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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맛있다! 99칸 종갓집 김장하는 날
사계절 내내 채소를 구할 수 있어 김치의 계절적 특성도 사라지고 김장의 필요성도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김장은 주부들의 초겨울 이벤트다. 감나무 아래 배추 포기가 산처럼 쌓이니, 고즈넉한 99칸 한옥 종갓집이 떠들썩해졌다. 김장 풍경 속에서 마법과도 같은 김치 맛의 비밀을 푸는 여덟 가지 말을 건져 올렸다.종부에게 손맛의 비결도 들어보았다.

(오른쪽) 절인다
“동네에서 재배한 유기농 배추를 3년 이상 묵힌 천일염으로 절입니다.”
‘절인다’는 옷에 땀이 절고 아기들 바지가 오줌에 절며 님 멀리 두고 그리다가 마음에 사랑이 저려오듯이 ‘서서히 조금씩 간이 배게 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배추의 거친 겉잎을 떼어낸 뒤 밑동의 중간 정도까지 칼집을 넣고, 양손으로 칼집 넣은 부분을 벌려 쪼개야 씻을 때 배춧잎 부스러기가 적게 떨어져 나온다. 반으로 쪼갠 배추 가운데에 칼집을 한 번 더 넣는다. 배추를 소금물에 담갔다 꺼내어 줄기 사이사이에 굵은소금을 조금 더 뿌린다. 자른 면이 위로 오도록 놓고 소금물에 잠기게 해서 하룻밤 절인다. 중간에 한 번 뒤집어준다.


(왼쪽) 다듬고 씻고 간다
“김장은 재료를 준비하는 게 반이에요. 동네에서 재배한 신선한 것만 씁니다.”
외국의 요리 용어에는 ‘다듬는다’는 말이 없다. 다듬는 것은 음식 만들 때 정성을 들이는 첫 과정이다.
무, 갓, 쪽파, 미나리, 양파, 마늘, 생강… 푸성귀는 낱낱이 사람의 손으로 시든 잎을 떼고 뿌리를 무질러내며 이물을 골라내고 ‘다듬어서’, 깨끗하게 ‘씻는다’. 우리 조상들은 김치를 담글 때 모든 푸성귀는 세 벌 씻고도 맑은 물에 여러 번 헹구는 게 관례였다. 주요 양념인 마늘과 생강은 다지는 것도, 으깨는 것도, 절구로 빻는 것도 아닌, 돌확에 ‘갈아’ 넣었다. 재료를 파쇄 破碎하는 방법의 차이에서 나는 미각의 차이에도 민감해 조리마다 구분해 썼기 때문이다.

(오른쪽) 달인다
“김치 맛은 젓갈에서 나옵니다. 젓갈을 달여 쓰면 여름에 담근 김치도 김장 김치처럼 깊은 맛이 나지요.”
아궁이에 가마솥을 걸고 불을 지핀 뒤 멸치액젓을 붓고, 양파・마늘・생강을 통째로, 파를 뿌리째 넣고 끓여 달인다. 액젓을 서너 시간 이상 푹 달여서 멸치 뼈만 남게 되면, 자배기 위에 나무막대 두 개를 걸쳐놓고 그 위에 체나 시루를 올린 뒤 한지로 액젓을 밭는다. 이 댁 김치에는 배추 절일 때 말고는 소금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데, 이렇게 정성껏 달인 액젓과 새우젓으로만 간을 맞추기에 맛이 깊고 개운하다.


(왼쪽) 썬다
“무채를 채칼로 썰면 맛이 없어요. 손으로 직접 썰어야 김치의 맛도 모양도 좋아지니, 참으로 신기하지요.”
배추김치 소의 주재료인 무채는 크고 작음 없이 가지런히, 가늘게 썰어야 한다. 썰기로 치차면 미세성, 균제성, 정확성에서 한국 사람 따라갈 민족이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모든 김치는 칼을 대지 않고 통째로 담그는 것이 원칙이었다.발효는 신명이 좌우하는 신비스러운 과정이어서 쇠가 닿은 것이 있으면 신명이 노하거나
싫어해 음식이 제대로 안 된다는 신앙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궁중에서는 김장할 때 무를 자르거나 무 껍질을 긁는 데 쇠칼 대신 대나무칼을 썼다.

(오른쪽) 버무린다
“소 버무리는 데도 순서가 있습니다. 무채에 고춧가루를 먼저 섞고, 미나리는 맨 마지막에 넣으세요.”
김치 맛의 오묘함은 소의 배합에 따른 마술에서 나온다. 마술의 효소인 배추 소의 양념은 지역마다 집집마다 재료와 배합이 달라 다양한 김치 맛과 개성을 만들어낸다. 우리 전통 사회의 집안은 다른 가문과는 맛이 다른, 개성 있는 장맛과 김치 맛을 하나씩 지녀야 양반가문으로 행세했다. 이 댁에서는 무채에 고춧가루를 먼저 섞고, 액젓(끓여서 한지에 거른)과 새우젓을 넣은 뒤 간 마늘・간 생강・간 양파・찹쌀풀・갓・쪽파를 넣어 고루 버무린다. 미나리는 가장 마지막에 넣어야 향이 살고, 여기에 배를 채 썰어 넣으면 깔끔하고 시원한 맛이 더해진다.


(왼쪽) 담근다
“절인 배춧잎을 두세 장씩 들추면서 소를 넣고, 반으로 오므려 접어 마지막 겉잎으로 잘 감싸야 합니다.”
절인 배추에 소를 만들어 넣고 독 속에 차곡차곡 쟁이는 과정을 ‘담근다’고 한다. 김치는 익을 때의 숙성 온도, 배추를 절인 소금 농도 외에 켜켜이 넣는 소의 질과 양 그리고 버무리는 솜씨에 따라 맛깔이 달라져 가문의 개성이 우러나오고, 안주인의 손맛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 오묘한 ‘담금’의 마술을 말이나 글로써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으랴.

(오른쪽) 나눈다
“김장하는 날은 잔치 분위기예요. 고기도 삶고, 떡도 찌고, 가마솥에 사골된장국도 푹 끓이지요.”
동네에서 누구네 집에 잔치가 있거나 김장을 할 때면 서로서로 품앗이를 하는 따뜻한 풍습이 있다. 이웃 아낙들이 일을 거들러 오면 먼저 그들을 융숭히 대접하는 것이 순서였다. 김장하는 날은 배를 통째로 넣어 푹 삶은 돼지고기 수육, 절인 배추와 쪽파에 오징어를 다져 넣고 부친 배추전, 생굴과 배를 넣고 매콤하게 버무린 배추겉절이, 사골우거지된장국이 빠지지 않는다. 녹두고물을 얹어 방금 쪄낸 호박고지찰떡이나 무시루떡까지 곁들인다면 소박하지만 넉넉한 김장 만찬이 된다.


(왼쪽) 갊는다
“독에 김치를 담을 때는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꾹꾹 눌러 담고, 큰 배춧잎으로 덮어줘야 합니다.”
‘갊다’는 ‘감추다, 저장하다’의 옛말. 김치를 알맞게 갊는 데 가장 좋은 그릇은 독이다. 알맞게 삭힌 김치에서 좀 더 삭히는 과정이 진행되면 시어지는 단계에 이른다. 이 산패를 장시간 막아주거나 연장시켜주는, 조상들의 독창력이 잘 드러난 것이 대형 질그릇인 독이다. 질그릇은 덥고 차가운 외기의 전도를 가장 완벽하게 차단하는 성질이 있어, 일정 온도를 유지하는 데 가장 적당한 용기다. 김치는 영하로 보존하는 것이 이상적이나
4℃를 유지해도 석 달까지는 산패를 면할 수 있다. 이 김치 보존 상한 온도를 가장 가깝게 유지하는 것이 응달에 놓인 독이다.

(오른쪽) 묻는다
“저희 한옥은 아예 방 하나가 독만 묻어놓은 ‘장광’이었어요.
큰 수해 때 그 방에 흙이 가득 차 장광을 없애버린 게 가장 후회되는 일입니다 .”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추위를 차단하는 열전도율이 가장 낮은 건재가 바로 흙이다. 음식을 장기간 맛의 변질 없이 보관하는 방법으로 흙의 단열 효과를 십분 활용한 것이 바로 ‘묻음’의 지혜다. 음식이나 곡물 등 부패 가능성이 있는 식품을 보관하는 창고를 ‘도장’이라 하는데, 바로 흙으로 만든 보관 가옥이란 뜻의 ‘토장土欌’에서 유래한 말이다. 우리 조상들은 좀 일찍 먹을 김칫독은 장독대 응달에, 그보다 늦은 겨울에 먹을 김칫독은 도장에, 그리고 겨울에 내어 봄에 먹을 김칫독은 땅에 묻었다. 땅에 묻은 김칫독 위에는 짚을 덮어 보온・보습・통풍 효과를 더했다.

구선숙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