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미를 살려 디자인한 천년전주명품 온의 부스. 아트디렉터 김백선 씨는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한가로이 산책하듯 걸을 수 있도록 부스를 구성했다고 말한다.
천년전주명품 온 브랜드 사업단은 전주에 있는 무형문화재 아홉 명의 작품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을 추진해왔는데, 작년 10월부터 디자이너 김백선 씨가 이 사업의 아트디렉터를 맡고 있다. 이번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의 전시회는 그 결과물의 종합적인 전시회이기도 했다. 천년전주명품 온이 제안하는 가치를 고전에서 찾아보자면 이렇다. <삼국사기> 중 백제 위례성의 새 궁실에 대해 묘사한 문구인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전주 고유의 전통문화를 오늘의 가치와 눈으로 가려 뽑아 한국의 자연 소재와 색감을 바탕으로 세계에 두루 통하는 디자인을 개발, 무형문화재 장인의 솜씨로 작업했다. 브랜드 사업단 신이양 실장은 “전통적인 고유성을 살리면서 다른 문화와 어울릴 수 있고, 실용성이 있으며 아름답고 질 좋은 작품들입니다. 늘 품격 넘치는 기분 좋은 살림살이지요”라고 덧붙인다.
곡선을 그리며 걸어보니
입구에서부터 출구까지 지나온 길을 가만히 돌아보면 부드러운 곡선을 산책한 기분이다. 아트디렉터 김백선 씨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서양의 원근법적 배치인 박물관식 진열법을 피했습니다. 길을 산책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개울도 만나고 바위도 만나듯, 발걸음이 막힘 없이 뚫리고 시선도 쭉 흘러가면서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구조이지요.” 이를 형상화하기 위해 곳곳에 조약돌도 놓고 나무도 세웠다. 부스에 흐르는 음악도 이번 작업을 위해 드라마 OST 감독인 수완 씨에게 의뢰해 제작한 것. 타악기를 이용해서 공기와 빛의 이미지를 연주한 작품이다.이제 그 길을 따라 작품을 하나씩 살펴볼까? 먼저 흑색 사방탁자인 ‘심재心齋 I’이 눈에 띈다. 김백선 씨가 디자인하고 무형문화재 제19호 소목장 조석진 씨가 제작했다. 김백선 씨는 “사방탁자는 이미 공간에 대한 개념을 지니고 있는 가구”라고 말한다. 어느 공간에 있든 그곳에 맞는 쓰임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열린 가구라는 것이다. 한 면이 막힌 책장과 달리 앞뒤가 뻥 뚫려 있어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없다는 것도 특징이다.
1 옻칠장인 이의식 씨가 만든 반상기 세트와 나전칠기 공예가 최대규 씨의 나전산수 접시. 반상기 세트는 옻칠 장인과 전 아트디렉터 이상철 씨의 공동 작품이다.
2 소목장 김재중 씨가 돋을살문을 활용해 만든 수납 콘솔.
3 백선 씨가 디자인하고 소목장 조석진 씨가 만든 사방탁자 ‘심재’.
이 밖에 조석진 씨와 김백선 씨가 호흡을 맞춰 작업한 작품이 많다. 5단 서랍이 달린 수납장 ‘연然’, 검은 옻칠과 나무 외피의 질감이 돋보이는 거실장, 먹감나무의 결을 살린 먹감좌탁, 우리의 전통 자를 되살린 ‘누樓’ 등이다. 수납장과 거실장의 경우 울퉁불퉁한 나무의 외피를 깎아내지 않고 그대로 서랍 표면에 살려놓은 점이 관람객의 시선을 끌었다. 나무줄기 가운데 먹칠을 한 듯 독특한 흑색 무늬가 있는 먹감나무의 천연 아름다움을 살린 좌탁 역시 제작 기법에 대한 문의가 많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최고의 디자인으로 보았던 선조들의 미학은 요즘에도 큰 지지를 얻고 있음을 확인했다.
무형문화재 제19호 소목장 김재중 씨의 꽃살문・돋을살문을 활용한 수납 콘솔은 여러모로 독특했다. 50년 넘게 전통 창호를 제작한 그는 금산사, 고창 선운사 등의 창호 제작 및 원형 보존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해온 장인으로, 이번에 새롭게 현대인들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콘솔을 만들었다. 수납이라는 실용적인 목적 외에 정교하게 묘사된 꽃살문이나 돋을살문의 비례미가 장식적 효과를 준다. 꽃살문 수납 콘솔과 수납장 위에는 무형문화재 제12호인 악기장 고수환・최동식 씨의 해금과 양금 및 금이 진열되어 있다. 가야금 소리에 매료되어 40년 넘게 가야금 줄을 다듬는 외길 인생을 걸어온 고수환 씨와 재래종 나무에서 나오는 고고한 울림으로 거문고를 만드는 최동식 씨의 작품을 보면 악기 제작의 고향 정읍과 더불어 전주에 흐르는 예맥을 실감할 수 있다.
이곳엔 그 쓰임에 대해 이견이 분분한 작품이 하나 있다. 대나무 살로 만든 일종의 ‘발’인데 쓰임이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이는 ‘한지발’이다. 전주 한지가 유명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졌으나, 이 유명한 한지가 만드는 데 큰 공로를 담당하는 한지발에 대해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아내 서정임 씨와 함께 40년째 수제로 한지발을 만드는 유배근 씨는 한국에서 한지발을 만드는 마지막 명인이다. 대나무를 실처럼 얇게 쪼개는 일을 끝내도, 이를 노트만 한 크기로 엮는 작업에 하루를 꼬박 매달려야 할 만큼 시간과 섬세한 손길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한지발을 펼쳐보면 부드러운 감촉과 규칙적인 문양에 감탄을 하고 만다. 한쪽에는 무형문화재 제22호 침선장인 여천 최온순 씨의 앵삼(난삼: 조선시대 유생들이 입던 옷)이 날아갈 듯 걸려 있다. 장원급제하고 금의환양할 때 입었다던 앵삼의 고운 바느질 역시 ‘정성’이라는 디자인을 떠올리게 한다.
여백의 미를 현대적인 공간에서 실현시킨 부스를 돌다 보니 이곳은 원래 외관이 네모반듯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겉에서 보니 타원형이라고 이르기 힘든 독특한 모양이다. 김백선 씨는 답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쌀알 모양입니다. 쌀눈 때문에 한쪽 귀퉁이가 약간 깎인 모양이지요. 이 안에 담긴 모든 정신적인 가치가 한민족의 주식인 쌀과 같이 귀한 존재임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문의 063-288-9383
1 부스 외관은 나뭇조각을 규칙적으로 쌓아서 만들었다. 이 나뭇조각은 김백선 씨가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없이 열린 사방탁자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이다.
2 원목의 외피 재질을 살려서 디자인한 거실장.
3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이기동 씨가 만든 합죽선.
4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 고수환 씨가 대나무로 만든 해금.
5 먹감나무의 결이 곱게 살아난 작은 콘솔.
6 김백선 씨가 전통 자를 재해석해서 디자인하고 소목장 조석진 씨가 제작한 자. 흑단나무에 뼈 상감법으로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