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가 김란 한껏 사랑받은 기억, 어쩌면 삶의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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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란 작가와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결국 집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김란 작가가 단독으로 나선 인터뷰였지만, 대화 중 나온 많은 계절과 추억에는 그녀의 부모님이 함께 있었다. 라이프스타일은 생활과 행동, 그리고 사고의 양식. 그 일상의 지침이 집과 부모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이 새삼 뜨거웠다.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한 김란 작가. 반대편 공간에는 디자인룸도 마련되어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 작가에게 ‘자신만의 방’은 창작을 위한 절대적 조건. 이곳에서 그녀는 매일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이 아름다운 집에 사는 가족 구성원부터 소개할까? 먼저 이 지면의 주인공인 김란 작가. 서울과 런던에서 시각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고 회화와 도자, 조각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전천후 예술가다. 늘 생글생글, 에너지 뿜뿜에 종달새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도 들려줘 함께 있다 보면 어린 시절 볕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 때처럼 이내 즐겁고 행복한 기분이 된다. 그녀의 남편은 연구원. 이런저런 이유로 직업을 소상하게 밝힐 순 없지만 촬영하는 아내를 위해 가구도 옮기고 청소도 하려고 연차를 쓸 만큼 가정적이다. 그리고 이 부부의 자랑이자 보석인 이준, 이솔, 이찬, 이결. 첫째 준이가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이고 쌍둥이인 막내 찬이와 결이가 재작년 9월에 세상에 나왔으니 온 가족이 함께 집에 있으면 소동과 행복 사이, 매 순간이 역동적이고 다채롭게 흘러간다.
김란 작가가 직접 만든 화기. 뒤로는 엄마가 가져온 분재를 놓았다.
아이들은 모두 남자. 처음부터 자식 욕심이 많았거나 딸을 낳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그리 된 게 아니다. 둘째인 솔이를 끝으로 육아를 끝내려 했고, 남편에게 수술도 받게 했는데 수술 전날 보낸 다정한 시간이 쌍둥이 임신으로 이어졌다. 하늘이시여, 이제 겨우 육아의 늪에서 탈출하나 싶었는데 도돌이표라니. “제 사주에 남자가 많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실제로 친척 오빠가 열한 명이나 돼요. 어쩌다 보니 남자 아이만 넷을 키우는 엄마가 됐는데, 신기한 게 제가 손만 잡아주면 임신이 되는 거예요. 몇 년간 아이가 없던 유치원 선생님도 아이가 생겼고, ‘잘될 거야’ 기운을 불어넣어준 친구도 임신이 됐고. 아이들을 키우기 전만 해도 매사 낙천주의가 심했는데 육아를 하면서 ‘어둠’이 생겼죠. 하하. 하지만 그런 시간이 저를 더욱 성숙하게 하고 인생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게 아닐까 싶어요. 한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시간이 아닐까 좌절한 때도 있었지만, 아니더라고요.”
여섯 가족이 사는 집은 빨간 벽돌집. 빨간 벽돌은 필자가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외장재라 집에 들어서기 전부터 기분이 좋았는데, 이유를 대자면 한 장 한 장 쌓아 올려야만 완성되는 정성과 단장의 시간이 좋아서. 비유하자면 ‘공예적인 집’으로 마디마디 세심하게 쏟은 손길이 알게 모르게 내 삶을 지켜주는 바탕이 된다고 믿는다. 집의 스토리도 아름답다. 이 집의 터는 애초에 김란 작가가 부모님과 살던 집. 꽃과 나무가 마당에 그득하던 집이 부모님을 위해 버텨준 시간이 무려 50여 년. 허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나이가 들었고 신축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김란 작가의 작업은 일러스트레이션과 드로잉, 큰 사이즈의 페인팅은 물론 도자 작업까지 아우른다. 마치 피카소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꿈 역시 세계적 작가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집을 고치려니 수선 비용만 2억 원이 넘게 들더라고요. 그간 모은 돈과 대출을 최대치로 받으면 얼추 신축이 가능할 것 같았어요. 제가 실행력이 빠른 편이라 그렇게 결정하고 나서부터 1년간 건축 설계사 사무소만 찾아다녔어요. 최종적으로는 서가건축의 오승현·박혜선 부부 건축가와 함께했고요. 이곳에 있던 원래 집도 빨간 벽돌집이었어요. ‘그 느낌 그대로 지어주세요’ 가 첫 번째 주문이자 바람이었죠. 제 작업실도 그 집 지하에 있었는데, 창밖으로 보면 정원에서 애들 노는 게 보였어요. 이리저리 뒤엉켜 플라스틱 자동차를 끌고 다니고, 산수유를 따 먹고… 그런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 이 집을 지으면서도 창을 최대한 많이 냈어요.
저희 집은 늘 정원이 아름다웠어요. 엄마가 꽃과 나무를 좋아하셔서 분재를 30년 넘게 하셨거든요. 덕분에 집 곳곳에 장미 넝쿨이며 라일락, 감나무와 철쭉이 뭉게뭉게 가득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삼성동에서 살았는데, 봄과 여름이면 산수유며 장미가 흐드러져 동네 사람들이 구경 올 정도였고요. 제 친구도 많이 왔는데 수목원처럼 아름답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거실 풍경. 빈 캔버스처럼 극도로 심플하게 마감했다. 공간 한쪽에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타치니의 소파가 놓여 있는데, 조각 같으면서도 위트가 넘치는 디자인으로 포인트를 주고 싶었다고. 토넷 의자도 공간과 잘 어우러진다.
이야기는 분재 얘기로, 엄마와 아빠 얘기로 둥실둥실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제 작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꽃이에요. 엄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꽃을 많이 봐와서 그런지 지금도 꽃이 너무 좋아요. 언제 물을 주고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지도 본능적으로 알고요. 엄마를 도와 분재를 엄청 날랐거든요. 겨울이면 밖에 있던 분재를 집 안으로 일일이 들여와야 하니까. 그때부터 굵어진 팔뚝으로 애들을 키우고 있습니다.(웃음)
엄마의 분재는 우악스럽지 않고 고아해요. 어린 묘목을 키우면서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게 하고 애기 때부터 계속 들여다보면서 선을 잡아서 키우는 덕분에 수수하면서도 단단하고 고급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어요. 작은 가지가 우아한 선을 그리면서 지나가고, 작은 몸에도 수형과 비율이 빼어나요. 며칠 전에도 이런저런 분재와 화분을 가득 가져다주셨는데 개중에는 강아지풀도 있더라고요. 경기도 양평에 엄마가 직접 운영하는 분재원이 있는데, 정원에 있는 엄마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엄마는 참 우아하게 고독을 즐기는구나…”
거실과 맞닿아 있는 침실. 역시 심플한 공간 구성과 디자인이 돋보인다.
그녀가 인물 사진을 찍는 사이 가만 들여다본 분재는 분명 지금까지 내가 본 것과 달랐다. 작지만 단단한 뿌리, 그 위로 보기 좋게 뻗어 올라간 몸통, 시처럼 여운이 있는 잎과 선은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세계였다. 화분에 담긴 작은 생명에 감탄하며 들여다볼 구석이 얼마나 많던지. “이 집을 가급적 원형대로 짓고 싶었던 건 아버지와의 추억 때문이기도 해요. 아빠가 이 집을 짓기 전 집에서 돌아가셨는데, 저를 진짜 이뻐하셨어요. 오빠가 질투할 정도로요.(웃음) 한겨울에도 제가 집에 올 시간이 되면 정류장으로 꼭 마중을 나오셨어요. 저는 아빠 곁으로 얼른 달려가 시린 손을 아빠 점퍼 주머니에 쏙 넣고요.” 김란 작가는 유달리 밝고 낙천적인데 그 바탕에는 역시 부모의 사랑이 있었다.
내가 꾸리는 삶의 방향에 부모의 존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내친김에 하나만 더 얘기할까? “유년 시절을 생각하면 엄마가 해준 맛있는 음식이 꼭 생각나요. 특히 삼치조림. 무만 깔고 깔끔하게 하는데 달큼하면서 시원하고 말랑말랑하면서도 촉촉해요. 그 양념에 밥을 비벼 먹으면 아, 너무 맛있어요. 어릴 때부터 많이 먹어서 제가 생선을 진짜 고양이처럼 잘 발라 먹거든요. 아가미 살이 맛있다는 얘기도 많이 들어서 거기까지 깨끗하게.(웃음) 아이들에게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또 함께 먹는 시간만큼은 우리 가족의 문화로 꼭 물려주고 싶어요. 맛있는 걸 맛있게 먹은 것만큼 오래오래 남는 좋은 기억도 없는 것 같아요.”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의 원형을 좌표 삼아 서가건축과 함께 지은 빨간벽돌집
“전 행복하고 다정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런 가정에서 자랐고, 그런 사랑을 지금도 햇볕처럼 풍성하게 누리고 있는 그녀는 “내 존재와 작업의 근원은 가족과 자연”이라고 말한다. “런던에서 유학할 때 파리도 자주 갔는데, 퐁피두 센터에 갔을 때의 일이에요. 인상주의 시대의 미술을 쭉 전시하고 있었는데 마음이 너무 편하고 좋더라고요. 그곳을 거쳐 현대미술로 넘어가는데 잔인하고 무섭고…. 물론 현대사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현대미술의 존재 이유지만 저는 숨을 못 쉬겠더라고요. 내 결은 오랑주리 미술관이구나, 나는 숨 쉴 수 있는 예술을 해야지 싶었어요. 지금도 종종 생각하는데 집에 온 듯 아늑하고, 따뜻한 예술을 하고 싶어요. 보는 순간, 아 충만하다, 행복하다 싶은….”
실제 그녀의 그림은 ‘사랑’이다. 별 총총한 밤의 꿈속에서 아이와 다정한 포옹을 나누는 엄마, 놀라운 생명력과 화사함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 튤립…. 내가 특히 좋아하는 그림은 2019년 작 ‘I have things to tell you’인데, 파란 물·새·숲과 꽃이 캔버스 하단을 채우고, 그 위로는 자녀들이 인생에서 꼭 누리고 즐겼으면 하는 것들이 영어 단어로 음표처럼 흘러간다. hope, positive, joyful, family, love, moon, star, happiness, grapes, watermelon…. 사랑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그림은 때로 유치하지만, 그녀의 그림은 사랑의 표면을 지나 더 깊숙한 곳에서 건져 올린 듯한 순수와 낭만으로 아름답다.
공간 곳곳에는 그녀가 직접 만든 화병과 직접 그린 그림과 엄마가 가져다준 분재가 쉼표처럼 놓여있다.
한껏 사랑받은 기억이 그녀의 모든 것을 ‘진짜’로 만든다고 할까. 그림뿐 아니라 시도 열심히 쓴다. 역시 가족과 계절과 꽃과 일상이 주제. 평상시에는 안 찾다가 응가만 하면 아빠를 찾아가 결과를 알리는 막내, 가족의 숨결로 평화로운 새벽녘 풍경이 생생한 언어로 펼쳐진다. 책상에는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와 메리 올리버의 시집이 선생님의 책처럼 올라가 있다. 올해는 기약하던 첫 시집도 세상에 내놓을 예정이다. 위에서 말한 막내의 응가를 주제로 한 시의 한 구절만 볼까?
“어느 날 끄끄끄가 다가와 나에게 엉덩이로 말을 걸었다. 꾸욱 몽실한 엉덩이를 얼굴에 눌러대며 친근한 감사의 표시를 전하는데… 애정인지 장난인지 모를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꼬옥 안아주었다가 금세 도망간다.”
라이프스타일이란 살면서 후천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유년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일찍이 그 방향을 잡는 경우도 많다. 김란 작가의 경우에는 단연코 후자. “내 꿈은 세계적 작가가 되는 거예요”라고 짐짓 다부진 표정을 지으며 말하고, 그림에 글과 시를 본인의 인장처럼 자유롭게 새겨 넣는 그녀를 보면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한 사람을 얼마나 풍성하고 자유롭게 하는지 실감한다. 그 기억들은 본인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꽃이 많던 집, 사랑이 넘치던 부모님, 맛있던 삼치조림…. 누군가의 라이프스타일은 여기저기 기웃대지 않고 내 안에서 충만할 때 마침내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는데, 그녀는 그 어려운 과제를 운 좋게도 일찍이 끝낸 것 같다.
오픈 하우스&전시 도슨트
작가 김란의 홈 갤러리
김란 작가의 홈갤러리 전시 <꽃밭에 선 새벽 여행자>에 행복 독자를 초대합니다. 정성갑 대표가 모더레이터로 전시 도슨트를 진행합니다.
일시 5월 29일(수) 오전 11시(전시는 5월 29일~6월 5일)
장소 김란 작가의 자곡동 개인 주택(상세 주소 개별 공지) 인원 10명 참가비 1만 원
신청 방법 <행복> 홈페이지 ‘이벤트’ 코너 또는 전화(02-2262-7349)#지은집 #거실 #방/침실 #주방 #현관/복도 #건축가글 정성갑(갤러리 클립 대표)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