엔 국경이 없으니.
“신부님, 벽은 뭘로 채우죠. 명동은 벽돌로 했던데.” “돈 없다. 흙으로 메워라.”
외벽인지 담장인지 헷갈리고. 아무려면 어떠랴. 정성이 있으면 그만. 10년 만에 완공. 1906년 축성식. 난리가 났다. 사상 초유의 짬뽕 건축. 그러면서 단아하니.
“아빠, 중국에 가니까 짬봉 없던데.” “우리 입맛에 맞게 만든 거야.” “그럼 이 성당도.” “맞아. 우리 문화에 맞게 만든 거야.”
나이 1백3세. 1907년 계명학교 설립. 아그들 가르친다. 하늘 천 따지. 교육은 백년대계 百年大計.
“아빠, 백년대계가 머야? 많이 들었는데.” “먼 앞날까지 미리 내다보고 세우는 중요한 계획.” “계명학교는 천주교 가르치는 데 아니야?” “아니. 천주교는 강제하지 않아.” “기독교는 월급의 10퍼센트를 헌금해야 되지?” “응.” “그럼 천주교는!” “각자 맘.” “안 내도 돼?” “응.” “눈치 주는 거 아냐?” “아니.” “그래서 성당이 가난하구나!” “응.”
1912년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나바위를 찾았다. 음. 풍광이 죽이는군. 나 여기서 피정 避靜할게. 그러시죠 머.



4 건축 초기, 외방전교회의 법에 따라 중앙에 기둥을 세우고 칸막이를 설치했다. 좌측은 남자석, 우측은 여자석. 지금은 칸막이는 철거했지만, 앉는 자리만큼은 아직도 옛 법을 따르고 있다. 천주교와 유교와 함께하는 성당.

“아빠, 피정이 머야?” “속세에서 벗어나 묵상 默想하는 거.” “묵상이 먼데?” “마음으로 생각하는 거.”
주교님 돌아가시자 누각 신축 착수. 나바위에 천막 치고 피정하게 하실 순 없고. 담양 면앙정을 찾았다. 음 죽이는군. 스케치. 베껴야지. 몰래. 나바위 위에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기둥 세우고 기와를 얹었다. 1915년 주교님이 다시 찾았다.
“어라, 죽이네. 이 정자 이름이 머냐?” “없는디유.” “그럼, 망금정 望金亭이라고 하자.” “먼 뜻인지.” “너 아직 천자문 안 떼었냐!” “지금 바빠서.” “야, 너 놀지 말고 공부 좀 해라. 금강을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이다.” “아, 예.”
1916년 흙벽 뜯어내고 벽돌을 채웠다. 적벽돌은 구조재, 회색 벽돌은 장식재. 심플. 원래 명작은 단순한 법. 자연과 함께하면 그만. 1931년 베르모렐 신부 이미 72세. 은퇴. 28세에 이 땅을 밟은 지 44년 동안 나바위를 지켜온 분.
“신부님,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시죠?” “됐다. 내 조국은 대한민국.”
성바오로 수녀원 지도 신부로 취직. 양로원. 6년 동안 고아들 또 가르친다. 얘들아 꿈을 잃어서는 안 된다. 지금 힘든 건 좋은 일이 생기려고 그러는 거걸랑. 1937년. 너무 오래 살았군. 선종. 77세. 베르모렐 신부님에게 대통령 훈장을 주자, 훌라 훌라.
1935년 왜놈 순사들이 계명학교를 찾았다.
“너네 정말 신사참배 안 할 거야?” “배 째셔유. 불사이군. 우리에겐 주님뿐.” “야, 지금 전국에서 2백만 명이 매년 참배에 나서고 있걸랑.” “남들 다 하는 건 우린 안 함.”
당시 신사참배에 나섰던 인간들은 고해성사하라, 훌라 훌라. 후손들은 반성하고. 안 하면 말고.
신부, 수녀, 신자 전부 구속. 학교 폐쇄. 그런다고 지구가 안 도나. 머 이런 거다. 1955년 성 김대건 신부 순교비 건립. 1991년 피정의 집 건립. 사적 제 318호.

5 1912년 누각을 신축했다.

Travel info
나바위성당은 화산천주교회의 초창기 명칭이다.
위치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나바위(羅岩) 부락 숙박 1시간 거리의 전주한옥마을에서 한옥 숙박을 체험할 수 있는데, 특히 양사재(063-282-4959, www.jeonjutour.co.kr), 한옥생활 체험관(063-287-6300, www.jjhanok.com), 학인당(063-284-9929) 등이 추천할 만하다. 그 밖에 나바위성당 정보는 www.nabawi.or.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용재 는 건축 평론을 전공하고 잡지사 기자로, 건축 전문출판사 주인장으로 살았다. 1991년 외동딸을 얻은 후 펜을 꺾고 산업 현장에서 뛰다 전업주부로, 문화재 답사하는 남자로, 건축 현장 감리로 살았다. 2002년부터 도사들 추천으로 택시 운전을 하다 지금은 전업작가로 살면서 <좋은 물은 향기가 없다> <딸과 떠나는 국보 건축 기행> 같은 ‘의미 있고 재미있는’ 책을 냈다.

* 이 기사는 이용재 씨의 새 책 <딸과 떠나는 인문학 기행>(디자인하우스)에서 발췌, 구성한 것입니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