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들이 되돌아온 편지처럼 길바닥에 흩어져 있는 11월의 오후. 대낮부터 건주정 부리는 술꾼들을 불러들이는 길음동을 지나, 배고프고 사람 고픈 길손을 받아들이는 밥집이 즐비한 정릉을 지나 도착한 평창동. 물이 흐르듯 가지를 친 골목을 굽이굽이 올라간 그 동네, 구름 없는 하늘 아래 박공 장식으로 뒤덮인 성 같은 집이 나타났다. 초인종을 누르자 그는 수화기를 왼쪽 어깨에 받친 자세로 육중한 대문을 열었다. 까만색 롱 스커트와 복고적인 무드의 니트 풀오버. 오후의 역광 속에서 눈에 담긴 그 실루엣을 지켜보며 <선셋 대로>의 글로리아 스완슨을 생각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좀 전에 지나쳐 온 세상은 순식간에 잊게 할, 마법의 성 같은 집이 드러났다. 18세기 영국풍 정원에, 18세기 영국 귀족풍 저택과 로버트 벤투리(20세기 미국 건축의 대표주자로 고전적 양식에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를 끌어들임)의 1960년대 주택을 혼합한 듯한 본채에, 펜실베이니아 주의 흑인 가정이 사는 집 같은 별채에, 분수에, 발코니 정원에…. 담 안의 세상은 저 속도의 세상과 격리된 별세계처럼 보였다. 다시 집 안으로 인도되자 바로 눈에 들어오는 장중한 계단, 바벨탑의 신화를 재현하듯 수직 욕구를 마구 드러내는 천장고, 벨벳 커튼 안에 숨은 스테인드글라스, 레이스 따위로 치장한 로만셰이드 커튼, 모든 벽을 점령한 꽃무늬 벽지. 밀려드는 어지럼증에 한동안 몸을 주체하기 힘들다. 결벽증이 있는 여자의 손톱처럼 흠 없이 매끈한 집만 봐왔던 눈에 들어온 이 오묘하고 독특한 기운.
(위쪽) 클라크 케이블의 상대가 되는 꿈을 불러일으키는 중앙 홀의 계단. 이 계단 때문에 거실의 많은 면적을 양보해야 했지만 계단 펼쳐진 집에서 살고 싶었던 전경숙 씨의 로망이 이루어졌다.
1 현관 옆 창가에도 그만의 취향으로 클래식한 소품들을 배치했다.
2 다이닝 룸도 꽃무늬 벽지와 로만셰이드 커튼으로 클래식하게 연출했다.
3 로버트 벤투리의 1960년대 미국 주택 스타일과 18세기 영국 귀족풍 저택이 혼합된 듯한 외관.
4 게스트하우스로 쓰는 별채는 미국 소도시에서 볼 법한 주택을 닮았다. 이 집의 건축 설계는 건축가 김정구 씨(디앤건축 02-575-3351)가 맡았다.
삶이 조금씩 차오르던 소녀 시절부터 ‘계단 주르르 펼쳐진 집에서 드레스 입고 살고 싶었다’는 그 바람이 봄날 수증기 구름처럼 나른한 집을 만들어내고야 만 것이다. 클라크 케이블의 상대가 되는 꿈을 불러일으키는 계단하며, 과장된 스케일의 샹들리에하며, 섬세한 장식 몰딩, 방마다 각각 다른 마감재 컬러, 피라미드형의 천장(2층 침실과 남편 서재), 거기다 집 안을 온통 두른 꽃무늬의 향연까지. 꽃무늬 벽지(꽃무늬 벽지가 쓰이지 않은 공간은 계단이 있는 중앙 홀과 남편의 공간인 서재뿐이다), 꽃무늬 몰딩, 꽃무늬 소파, 꽃무늬 침구, 심지어 집주인이 웨지우드 꽃무늬 찻잔에 내온 장미꽃 차…. 꽃 멀미가 날 것 같은 집이다. “만약 내가 살림만 했다면 정말 아기자기하게 꾸며놓고 살았을 거예요.” 구르몽의 시를 입 속에서 달달거릴 것 같은 집주인이 갑자기 맥주 거품 같은 목소리로 웃었다. 문학소녀가 아닐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나 우아한 만찬을 꿈꿨지만, 의류 사업을 일구고 자수성가하느라 여장부의 목청과 몸짓을 가지게 된 그. 그래도 아직 소녀적 서정을 간직한 그가 사십 줄에 이룬 로망의 집이다. 그는 이 로망을 위해 건축가에게 맨 처음 롯데월드 사진을 건넸다.
1 현관을 지나 클래식한 장식 몰딩의 여닫이문을 열면 거실이 나타난다. 가구와 소품 하나, 문에 끼운 장식 유리까지 일관된 코드로 꾸몄다.
2 2층 계단에서 중앙 홀을 내려다봤다. 나무를 깎아 핸드레일을 만들고 나무 바닥을 설치하느라 한 달이 걸렸다. 계단 양옆으로 침실, 서재가 자리하고 그 사이에 아내를 위한 미니 서재가 자리하는데 원형 장식 몰딩으로 감싸인 창문 안쪽이 바로 그 공간이다.
3 2층 계단에서 중앙 홀을 내려다봤다. 나무를 깎아 핸드레일을 만들고 나무 바닥을 설치하느라 한 달이 걸렸다. 계단 양옆으로 침실, 서재가 자리하고 그 사이에 아내를 위한 미니 서재가 자리하는데 원형 장식 몰딩으로 감싸인 창문 안쪽이 바로 그 공간이다.
4, 5 플라워 패턴과 클래식한 소품을 좋아하는 이 집의 주인공 전경숙 씨.
원래 이 집은 이런 땅에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지의 앞뒤 높이 차가 10m나 되는 언덕이었다. 언덕의 뒤쪽에 치우쳐 집을 앉히고 앞쪽은 터 고르기 후에 콘크리트 슬라브를 얹고 슬라브 밑은 주차장으로, 그 위는 정원으로 만들었다. 대문 앞에서 보자면 이 정원은 주차장 위에 얹혀진 일종의 ‘옥상 정원’이다. 바로 옥상 위에 만든 옥상 정원이 이 집의 마당이 되는 식이다. 네 귀에 딱 맞게 땅을 가르고 그 위의 좌우 균형 축에 인공 분수를 앉히고(엄밀하게 말하면 좌우 균형의 축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로버트 벤투리가 자주 썼다는 방법, 박공 지붕을 만들더라도 미묘하게 대칭에서 벗어난 형태로 치우치게 했다는 그 방법을 떠올리게 한다), 마당 한 귀퉁이에는 벽천을 두르고, 터파기 하다 나온 바윗돌로 폭포와 시냇물을 만들고, 모과나무·사과나무·뜰보리수·앵두·복숭아나무 같은 유실수를 곳곳에 심고 나니 그리니치 궁의 정원이 부럽지 않다. 이 정원의 진짜 주인공은 애견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6 정원의 주인인 애견 로미오와 줄리엣.
7 클래식한 발코니가 돋보이는 외관.
집 안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던 아파트 키드(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양육된)의 무신경함에 날아온 카운터 펀치! 장식이 흘러넘치는 이 집만의 정서, 그 생뚱맞음 앞에서 이상하게도 기분이 환해지고 웃음이 실실 나온다. 통념의 뒤통수를 살짝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아, 그 얼얼함이 상쾌하다. 참으로 오묘한 건 이 집에 좀 더 머물자 왠지 모르게 새록새록 정겹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멀미 날 것 같았던 꽃무늬도 다 정겹고, 서투르게 매치된 소품들도 다 정겹고, 롯데월드처럼 보이는 지붕 장식도 정겹더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향수’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어릴 적 우리가 스케치북에 그린 집은 늘 이렇게 생겼었다. 이런 집에 대한 ‘향수’를 우린 어릴 적부터 체득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나이가 들면 공주처럼 살고 싶던 꿈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인형의 드레스처럼 온 집 안을 레이스 장식으로 치장하느라 분주해지는 것 아닐까. “로버트 벤투리가 ‘건축은 언어이므로 영웅주의적 상징을 펼치기보다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표현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부잣집에 시집 가서 계단 주르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던 건축주에게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떠오르게 해줬다면 그걸로 족해요.” 흔히 말하는 ‘모더니즘 건축가’인, 열세 번째 주택 설계라는 건축가 김정구 씨는 오만 가지 은유와 철학을 동원하는 대신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 건축주의 추억과 로망이라는 ‘이야기’로 집을 채워나갔다.
1 2층 침실 발코니 풍경. 콜로니얼 양식의 난간과 바닥 타일 색감이 또 다른 느낌을 준다.
2 유화를 걸고 벨벳으로 감싼 벤치를 놓은 현관에서 집 안 분위기를 먼저 느낄 수 있다.
3 아치형으로 길고 좁게 나눈 거실 창문과 지그재그로 깐 나무 바닥, 클래식한 가구,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과 오후를 즐기는 전경숙 씨.
4 집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옥상 정원(비탈에 집을 앉혔기 때문에 앞쪽 대지는 콘크리트 슬라브로 평평하게 만든 후 그 밑에 지하 주차장을, 그 위에 정원을 배치했다)과 성 같은 건물 뒤로 평창동의 산세가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
이 집의 구조는 복잡하면서도 단순하고 집의 크기와 면적도 꽤 넓고 커다란 느낌을 주지만 생각보다 작다. 라임스톤과 화강석이라는 재료가 건물을 육중하게 보이게 하고, 작은 건물 속에 중앙 홀(계단실이 있는) 같은 커다란 스케일이 건축적인 긴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거대한 느낌을 주는 것뿐이다. 그런데 잠깐, 당신도 어느새 이 계단에 매혹된 건 아닌가? 원래 계단은 공간이라는 몸에 착 달라붙어 제2의 피부처럼 취급받는, 그 기능에 비해 모양새가 도드라지지 않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는 계단이 공간의 형태를 마름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앙 홀의 대부분이 계단으로 채워지고 이 계단을 중심으로 각 층의 공간이 양옆으로 나뉘고, 동선이 나뉘었다가 다시 모인다. 이렇게 거대한 계단실 때문에 거실과 주방, 침실 공간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 대신 덤으로 얻은 낭만. 이 우아한 로망을 완성하기 위해 건축가는 목재를 구부리는 대신 깎아 핸드레일을 만들고 한 달 걸려 계단을 설치하는 수고로움을 마지않았다.
집의 얼굴에도 습도라는 것이 있다면 이 집은 개념과 논리의 마른 정신보다는, 감정 혹은 감성이라는 젖은 정신으로 가득 찬 듯한 집이다. 그러니 이 집에 대해 이론적 잣대를 들이대거나 개념적 평가를 하는 건 건축평론가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린 그저 이 독특한 향수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매시간 다른 각도에서 굴절되어 들어오는 빛의 파노라마를 온몸으로 받으며 심심하게 보내고 싶은 집. 아, 이 집 거실에서 약속 없이 고요하게 맞는 크리스마스, 그 나른함은 어떤 맛일까? 창틈으로 매화 꽃잎처럼 고놈의 흰 눈이 흩날리고 아스피린 먹은 대낮처럼 나른하고 행복해지는 한겨울의 오후, 마법의 성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다시 속도와 모더니즘의 세상 속으로 돌아가며, 어둠에 잠긴 마법의 성을 향해 자동차 유리창을 닦는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좀 전에 지나쳐 온 세상은 순식간에 잊게 할, 마법의 성 같은 집이 드러났다. 18세기 영국풍 정원에, 18세기 영국 귀족풍 저택과 로버트 벤투리(20세기 미국 건축의 대표주자로 고전적 양식에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를 끌어들임)의 1960년대 주택을 혼합한 듯한 본채에, 펜실베이니아 주의 흑인 가정이 사는 집 같은 별채에, 분수에, 발코니 정원에…. 담 안의 세상은 저 속도의 세상과 격리된 별세계처럼 보였다. 다시 집 안으로 인도되자 바로 눈에 들어오는 장중한 계단, 바벨탑의 신화를 재현하듯 수직 욕구를 마구 드러내는 천장고, 벨벳 커튼 안에 숨은 스테인드글라스, 레이스 따위로 치장한 로만셰이드 커튼, 모든 벽을 점령한 꽃무늬 벽지. 밀려드는 어지럼증에 한동안 몸을 주체하기 힘들다. 결벽증이 있는 여자의 손톱처럼 흠 없이 매끈한 집만 봐왔던 눈에 들어온 이 오묘하고 독특한 기운.
(위쪽) 클라크 케이블의 상대가 되는 꿈을 불러일으키는 중앙 홀의 계단. 이 계단 때문에 거실의 많은 면적을 양보해야 했지만 계단 펼쳐진 집에서 살고 싶었던 전경숙 씨의 로망이 이루어졌다.
1 현관 옆 창가에도 그만의 취향으로 클래식한 소품들을 배치했다.
2 다이닝 룸도 꽃무늬 벽지와 로만셰이드 커튼으로 클래식하게 연출했다.
3 로버트 벤투리의 1960년대 미국 주택 스타일과 18세기 영국 귀족풍 저택이 혼합된 듯한 외관.
4 게스트하우스로 쓰는 별채는 미국 소도시에서 볼 법한 주택을 닮았다. 이 집의 건축 설계는 건축가 김정구 씨(디앤건축 02-575-3351)가 맡았다.
삶이 조금씩 차오르던 소녀 시절부터 ‘계단 주르르 펼쳐진 집에서 드레스 입고 살고 싶었다’는 그 바람이 봄날 수증기 구름처럼 나른한 집을 만들어내고야 만 것이다. 클라크 케이블의 상대가 되는 꿈을 불러일으키는 계단하며, 과장된 스케일의 샹들리에하며, 섬세한 장식 몰딩, 방마다 각각 다른 마감재 컬러, 피라미드형의 천장(2층 침실과 남편 서재), 거기다 집 안을 온통 두른 꽃무늬의 향연까지. 꽃무늬 벽지(꽃무늬 벽지가 쓰이지 않은 공간은 계단이 있는 중앙 홀과 남편의 공간인 서재뿐이다), 꽃무늬 몰딩, 꽃무늬 소파, 꽃무늬 침구, 심지어 집주인이 웨지우드 꽃무늬 찻잔에 내온 장미꽃 차…. 꽃 멀미가 날 것 같은 집이다. “만약 내가 살림만 했다면 정말 아기자기하게 꾸며놓고 살았을 거예요.” 구르몽의 시를 입 속에서 달달거릴 것 같은 집주인이 갑자기 맥주 거품 같은 목소리로 웃었다. 문학소녀가 아닐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나 우아한 만찬을 꿈꿨지만, 의류 사업을 일구고 자수성가하느라 여장부의 목청과 몸짓을 가지게 된 그. 그래도 아직 소녀적 서정을 간직한 그가 사십 줄에 이룬 로망의 집이다. 그는 이 로망을 위해 건축가에게 맨 처음 롯데월드 사진을 건넸다.
1 현관을 지나 클래식한 장식 몰딩의 여닫이문을 열면 거실이 나타난다. 가구와 소품 하나, 문에 끼운 장식 유리까지 일관된 코드로 꾸몄다.
2 2층 계단에서 중앙 홀을 내려다봤다. 나무를 깎아 핸드레일을 만들고 나무 바닥을 설치하느라 한 달이 걸렸다. 계단 양옆으로 침실, 서재가 자리하고 그 사이에 아내를 위한 미니 서재가 자리하는데 원형 장식 몰딩으로 감싸인 창문 안쪽이 바로 그 공간이다.
3 2층 계단에서 중앙 홀을 내려다봤다. 나무를 깎아 핸드레일을 만들고 나무 바닥을 설치하느라 한 달이 걸렸다. 계단 양옆으로 침실, 서재가 자리하고 그 사이에 아내를 위한 미니 서재가 자리하는데 원형 장식 몰딩으로 감싸인 창문 안쪽이 바로 그 공간이다.
4, 5 플라워 패턴과 클래식한 소품을 좋아하는 이 집의 주인공 전경숙 씨.
원래 이 집은 이런 땅에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지의 앞뒤 높이 차가 10m나 되는 언덕이었다. 언덕의 뒤쪽에 치우쳐 집을 앉히고 앞쪽은 터 고르기 후에 콘크리트 슬라브를 얹고 슬라브 밑은 주차장으로, 그 위는 정원으로 만들었다. 대문 앞에서 보자면 이 정원은 주차장 위에 얹혀진 일종의 ‘옥상 정원’이다. 바로 옥상 위에 만든 옥상 정원이 이 집의 마당이 되는 식이다. 네 귀에 딱 맞게 땅을 가르고 그 위의 좌우 균형 축에 인공 분수를 앉히고(엄밀하게 말하면 좌우 균형의 축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로버트 벤투리가 자주 썼다는 방법, 박공 지붕을 만들더라도 미묘하게 대칭에서 벗어난 형태로 치우치게 했다는 그 방법을 떠올리게 한다), 마당 한 귀퉁이에는 벽천을 두르고, 터파기 하다 나온 바윗돌로 폭포와 시냇물을 만들고, 모과나무·사과나무·뜰보리수·앵두·복숭아나무 같은 유실수를 곳곳에 심고 나니 그리니치 궁의 정원이 부럽지 않다. 이 정원의 진짜 주인공은 애견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6 정원의 주인인 애견 로미오와 줄리엣.
7 클래식한 발코니가 돋보이는 외관.
집 안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던 아파트 키드(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양육된)의 무신경함에 날아온 카운터 펀치! 장식이 흘러넘치는 이 집만의 정서, 그 생뚱맞음 앞에서 이상하게도 기분이 환해지고 웃음이 실실 나온다. 통념의 뒤통수를 살짝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아, 그 얼얼함이 상쾌하다. 참으로 오묘한 건 이 집에 좀 더 머물자 왠지 모르게 새록새록 정겹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멀미 날 것 같았던 꽃무늬도 다 정겹고, 서투르게 매치된 소품들도 다 정겹고, 롯데월드처럼 보이는 지붕 장식도 정겹더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향수’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어릴 적 우리가 스케치북에 그린 집은 늘 이렇게 생겼었다. 이런 집에 대한 ‘향수’를 우린 어릴 적부터 체득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나이가 들면 공주처럼 살고 싶던 꿈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인형의 드레스처럼 온 집 안을 레이스 장식으로 치장하느라 분주해지는 것 아닐까. “로버트 벤투리가 ‘건축은 언어이므로 영웅주의적 상징을 펼치기보다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표현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부잣집에 시집 가서 계단 주르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던 건축주에게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떠오르게 해줬다면 그걸로 족해요.” 흔히 말하는 ‘모더니즘 건축가’인, 열세 번째 주택 설계라는 건축가 김정구 씨는 오만 가지 은유와 철학을 동원하는 대신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 건축주의 추억과 로망이라는 ‘이야기’로 집을 채워나갔다.
1 2층 침실 발코니 풍경. 콜로니얼 양식의 난간과 바닥 타일 색감이 또 다른 느낌을 준다.
2 유화를 걸고 벨벳으로 감싼 벤치를 놓은 현관에서 집 안 분위기를 먼저 느낄 수 있다.
3 아치형으로 길고 좁게 나눈 거실 창문과 지그재그로 깐 나무 바닥, 클래식한 가구,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과 오후를 즐기는 전경숙 씨.
4 집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옥상 정원(비탈에 집을 앉혔기 때문에 앞쪽 대지는 콘크리트 슬라브로 평평하게 만든 후 그 밑에 지하 주차장을, 그 위에 정원을 배치했다)과 성 같은 건물 뒤로 평창동의 산세가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
이 집의 구조는 복잡하면서도 단순하고 집의 크기와 면적도 꽤 넓고 커다란 느낌을 주지만 생각보다 작다. 라임스톤과 화강석이라는 재료가 건물을 육중하게 보이게 하고, 작은 건물 속에 중앙 홀(계단실이 있는) 같은 커다란 스케일이 건축적인 긴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거대한 느낌을 주는 것뿐이다. 그런데 잠깐, 당신도 어느새 이 계단에 매혹된 건 아닌가? 원래 계단은 공간이라는 몸에 착 달라붙어 제2의 피부처럼 취급받는, 그 기능에 비해 모양새가 도드라지지 않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는 계단이 공간의 형태를 마름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앙 홀의 대부분이 계단으로 채워지고 이 계단을 중심으로 각 층의 공간이 양옆으로 나뉘고, 동선이 나뉘었다가 다시 모인다. 이렇게 거대한 계단실 때문에 거실과 주방, 침실 공간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 대신 덤으로 얻은 낭만. 이 우아한 로망을 완성하기 위해 건축가는 목재를 구부리는 대신 깎아 핸드레일을 만들고 한 달 걸려 계단을 설치하는 수고로움을 마지않았다.
집의 얼굴에도 습도라는 것이 있다면 이 집은 개념과 논리의 마른 정신보다는, 감정 혹은 감성이라는 젖은 정신으로 가득 찬 듯한 집이다. 그러니 이 집에 대해 이론적 잣대를 들이대거나 개념적 평가를 하는 건 건축평론가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린 그저 이 독특한 향수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매시간 다른 각도에서 굴절되어 들어오는 빛의 파노라마를 온몸으로 받으며 심심하게 보내고 싶은 집. 아, 이 집 거실에서 약속 없이 고요하게 맞는 크리스마스, 그 나른함은 어떤 맛일까? 창틈으로 매화 꽃잎처럼 고놈의 흰 눈이 흩날리고 아스피린 먹은 대낮처럼 나른하고 행복해지는 한겨울의 오후, 마법의 성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다시 속도와 모더니즘의 세상 속으로 돌아가며, 어둠에 잠긴 마법의 성을 향해 자동차 유리창을 닦는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