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 동안 한국인의 미의식을 빼어난 영상으로 담아온 문화재 사진의 대가 백안伯顔 김대벽 선생은 특히 한옥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피력했다. 2년 전 세상을 등진 그는 한옥의 정수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그의 탁월한 사진 작품을 남겼다. 이중 일부가 지난 3월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백안 김대벽 추모 사진전-한옥의 향기>전에 선보였다. ‘김대벽 기념사업회’가 개최하고 사진가 주명덕 씨가 기획에 참여한 이 사진전에는 살림집 31점 및 궁궐 20점 등 51점의 한옥 사진이 전시되었고, 같은 제목의 추모 사진집도 발간됐다.
전시 기간 한옥문화원의 신영훈 원장이 ‘백안의 사진을 통해 본 한국인의 심성’에 대한 강연회를 열었다. 1980년대 당시 문화재 관리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던 신영훈 원장은 김대벽 선생과 함께 한옥을 찾아 전국을 다니며 한 뜻으로 일했으니 백안 선생의 한옥 사진 미학에 대해 그보다 더 내밀하게 알 이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자, 그럼 신영훈 원장의 설명으로 백안 선생이 찬탄해 마지않은 한옥의 아름다움을 들여다보자.
(왼쪽) 대구 달성의 문씨 세거지 수봉정사 뒷마당에 있는 담벼락 중간에 굴뚝을 만들었다. 굴뚝이 막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왓장과 흙으로 조성했다. 굴뚝이 화단의 풍경을 해치기는커녕 안정감과 균형감을 유지하며 자리잡고 있으며, 오히려 담벼락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한다. 시각적인 멋뿐 아니라 기능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현대 디자인의 기본 원칙을 조상들은 천성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한옥에 녹여낸 것이 아닐까 싶다. 낮은 담장 곁에 조성된 풋풋한 화단은 또 어떠한가. 사시사철 모든 수목이 담장의 은은한 황톳빛과 화사하게 어울린다. 화계와 굴뚝, 그리고 뒷편의 뒷동산까지 한 폭의 그림 같다. 백안 선생은 앉아서도 뒷창문만 열면 순간순간 변하는 이 그림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기분으로 촬영하지 않으셨을까.
(오른쪽) 경남 함양의 일두고택 대문 안을 빠끔히 들여다보자. 중문이 서있고, 중문 너머 안채의 일부가 보인다. 대문은 ‘높이 솟았다’는 의미인 솟을대문의 위용을 갖추었는데 비해 중문은 질박한 일각문으로 만들었다. 백안 선생은 갓을 쓴 채 말을 타고 출입하는 바깥어른을 위해 높이 만든 솟을대문과 아녀자들이 주로 출입하는 중문의 시각적·기능적 대비를 한눈에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구도로 촬영을 했다. 멀리 첩첩이 이어지는 뒷산과 지붕의 중첩된 곡선이 이루는 절묘한 아름다움 역시 놓치지 않고 담았다.
(왼쪽) 경북 영천의 매산종택 첩첩이 선 한옥의 전경을 담을 때 카메라의 위치를 어디로 잡느냐를 결정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한옥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숙련된 경험이 뒷받침되어야한다. 백안 선생은 정자나무 위로 훌쩍 올라가서 매산종택을 바라보았다. “고생스럽게 무엇 하러 위에서 촬영하시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기다란 맞배지붕과 함께 팔작지붕을 찍어야 그 아름다움이 온전히 드러난다”고 하셨다. 역시 탁월한 안목이었다. 가장 뒤편의 오른쪽 한옥은 새마을운동 무렵 지어졌다. 아주 미묘한 차이이지만, 다른 지붕의 곡선보다 다소 뻣뻣하다는 느낌이 든다. 선조들의 유연한 곡선은 참으로 재현하기 어려운 미감美感이다.
(오른쪽) 전북 임실의 이웅재 씨댁 이 한옥을 방문했더니 당시에도 자손들이 살림을 꾸리고 오붓하게 살고 있었다. 후대 사람들이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바닥에 비닐 장판을 깔아서 편의를 도모한 점이 눈에 띄었다. 이 집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 놀다가 신발을 신은 채 이곳으로 뛰어 들어오는 모습이 활기차 보였다. 백안 선생은 이렇듯 그 시대에 맞게 한옥을 사랑하는 모습을 좋다고 여겨 이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 한옥은 사랑채의 한쪽 끝에 마루를 깔고 문과 창을 내어 집에 앉아서도 바깥 공기를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정면과 측면에 판재로 바라지창을 만들었다. 이것이 열리고 닫히는 문임을 알리기 위해 백안 선생은 정면에 보이는 문을 살짝 열고 촬영했다. 사람의 온기가 곳곳에 묻어날 뿐 아니라 생긴 그대로 구부러진 나무를 사용해 더욱 정감이 가는 집이다.
(왼쪽) 대구 달성의 문씨 세거지 광거당 기와로 지붕을 잇다 보면 깨지는 기왓장이 생기기 마련이다. 조상들은 이것을 버리지 않고 벽체를 쌓는 데 활용하곤 했다. 조각난 기왓장이 이루는 불규칙한 무늬는 행인들에게 여유를 주었을 것이다. 규격화되어 획일적인 요즘의 타일이나 벽돌에서 느낄 수 없는 자연스러운 감칠맛이 아닌가! 폐품을 요긴하고 감각 있게 사용하는 지혜도 배울 수 있다. 둥근 기왓장으로 꽃 무늬를 만들어 벽체에 운치를 더했다. 거기에 기와로 지붕을 이어 무척 격조 있는 담장이 되었다.
(오른쪽) 전남 구례의 운조루 안채 바깥에 별채를 따로 지어 쓰임새가 실용적인 한옥이다. 앞쪽과 뒤쪽의 공간을 지은 연대가 다르다. 지붕 색에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훗날 지어진 뒤쪽 한옥의 곡선이 좀더 날카롭다. 자전거가 놓인 위치의 오른쪽에 조그마한 문이 나있다. 이곳은 오래전에 곳간으로 쓰였기 때문에, 보릿고개 무렵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워하지 않으며 쌀을 받아 갈 수 있도록 문을 낸 것이다. 지붕 아래에 드러난 창호지 바른 창문과 문살도 정겹다. 요즘 학교 건물에도 창문에 커튼을 달기보다는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을 달아준다면 빛이 골고루 들어와서 창가에 앉은 아이들이 눈부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왼쪽)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 조선시대 5대 서원 중 하나인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에서 6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다락문을 지나 안마당에 이르면 좌우로 부속 건물이 있고 그 안에 본채가 듬직하게 자리잡았다. 당대의 명망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규모도 무척 커서 1백여 명 정도는 너끈히 앉을 수 있는 곳이다. 좌우의 부속 건물에는 서재와 스승의 방이 있다. 완벽한 좌우 대칭에 과장된 장식이 없는 질박한 서원에서 학문을 닦는 이들은 둔중한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중앙에 보이는 나무는 사적 260호로 관리되면서 요즘 사람들이 심은 것인데, 어색한 조경이 다소 안타깝다. 실제로 이곳에 앉아 멀리 바라보면, 넉넉한 산이 마치 병풍처럼 두른 듯하여 병산서원으로 불렸다는 유래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른쪽) 충남 논산의 윤증고택 안채 뒷마당의 양지바른 곳에 대숲 바람까지 불어온다. 장맛은 햇빛과 바람, 그리고 물이 어우러져 결정한다는데, 이 댁의 항아리에 담긴 고추장, 된장, 간장 맛이 좋지 않고 배기겠는가! 촬영을 하는 동안 이 댁의 어른들이 30년 된 장을 내어주었는데, 그 맛은 가히 감동적이었다. 집 근처에 대나무 숲이 있으면 장맛이 좋아진다고 하더니, 정말인것 같다. 또한 엎어진 장독이 많은 것을 보니 장을 많이 퍼주는 인심까지 훌륭한 집임에 틀림없다. 이 집에 앉아있으면 뒷마당으로부터 ‘스스스’ 하는 시원한 대숲 소리가 들리니, 집에 자연의 소리를 들이는 낭만까지 엿볼 수 있다.
(왼쪽) 경남 함양의 일두고택 어떤 이들은 한옥에 정원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조상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레 어울리는 정원을 꾸미곤 했다. 이곳 사랑 마루에 앉아 안마당에 조성된 잘생긴 소나무를 내다보았다. 앉은 사람을 향해 절을 하는 듯한 소나무를 내다보는 집주인은 잠시나마 신선神仙이 된 듯하지 않았을까? 이곳은 요즘 한옥문화원에서 주최하는 방학 중 한옥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어린이들이 들르는 한옥 중 하나인데, 아이들이 현대 도시 문화에 길들여져 한옥의 정취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편견이다. 일단 이곳에 앉아 자기를 향해 기운차게 뻗은 소나무를 바라보는 경험을 한 아이들은 눈빛이 달라진다. 아마도 그 아이들의 가슴에 한 번 들어온 이 장면은 서서히 녹아 들어 훗날 반드시 떠올릴 때가 있을 것이다.
(오른쪽) 대구 달성의 문씨 세거지 수봉정사 한옥은 한 집에서도 모든 출입문의 규격이 일정하지 않았다. 위치나 쓰임을 고려해 각기 다르게 디자인했다. 이 집의 경우 뒷문은 멀리 자그맣게 보이는 중문에 비해 운두가 낮고 폭이 약간 넓다. 백안 선생은 이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뒷문으로 들어가 중문에 이르는 동선까지 보여주고자 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부드러운 햇빛을 받고 드러난 나뭇결이며 둥글거나 네모진 서까래의 개성까지도 모두 포착했다.
백안 김대벽 선생
1929년 함경북도 행영에서 태어나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교회 장로를 지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땐 목사를 꿈꾸었으나, 군복무를 마칠 무렵 매형이자 사진작가인 정도선 선생을 사사하며 사진가의 길에 들어섰다. 평생 한국 기층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엄청난 기록 사진을 남겼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