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실. 영어로는 bedroom. 불어로는 chambre _ coucher. 사전적 의미로는 침대가 있는 방이며 잠을 자는 방이다. 그러나‘침실’이란 단어에는 왠지 불온한 상상이 스며 있다. 침실이란 단어가 밤과 연관이 있어 그럴까. 소녀 시절, 침대가 있는 ‘나의 방’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왠지 ‘침실’이란 단어는‘나와 너의 공간’이란 생각이 들게 했다. 미래의 누군가를 꿈꾸기 시작하면서 침실은 상상 속의 공간으로 떠올랐다. 교과서에 실린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란 관능적인 시를 외우며 나 또한 나의 마돈나를 애타게 불렀다.
‘마돈나’ 마돈나 언젤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내 침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그 속뜻이야 어떠하든, 아름다운 마돈나를 침실로 데려가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만큼 노골적인 ‘작업시(?)’는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했다. 침실이란 당연히 잠을 자는 곳이지만, 누구와 자느냐에 따라 역사도 움직일 수 있는 곳이다. 세계 역사를 움직인 것은 남자지만 그 남자를 움직인 것은 간혹 침대 속의 여자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는 야사夜史가 있으며, 정사正史뿐 아니라 정사情事도 포함이 된다. 오죽하면 베갯머리 송사訟事란 말이 있을까.
(왼쪽) 침대는 인피니(02-3447-6000) 제품으로 부드러운 가죽으로 곡선미를 살린 헤드 보드가 매력적이다.
그만큼 침실은 단순히 인간의 육체를 쉬게 하는 공간이면서도, 다양하고 드라마틱한 인간의 삶을 잉태하는 곳이기도 하다. 침대가 무생물이니 망정이지, 만약 침대에 입이 있다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아마도 말 없는 침대는‘나는 네가 지난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프랑스 소설가 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내 침실을 둘러싼 여행>이란 작품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것을 침대는 보고 있다. 침대는 옮겨다니는 무대이며, 인간은 차례로 나타나는 흥미진진한 연극, 우스꽝스러운 익살극, 두려움에 떨면서 비극을 연출한다. 갖가지 꽃을 장식한 요람이며, ‘사랑의 신’의 옥좌이며 분묘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침대 위에서 태어나 침대 위에서 생식을 하며 침대 위에서 임종을 맞는다. 이렇듯 인간의 삶과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 침실의 의미는 시대나 나라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로마인은 다양한 용도의 침대로, 3인분 식사용 침대인 트리크리니움 triclinium이나 몇 개의 테이블이 딸린 6인용 침대로 부를 과시하기도 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상류 귀족층의 침대가 사회적 성공의 상징으로서 교제를 위해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세기가 되어서야 ‘잠자는 침대’로서 은밀하고 사적인 공간이 된 듯하다. 당시의 프랑스 작가 위스망스는 “침실을 만드는 데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침실은 욕정을 자아내게 하는 알코브, 밤의 열락의 장으로 만들든가, 고독과 휴식의 장소, 사색의 안식처, 일종의 기도실로 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현대에 침실의 의미는 무엇일까? 프랑스인들은 침대에서 할 수 있는 일로 잠자는 일은 별도로 치더라도, 63%(그중 84%는 25세에서 44세까지의 부부이다)가 무엇보다도 섹스를 들었다. 잠자리에 들어서 책을 읽는 사람이 53%, 음악을 듣는 사람이 31%,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이 26%,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이 24%였다. 전화를 하는 사람은 11%였는데 그중 24%는 18세에서 24세였다고 한다.
이렇듯 침실의 용도가 다양해졌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디까지나 침실은 이상화의 시처럼‘부활의 동굴’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매일 우리는 침실에서 잠이라는 작은 죽음 속으로 들어가며 새날이 밝으면 다시 살아난다. 어쨌든 편안한 한 밤의 무덤이면서도 인간 생명의 충전소가 바로 침실이 아닐까?
‘마돈나’ 마돈나 언젤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내 침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그 속뜻이야 어떠하든, 아름다운 마돈나를 침실로 데려가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만큼 노골적인 ‘작업시(?)’는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했다. 침실이란 당연히 잠을 자는 곳이지만, 누구와 자느냐에 따라 역사도 움직일 수 있는 곳이다. 세계 역사를 움직인 것은 남자지만 그 남자를 움직인 것은 간혹 침대 속의 여자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는 야사夜史가 있으며, 정사正史뿐 아니라 정사情事도 포함이 된다. 오죽하면 베갯머리 송사訟事란 말이 있을까.
(왼쪽) 침대는 인피니(02-3447-6000) 제품으로 부드러운 가죽으로 곡선미를 살린 헤드 보드가 매력적이다.
그만큼 침실은 단순히 인간의 육체를 쉬게 하는 공간이면서도, 다양하고 드라마틱한 인간의 삶을 잉태하는 곳이기도 하다. 침대가 무생물이니 망정이지, 만약 침대에 입이 있다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아마도 말 없는 침대는‘나는 네가 지난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프랑스 소설가 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내 침실을 둘러싼 여행>이란 작품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것을 침대는 보고 있다. 침대는 옮겨다니는 무대이며, 인간은 차례로 나타나는 흥미진진한 연극, 우스꽝스러운 익살극, 두려움에 떨면서 비극을 연출한다. 갖가지 꽃을 장식한 요람이며, ‘사랑의 신’의 옥좌이며 분묘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침대 위에서 태어나 침대 위에서 생식을 하며 침대 위에서 임종을 맞는다. 이렇듯 인간의 삶과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 침실의 의미는 시대나 나라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로마인은 다양한 용도의 침대로, 3인분 식사용 침대인 트리크리니움 triclinium이나 몇 개의 테이블이 딸린 6인용 침대로 부를 과시하기도 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상류 귀족층의 침대가 사회적 성공의 상징으로서 교제를 위해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세기가 되어서야 ‘잠자는 침대’로서 은밀하고 사적인 공간이 된 듯하다. 당시의 프랑스 작가 위스망스는 “침실을 만드는 데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침실은 욕정을 자아내게 하는 알코브, 밤의 열락의 장으로 만들든가, 고독과 휴식의 장소, 사색의 안식처, 일종의 기도실로 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현대에 침실의 의미는 무엇일까? 프랑스인들은 침대에서 할 수 있는 일로 잠자는 일은 별도로 치더라도, 63%(그중 84%는 25세에서 44세까지의 부부이다)가 무엇보다도 섹스를 들었다. 잠자리에 들어서 책을 읽는 사람이 53%, 음악을 듣는 사람이 31%,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이 26%,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이 24%였다. 전화를 하는 사람은 11%였는데 그중 24%는 18세에서 24세였다고 한다.
이렇듯 침실의 용도가 다양해졌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디까지나 침실은 이상화의 시처럼‘부활의 동굴’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매일 우리는 침실에서 잠이라는 작은 죽음 속으로 들어가며 새날이 밝으면 다시 살아난다. 어쨌든 편안한 한 밤의 무덤이면서도 인간 생명의 충전소가 바로 침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