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현 작, ‘암묵적 관계들’, 캔버스 위에 오일, 2007
“오늘은 새벽 3시에 일어났어요. 작업실에 가서 작품 하나 완성하고 동네 목욕탕에 들러 씻고 오니 아이들이 등교 준비를 하더군요. 함께 아침 먹고 학교에 데려다 주고 왔지요.” 한동안 작업실을 찾지 않았는데, 요즘은 작업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며 활기찬 목소리를 들려주는 가구 디자이너 이종명 씨. ‘작업복을 입으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그는 요즘 들어 20여 년 전 대학원 시절의 열정을 다시 찾은 것 같단다.
경기도 오포시 전원 마을에 있는 그의 집은 이 세상의 모든 색을 다 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티스의 ‘붉은 방’을 떠올리게 하는 현관이 나온다. 복도로 들어서면서 마주하게 되는 다이닝 룸에는 상큼한 오렌지색 벽을 배경으로 풀빛 식탁이 놓여 있다. 집 안 곳곳에서 무지갯빛 스펙트럼과 마주치게 된다. 높은 천장고와 커다란 창으로 전해지는 햇살 덕분일까? 복잡하거나 현란하다는 느낌 없이 그저 기분 좋은 에너지가 전해진다. 3년 전 이사 오면서 그가 직접 설계하고 디자인한 이 집은 아기자기하고 풍부한 색감이 돋보이는 ‘이종명 가구’의 확장판이다. 색에 대한 그의 표현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섬세하고 구체적이다. “상큼한 녹색을 보면 파리 여행의 추억이 떠올라요. 화창한 봄날 샹젤리제 거리를 거닐다 올려다본 하늘 아래로 투명하게 반짝이던 플라타너스 잎사귀의 싱그러운 빛깔…. 그 순간의 햇살과 바람결까지 그 감흥이 되살아나지요.” “잿빛을 시간으로 치자면 겨울의 오후 네 시예요. 쓸쓸함과 서늘함이 전해지고 몸과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죠. 여름의 오후 네 시에는 절대 느낄 수 없는.”
1 이종명 씨가 직접 설계하고 디자인한 이 집은 세상의 모든 색을 다 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들 방으로 통하는 복도는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등 밝고 따뜻한 느낌의 원색으로 마감했다.복도가 어두운 공간이 되지 않도록 천장에 창을 낸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2, 3 핸드 페인팅의 매력을 보여주는 이종명 씨 작품.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디테일의 핸드 페인팅 장식은 그의 집에서도 빛을 발한다.
4 다이닝 룸 창가 풍경. 올리브색 벽과 붉은색 창문처럼 화려한 보색 대비를 집 안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색 하나하나에서 이렇듯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찾아내는 걸 보면 그는 천생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그에게 색은 경험이고 추억이다. 다양한 경험과 감성이 색과 연계되어 그에게 더 넓은 세상을 열어주고 감성에 깊이를 더해준다.
세상의 색은 모두 아름답다. 색에 대한 취향이 있을 뿐이지 정답은 없다. 그의 생각이다. “이론은 이론일 뿐이지요. 색을 선택할 때는 느낌을 따르면 됩니다. 저는 보통 ‘편안한 색’이라고 말하는 중립적이고 은은한 색의 공간에 있으면 게을러지는 것 같아요. 하루 정도 지나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다양한 원색이 담긴 공간에서는 활력을 얻을 뿐 아니라 몸도 마음도 편해져요.” 색에 대해 편견이나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며 색을 다양하게 접하다 보면 각각의 색이 지닌 에너지와 감성, 그리고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스스로 알게 된다고. 그는 색을 통해 포용력과 이해심을 배웠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색은 다 고유의 아름다움과 존재 이유가 있으니, 이를 우리 인생에 대입해보면 세상살이에서 이해 못할 것이 별로 없단다.
가구 디자이너로, 결혼 10년 차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로 지금껏 살아오면서 해보고 싶은 것은 다 해보았단다. 무엇이든 과감하게 도전했고 한번 시작한 것은 언제나 끝을 보았다. 색으로 치면 “나는 화끈한 원색”이라는 그는 올겨울을 작업실에서 보낼 예정이다. 다가올 봄, 서울리빙디자인페어를 시작으로 일본 등 해외로 활동 무대를 넓혀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세계적인 불황을 우려하며 모두가 몸을 웅크리고 행동반경을 좁히려는 이때, 그는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 있다. 그 열정을 그의 방식대로 표현해본다면, 한겨울 눈밭에 피어 있는 백일홍의 붉은빛이 아닐까 싶다.
1 이종명 씨의 그릇장은 알록달록한 캔디 컬러의 핸드 페인팅 그릇으로 가득하다.
이종명 씨의 컬러 선택 노하우
색을 선택할 때는 이론적인 체계를 참고하기보다 우선 자신의 본능에 따른다. 사람들은 대부분 후회할까 두려워 과감하게 색을 선택하지 못하는데, 만약 후회가 된다면 다시 바꾸면 그만인 것. 기본적으로 시선이 오래 머무는 곳은 편안한 색으로, 시선 뒤쪽은 강렬한 색으로 마감한다. 예를 들면 TV가 놓인 벽에는 크림색을, 소파 뒤 벽에는 초콜릿색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듯 악센트 컬러는 시선이 순간적으로 머무는 곳에 사용하는 것이 좋다. 거실은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곳이므로 차분하고 무난한 색으로, 반면 부엌은 과감하고 경쾌한 색으로 생기 있게 꾸민다. 침실은 잠과 휴식을 위한 공간인 만큼 어둡고 차분한 색을 선택한다. 벽을 원색이나 짙은 색으로 마감하려면 바닥재는 어두운 색을 선택해야 안정감 있는 공간이 연출된다.
2 그가 요즘 작업하고 있는 디자인 시리즈의 콘솔. 천 조각을 이어가며 퀼트를 하듯 나뭇조각을 하나하나 붙여가며 만들었다.
3 TV 뒤 벽의 벽화는 지난해 여름에 그린 것이다. 원래는 크림색 페인트로 칠한 벽이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밋밋해 보여 갑자기 붓을 들고 그려낸 그림이다.
4 가구 디자이너 이종명 씨. 왼쪽에 있는 대형 거울은 최근 완성한 것으로, 작업실에서 돌아오면 자꾸 보고 싶어 아예 집으로 옮겨놓았다.
5 정원 한구석에서 발견한 겨울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