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빠오 작가가 직접 꾸민 ‘탑이 쌓여 있는 방’. 작가의 반려묘에 관한 일화가 담긴 공간이다.
어떤 도시가 품은 유구한 상징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를테면 여행지로서 광양은 명실상부한 매화의 고장. 봄이면 지리산 자락을 굽이굽이 휘도는 섬진강 물길을 따라 지천인 매화나무가 한껏 망울을 터뜨린다. 꽃으로 절기를 가늠하는 상춘객에게 긴긴 겨울은 남도의 봄을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일 터. 올해는 사정이 좀 다르다. 아직 매화는 얼어붙은 땅 아래 잔뜩 웅크리고 있지만 이 겨울 끝자락, 광양에는 때이른 낯선 온기가 가득하다. 지난 12월, 고즈넉한 골목길을 따라 크고 작은 한옥이 켜켜이 포개진 광양읍 한가운데 복합 문화 공간 ‘인서리공원’이 문을 연 덕분이다. 낡고 방치된 집과 창고, 차고 등을 개조해 다양한 쓰임을 불어넣은 열네 개의 재생 공간은 물론 쇠퇴해가던 원도심 전체에 예술이란 이름의 새로운 봄이 찾아왔다.
구석구석 특유의 위트와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갑빠오의 집.
반창고 개관전의 주인공인 김경화 작가의 아틀리에로 꾸민 01 내부. 마을의 낡은 차고를 개조해 만든 다목적 예술 공간이다.
김경화 작가의 작업실에서 그대로 옮겨 온 가구와 소품이 또 하나의 전시를 이룬다.
낡은 한옥의 재발견
인서리공원은 담장이 낮은 골목골목을 품으며 하나의 공원처럼 조성되었다. ‘일상이 예술, 예술이 일상’이라는 가치 아래 작가들의 작품을 에디션 프린트로 제작·판매하는 아트앤에디션과 그림닷컴 그리고 파주의 브런치 카페 ‘Aat’가 함께 완성한 공간이다. “보다 많은 사람이 더 쉽게, 더 가까이 예술을 접하고 향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 인서리공원 운영을 맡고 있는 박소연 아트앤라이프 대표의 포부. 건물은 크게 아트리움, 카페, 스테이 등 세 가지 콘셉트로 나뉘는데, 특정 구역에 묶이지 않고 마을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우선 주차장 건너편의 탁 트인 공원 초입에 들어서면 현관 역할을 하는 아트 숍 겸 판화 공방 ‘아트앤에디션’과 갤러리 두 곳이 가장 먼저 객을 맞는다. 안쪽의 너른 마당을 사이에 두고 Aat의 카페와 라이브러리 건물 두 채가 마주 보는 한편, 미로 같은 골목 틈에는 한옥 스테이 하나가 비밀스레 숨어 있다. 나머지는 골목 너머 원도심 주택가 깊숙이 포진했는데, 산책 삼아 한갓지게 걸음을 옮기다 보면 3분, 5분마다 하나씩 새로운 공간이 나타나는 식이다. 내부는 각자 역할에 맞게 현대적으로 개조했지만, 서까래며 기둥, 대청마루 등 구석구석 옛 한옥의 정서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온화하고 소박한 광양 원도심의 정취다.
안마당에서 바라본 다경당. 1백 년 한옥의 역사를 최대한 지켜내며 내외부를 개조했다.
사실 인서리공원은 광양시에서 2016년부터 추진한 대대적 도시 재생 사업의 일환이다. 다른 많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광양 원도심 역시 그간 공동화 현상으로 몸살을 앓아왔는데, 주요 공공 기관이 외곽으로 이전하고 대규모 주거 단지가 개발되며 지속적으로 인구가 이탈한 탓이다. 오늘날 원도심 인구는 1990년에 비해 절반가량 감소했으며, 20년을 넘긴 노후 주택이 72%에 이른다. 공·폐가와 빈 점포가 지속적으로 늘어난 것도 심각한 문제다. 광양시에서 찾은 해답은 도시 재생. 오래된 한옥이 대거 남아 있는 광양읍의 특성을 살려 순천, 여수 등 인근 지역과는 또 다른 경쟁력을 만들겠다는 취지다. 단순히 한옥을 상품화한 관광 마을을 조성하는 게 아니라 지역 고유의 주거 문화를 개선하고 공공 거점을 발굴해 지역민의 자생적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리하여 선정된 프로젝트의 거점이 현재 인서리공원을 이루는 열네 채의 건물이다.
실제 광양의 한옥은 조선 시대 이후 들어선 전통 한옥과 1970~1980년대 개량 한옥으로 나뉘는데, 대부분 방과 마루, 부엌이 일렬로 구성된 ‘ㅡ’자형으로 전면에 너른 마당과 텃밭을 보유한 것이 특징이다. 다만, 1990년대 전후 온갖 형태로 증축한 경우가 많고 노후화 정도가 심한 곳도 적지 않다. 결국 리모델링 작업은 공공성과 더불어 본래 한옥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고 지켜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집집마다 건축 연도와 특징, 노후화 정도가 다른 터라 하나씩 확인해가며 매번 콘셉트를 새로 잡아 진행했다고. 이 험난하던 여정을 무사 히 마무리한 데는 설계부터 감리까지 한옥 건축가로서 경험과 노하우를 쏟아낸 참우리건축사사무소 김원천 소장의 공이 크다. 5년 가까이 프로젝트를 함께한 광양시 안전도시국 염은진 팀장은 도시 안쪽부터 시작되는 재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낡은 한옥을 이런 식으로 바꾸고 활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주민들 주도하에 도시 재생이 자연스레 확산될 거라고 생각해요.”
오래된 한옥의 정취가 그득한 다경당 침실. 고급스러운 침구와 소품, 식물, 옛 민화를 현대적으로 복원한 아트 프린트 작품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구석구석 옛 한옥의 골조가 살아 있는 Aat 카페 내부. 창문 너머 라이브러리 공간이 마주 보인다.
어쩌다 마주친 예술
물론 아무리 잘 다듬은 공간이라도 적절한 쓰임을 찾지 못한다면 허울 좋은 빈껍데기나 다름없는 법. 정교하게 수리한 옛 건물들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은 건 지난해 프로젝트에 합류한 아트앤에디션이다. 무수한 형태와 크기의 그릇을 아우르기 위해 박소연 대표가 준비한 핵심 재료는 다름아닌 예술. 대문 격인 공원 초입을 아트리움으로 조성한 이유다. 아트 프린트 작품과 소품을 판매하는 숍을 꾸리고 실크스크린 클래스 등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누구나 예술을 직접 보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다. 한편 숍 좌우를 든든히 지키는 두 건물은 옛 양곡 창고를 개조한 갤러리 ‘반창고’와 빈 차고를 다목적 예술 공간으로 활용한 ‘01’이다.
박소연 대표는 지난 12월, 인서리공원의 첫 전시로 김경화 작가의 작품을 택했다. 풍성한 색채, 새 생명을 부여받은 듯한 꽃들이 벽면 가득 넘실대는 이번 전시의 주제는 <온기를 전하는 풍경>이다. “광양시에서 만든 이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우리 역할이라고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이었습니다. 대담한 구도와 자유분방한 터치, 자신감 넘치는 색채가 단조로울 수 있는 정물화에 생동감을 주죠.”
다경당을 리모델링하며 안마당에 별채 공간을 새로 만들었다.
"도시 재생 사업을 통해 광양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면서 신구 도시 간 균형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광양읍 도시 재생 한옥 거점 공간이 광양시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부상해 방문객의 재방문으로 이어지는 모범 선례가 되길 바랍니다."_ 정인화 광양시장
현재 반창고 전시와 연계해 01에 재현해둔 김경화 작가의 아틀리에도 눈여겨볼 만하다. 테이블과 의자, 수납장, 각종 작업 도구는 물론 찻잔, 접시, 시계, 테이블보 등 작은 소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작가의 작업실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향후 반창고는 분기별로 전시를 바꿔가며 폭넓은 예술 장르를 선보일 예정. 오는 3월, 봄과 함께 찾아올 두 번째 전시의 주인공은 현대적 매화도로 잘 알려진 한국화의 거장 허달재 화백이다.
반창고가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기획 전시관이라면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갑빠오의 집’은 작은 대문 장식부터 버려진 문짝 하나까지 온통 작가의 손길을 거친 콘셉트 갤러리다. 원도심의 폐허 같은 헌 집이 작가의 예술 세계와 만나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된 셈. 실제로 박소연 대표는 인서리공원을 기획하며 몇몇 공간의 경우 골목을 걷다 문득 마주치는 작은 미술관이 되기를 바랐는데, 그 대표적 결과물이 바로 이곳이다.
골목에서 다경당으로 들어오는 대문. 낮은담 너머로 소박하고 정겨운 광양읍의 주택가 골목 풍경이 펼쳐진다.
갑빠오 작가가 밝힌 공간 콘셉트는 레이먼드 카버의 동명 단편소설에서 인용한 ‘a small good thing’. 하루하루가 쌓여 인생이 되고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루듯,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적인 경험에서 영감을 얻는 작가의 세계관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주하는 순간 기분이 환해지는 알록달록한 색감의 대형 작품은 물론, 자칫 못 보고 지나치기 쉬운 작은 작품들이 낡은 벽이며 어둑한 천장 구석구석 위트와 온기를 가득 채운다. “작가의 온기가 쓰러져가던 집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래서 별것 아닌 줄로만 알고 있던 이 집이 손님을 맞이하며 위로 하는 따뜻한 공간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갑빠오 작가의 소회는 사실 인서리공원 전체를 가로지르는 분명 한 정체성이기도 하다.
광양시의 도시 재생 사업으로 리모델링한 또 하나의 공간. 현재 인서리공원의 공간 쓰임을 논의 중이다.
머물수록 깊어지는 풍경
낯선 골목을 돌고 도는 예술 탐험은 결국 크든 작든 하나의 여정을 이룬다. 인서리공원을 구성하는 건물 하나하나가 점이 아닌 선으로서 마을 전체를 연결하는 덕분이다. 이런 동선에 서는 사랑방 혹은 쉼터 역할을 하는 거점도 무척 중요하다. 여정의 시작과 끝을 품은 공간, 누구나 편히 드나들고 여유롭게 머물 수 있는 공간, 바로 카페와 라이브러리다. 아트 숍과 01 사이의 좁은 골목을 지나면 Aat가 운영하는 카페와 라이브러리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낡은 한옥 두 채를 개조해 담을 허물고 마당으로 연결한 것이다.
인서리공원 내 Aat는 파주의 본점처럼 브런치를 내놓는 대신 수제 양갱과 앙버터 모나카, 파운드케이크 등 각종 디저트를 중심으로 커피, 음료, 와인을 선보인다. 광양 고유의 제철 미각을 담은 메뉴도 꾸준히 개발하는 중. 유부초밥이나 쌈밥처럼 간편하게 즐기는 식사류와 색색의 디저트가 2단 찬합에 정갈하게 담겨 나오는 Aat 도시락 역시 추천 메뉴다. 한편 카페 손님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라이브러리에는 미술 관련 서적과 잡지, 어린이 그림책 등이 즐비하다. 세월에 닳고 닳은 목재 골조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탁 트인 서재에서 책 한 권, 커피 한잔과 함께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 좋다.
한옥 스테이 투숙객이라면 조식으로 Aat 도시락을 추천한다. 구성 메뉴는 철마다 조금씩 달라질 예정이다.
과거와 현대, 삶과 예술을 잇는 이 특별한 여정의 또 다른 거점은 세 채로 구성한 한옥 스테이다. 모두 라이프 스타일리스트인 이정화 씨에스타 대표가 함께 내부를 꾸몄는데, 기존 한옥의 골조와 특성을 그대로 살린 덕분에 자신만의 독보적 존재감을 지닌 쉼터가 완성됐다. 비움과 채움의 경계를 절묘하게 오가는 가구와 소품, 구석구석 알맞게 자리한 아트 프린트 작품의 조화도 눈길을 끈다. 우선 카페와 라이브러리 사이에 숨은 홰경당은 ‘모던 한옥’이 콘셉트다. 창살 따라 노란 볕이 쏟아지는 아늑한 거실부터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화이트 톤 침실까지, 한옥의 기품과 현대적 인테리어가 공존하는 섬세한 공간으로 꾸몄다.
반면 남문길 건너 주거지역 한복 판에 위치한 ‘예린의 집’은 근대적 감성을 담아낸 숙소. 일자로 쭉 뻗은 마루를 따라 거실과 방 두 개, 부엌이 자리하는데, 앤티크한 가구며 소품, 패브릭이 곳곳에 고풍스러운 시대 정서를 더한다. 인서리공원 한옥 스테이의 백미는 1백 년 역사를 간직한 다경당이다.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자라는 안마당 너머 빛바랜 기와와 대청마루, 고가구와 식물이 어우러진 전통 한옥은 안팎으로 유수한 풍취를 그득 뿜어낸다. 별채를 새로 지어 부엌 공간을 밖으로 내놓은 것도 투숙객이 꼽는 장점. 밤이 되면 은은하게 마당을 비추는 조명 덕분에 낮과는 또 다른 정취를 즐길 수 있다.
두 채의 건물로 구성한 갑빠오의 집. 마당 한쪽에 설치한 조형물은 갑빠오 작가가 시골집 강아지를 모티프로 완성한 작품이다.
사실 인서리공원은 ‘이미 완성된 프로젝트’라 보기 어렵다. 몇몇 건물은 아직 쓰임을 논의 중이고, 갑빠오의 집처럼 작가가 직접 꾸민 콘셉트 갤러리도 늘어날 예정이다. 무엇보다 박소연 대표는 이들 공간이 광양시가 주도한 도시 재생 사업의 목표처럼 긴 시간 지역과 더불어 호흡하며 점점 더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를 꿈꾼다. 지자체와 기획자, 현지인이 함께 만들고 가꾸며 조금씩 확장해가는 공간. 인서리공원은 이 오래된 마을 한복판에 심은 예술의 씨앗이다. 겨울을 뚫고 막 돋아난 새순을 살뜰히 지켜낸다면 곧 매화보다, 벚꽃보다 눈부신 봄을 선물할 터이다.
주소 전남 광양시 광양읍 남문길 65
문의 061-761-6701
광양 원도심 예술 산책 코스
인서리공원과 함께 둘러보기 좋은 광양 원도심 일대의 문화 예술 공간 셋.
전남도립미술관
전남의 새로운 문화예술 거점을 목표로 2021년 옛 광양역터에 개관한 도립 미술관. 최근 호평받은 〈조르주 루오〉 특별전을 포함해 국내외 거장의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여러 굵직한 기획전을 마련한 바 있다. 3년 차를 맞은 올해 첫 전시는 <신소장품>전으로, 전남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비롯해 전남의 풍경과 역사를 담은 다양한 장르의 소장품 컬렉션을 선보일 예정이다.
주소 전남 광양시 광양읍 순광로 660
문의 061-760-3242
광양예술창고
광양시가 문화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구광양역 앞 폐창고를 리모델링해 완성한 복합 문화 공간이 전남도립미술관과 함께 2021년 문을 열었다. 공간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내부 천장을 마감하지 않고 목재 트러스 구조를 유지한 것이 특징. 미디어 영상실과 전시실이 마련된 미디어A, 카페와 다목적실 및 어린이 다락방이 위치한 소교동B 등 크게 두 개 동으로 구성했다.
주소 전남 광양시 광양읍 순광로 664
문의 061-797-2733
광양역사문화관
광양의 역사, 문화, 유적, 인물, 주요 명소 등을 상세히 담고 있어 낯선 도시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싶은 여행자에게 추천할 만하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건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103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의 복제품. 등록문화재 제444호로 지정된 옛 광양군청 건물에 자리해 역사적 유산으로서 가치도 높다.
주소 전남 광양시 광양읍 매천로 829
문의 061-797-2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