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용부 중 하나인 부엌은 건물 외부에서도 들어갈 수 있도록 계단을 연결했다. 빛이 들어와 지층의 느낌이 덜하다.
위,1 통의동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1층은 정림건축문화재단 사무실과 공용으로 사용하며, 입주민의 집으로 올라가는 별도의 입구가 있다.
2 외부에서 바라본 통의동집.
입주민 파티가 있던 날, 부엌에 모인 통의동집 입주자들.
1층에 있는 ‘라운지 어바웃’에서는 정림건축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세미나가 수시로 열린다. 문화적 혜택을 받는 것도 통의동집의 큰 장점.
빗살무늬 햇살이 내리쬐는 골목길에 들어서자 너른 기와지붕의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운다. 오래된 한옥과 나지막한 주택에 둘러싸인 길은 좁지만 고개를 들면 하늘이 천 평이다. 소음이 적고 자동차가 드나들기 어려워 느릿느릿 걸으며 생각하기 좋은 곳, 나른한 오후를 즐기거나 목적 없이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이들의 풍경이 익숙한 이곳은 통의동이다. 한 조각 하늘, 오래된 담장과 개 짖는 소리… 작은 기쁨을 누리기 좋은 길목 한편에 있는 3층 건물이 생경하다. 초록색 문 옆에 놓인 ‘라운드 어바웃Round About’이라는 입간판만 보면 이곳이 사무실인지, 카페인지 알 수가 없다. 이곳은 어떤 공간일까?
무심한 듯 함께 있고, 느슨하게 공존하고 이곳은 ‘통의동집’이라 불리는 ‘집’이다. 일곱 가구가 살 수 있고, 현재 입주자 다섯 명이 매달 임대료를 내고 거주한다(2013년 11월부터 입주자를 모집했다). ‘통의동 집’을 기획한 정림건축문화재단의 사무실이 함께 있는 1층 일부를 제외하면 공동 부엌이 있는 지하부터 2, 3층까지 모두 주거 공간이다. 공동 기획자인 서울소셜스탠다드Seoul Social Standard의 성나연 씨는 이곳을 형태로 정의한 ‘셰어 하우스’보다 가족이 함께 사는 ‘집’의 개념으로 이해하길 바랐다. “이 집은 남과 같은 사람들이 가족을 이루어 사는 곳이에요. 이러한 비전통적 가족 형태가 앞으로는 또 하나의 보통 가족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셰어 하우스보다는 ‘집’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단지 방의 개수가 좀 많고, 주방과 욕실이 더 널찍할 뿐입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이 있다는 점에서 기숙사, 고시원, 하숙집과 혼동하기 쉬워요. 하지만 그런 주거 형태는 사는 사람 대부분이 외로움과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임시 거주지지요. 가족과 고향의 개념을 상실한 현대 사회에서 혼자 사는 사람의 고독과 불안함, 높은 거주 비용과 그에 따른 삶의 질 저하 등 복합적 문제를 고민했고, ‘혼자이면서 함께 사는 집’이라는 새로운 거주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성나연, 김하나, 김민철 씨가 공동 대표로 있는 서울소셜스탠다드는 서울을 배경으로 사람과 시간, 공간이 만드는 다양한 관계를 분석하고 그안에서 우리가 지지해야 할 지향점을 찾는 청년 기업이다. 서울의 부동산 정보를 재정비하고자 한 ‘부동산, 서울’ 프로젝트(현재는 서울소셜스탠다드 프로젝트로 이름을 바꿨다), 청년 혁신 직업 책자 <일, 청년을 만나다>의 취재단을 비롯해 ‘2012 한일청년현장포럼’에서 셰어 하우스를 제안하는 등 주거와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지속해온 그들에게 통의동집은 자연스러운 기획이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지역에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정작 살고 있는 마을, 서울이란 도시에 대해 잘 모르더라고요. 서울 곳곳에서 지역 커뮤니티 공간으로 일반화되고 있는 카페를 하나씩 관찰하며 리서치를 시작했어요. 카페에서 책을 읽고 공연을 즐기는 등 공간 활용도가 확장, 높아지면서 주인과 손님이 닮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그러면서 타인과 일정한 간격을 두면서도 느슨한 공존을 하는 상태가 서울의 공동체 문화이자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나연 씨의 말처럼 통의동집은 그러한 확신에서 출발했다.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화두로 주거 문화에 대한 교육과 건축 신문 발행 등 건축과 관련한 다양한 연구 사업을 하는 정림건축문화재단과 공동 기획해 창업지원센터에서 자금을 지원받았다. 통의동에 건물을 임대하면서 가속도가 붙었고, 집주인을 설득해 주거용 건물로 레노베이션해 지난 11월부터 입주자를 모집했다.
일곱 개 방의 전용면적은 9.0~11.3㎡ 로 침대, 책상, 조명등, 에어컨 등 개인 가구를 기본으로 제공한다. 입주자 길규영 씨의 방.
1,3 모든 개인 방에는 전면 유리창이 있어 빛이 잘 들어온다. 창밖으로 이웃한 한옥의 지붕과 인왕산 풍경이 보인다.
2 개인 방 번호가 적힌 우편함.
공용 부엌에는 개인 수납함과 함께 대형 냉장고, 스팀 오븐 등의 공용 가전이 갖춰져 있다. 혼자 거주하면 구입하기 어려운 대형 가전을 사용할 수 있다.
우리 집을 닮은 진짜 ‘집’ 정림건축문화재단 사무실이 자리한 1층의 ‘라운드 어바웃’은 재단 사무실과 함께 사용하는 라운지다. 동네 도서관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건축 전문 서적이 빼곡한 이 공간은 입주민의 서재이자 쉼터이며 소통의 장소다. 재단에서 주관하는 각종 포럼과 세미나가 열려 입주민이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곳은 통의동집 주민뿐 아니라 동네 이웃을 위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주민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정한 의미의 마을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다음 목표입니다.” 서울소셜스탠다드의 김민철 씨는 라운드 어바웃이 누구나 편하게 들르는 사랑방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라운드 어바웃을 제외한 모든 곳은 오로지 입주자를 위한 공간이다. 먼저 지층에 자리한 공동 부엌은 요리하기에 적합한 구조로 꾸미기 위해 가장 신경을 썼다. 바깥쪽에 출입 계단이 따로 있어 1층을 통하지 않고 출입할 수 있는 부엌에는 테이블 세 개와 입주자가 각자 필요한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개인 수납장, 그리고 요리에 필요한 기본 식기와 전자레인지, 스팀오븐 등 원룸에서 소화하기 어려운 공용 가전 제품을 갖췄다. 냉장고에 물건을 보관할 때 방 번호가 적힌 플라스틱 박스를 이용하는 것이 흥미롭다. 여행을 앞두고 있거나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 빨리 처리해야 할 음식이 있다면, 박스 바깥에 꺼내둔다. 이는 ‘함께 먹어요’라는 뜻이다.
2층부터는 주거지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면 거실과 개인 방이 있다는 점에서 일반 가정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2층에는 방 네 개와 세탁실과 공용 샤워실이 있고, 3층에는 방 세 개가 있다. 방 일곱 개의 크기는 위치에 따라 9.0~11.3㎡로 침대, 붙박이장, 책상, 의자, 조명등, 에어컨, 무선 네트워크를 제공한다. 처음 개인실에 들어갔을 때는 1인 가구가 살기엔 면적이 꽤 협소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욕실과 부엌, 세탁실이 한 공간에 있는 원룸을 생각한다면 공간 활용도가 훨씬 높은 셈이다. ‘우리 집’을 닮은 진짜 ‘집’이다.
타인과 가족이 될 수 있을까? 행동하는 긍정에 관한 행복 수업을하는 ‘옵티미스트 클럽’에서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이라는 질문을 하는 가치 엽서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1천여 장의 가치 엽서를 분석한 결과 40.9%가 ‘사람과의 관계’에 가치를 둔다고 답했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한다는 말이다. 고향과 집의 의미를 상실한 현대인이 타인과 가족 같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김민철 씨는 사람과의 거리를 은근하게 유지하면서 함께 사는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셰어 하우스야말로 현대인이 바라는 새로운 주거 형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함께 살면 여러 가지 장점이 많아요. 원룸에선 소화하기 어려운 공용 물건을 사용할 수 있고, 면적과 지역의 시세를 비교하면 월세(62만~67만 원)가 높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는 곧 거주의 질과 연결됩니다. 또 인기척 없는 어두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서, 말을 건넬 수 있는 누군가에게 가족과는 또 다른 공동체 의식을 느껴요. 비슷한 세대가 생각을 나누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타인과의 삶을 통해 독립 생활을 하는 지혜를 배우기도 합니다. 혼자 살면서 느끼는 안전에 대한 걱정도 없지요. 심지어 택배까지 받아주는걸요.”
통의동집에 입주 하려면 먼저 입주자 카드를 작성해야 한다. 공동생활을 해본 경험은 있는지, 공동생활 규칙에 동의하고 성실하게 지킬 수 있는지 등 기본 생각을 체크하는 단계다. 입주자 카드에 체크한 내용을 토대로 원하는 이에 한해 통의동집 투어가 이어진다. 이 모든 것이 입주 후의 갈 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이다.
1, 2 2층에는 드럼세탁기와 가스 건조기, 개인 사물함을 갖춘 세탁실과 샤워실이 있다.
3 냉장고에 물건을 보관할 때는 개인 방 번호가 적힌 수납 박스를 사용한다.
내가 통의동집에 사는 이유 “첫 번째 입주자로 조언을 구할 사람도 없었어요. 전혀 모르는 남과 사는 것이 불편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지만, 살다가 불편하면 그때 걱정하자고 생각했죠. 입주자 1호로 2주간 혼자 지내다가 새 입주자가 들어오니까 사람이 사는 집 같고 오히려 반갑던데요? 기본 규칙은 제가 수용할 수 있는 것들이라서 문제는 없어요. 규칙이 없으면 갈등도 심해지니까요. 아침잠이 많아서 열 개가 넘는 시계에 알람을 설정하고 자는데, 주변 입주자에게 불편을 주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후후.”
건축에 관한 관심과 서촌의 매력에 끌려 통의동집 1호 입주자가 된 김유나 씨는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살아보고 싶어 첫 독립 생활을 결심했다.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동생활을 하는 불편함은 못 느끼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 입주자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자주 대화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다. “현재 카톡방과 네이버 밴드 같은 그룹 채팅방을 이용해 주민 회의를 하고 있어요. 즉각 회신이 오고, 굳이 만나지 않아도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어서 모두 애용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주기적으로 만나 대화할 수 있게 되겠죠?” 프랑스 유학을 준비 중인 길규영 씨는 오랫동안 자취 생활을 해오면서 폐쇄적인 일상에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만큼 단절된 일상에, 학업 준비 스트레스까지 쌓여 우울증을 앓았어요. 이사를 하려던 차에 친구가 일본에서 직접 경험한 셰어 하우스를 추천하더군요. 아직은 다른 입주자와 서먹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 심적 위안을 받습니다.”
공연 기획 아카데미에 다니는 김지현 씨는 대학 입학 이후 기숙사, 원룸, 홈스테이 등 다양한 주거 형태에서 머물러봤지만 행복한 적이 별로 없었다고 고백했다. “다른 곳은 우리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요. 통의동집은 독립 구조의 개인 방과 공용부가 잘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기획자가 건축을 하는 분들이라는 점도 신뢰가 갔죠. 드럼세탁기와 가스 건조기 등 저 혼자 장만하기 어려운 공용 가전이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고요. 아직 더 살아봐야겠지만 공동생활을 하는 불편함은 전혀 못 느껴요.” 통의동집은 입주민이 자발적인 관리를 제안하기 전에는 제3의 운영자를 두어 불편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운영 방식은 입주민의 의견을 반영해 자율적으로 조절할 계획이다.
1 3층에는 미니 세탁기와 냉장고 등이 마련돼 있다.
2 요리 에세이 <요나의 키친>의 저자인 고정연 씨와 함께한 첫 번째 입주민 파티.
3 파티에서는 입주민이 서로 인사를 하고 음식을 함께 맛보며 통의동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4 통의동집의 공동 기획자인 정림건축문화재단의 이경희, 구선정, 박성택 씨 그리고 서울소셜스탠다드의 성나연, 김민철 씨.
오늘은 입주민 파티하는 날! 한겨울의 강추위가 몰아치던 어느 일요일 저녁, 통의동집 부엌에는 이른 오후부터 기획자와 입주민이 모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입주민이 모두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 하고 인사를 나누는 입주민 파티가 있는 날이기 때문. 요리 에세이 <요나의 키친>의 저자이자 이태원에서 디저트 카페 ‘플랜트Plant’를 운영하는 고정연 씨가 오늘 파티의 게스트 셰프. 1인 가구를 위한 ‘통의동집 레시피’를 직접 제안하고 입주민과 함께 나누는 특별한 파티다(앞으로 지속적으로 통의동집 레시피를 만들어 제안할 예정이다). 파티의 메뉴는 ‘검은깨 페이스트로 만드는 나와 우리의 요리’. 재료를 구하기 쉽고, 공간 활용이 용이해 누구나 간편하고 신속하게 요리할 수 있는 리소토다. 파티에 모인 입주민들은 그제야 정식으로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눴다. 서로 같은 층에 살면서도 활동하는 시간이 달라 그동안 인사를 잘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다. 음식을 주제로 서로 질문하고 요리도 함께 하면서 보이지 않던 거리감이 훨씬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라운드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일상을 논하는 풍경에서 집에서 느끼는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사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있을까? 정신없이 하루를 마감하고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 순간 우리를 무장해제시키는 따뜻한 온기와 익숙한 냄새,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마음의 평온을 주는 가족의 얼굴… 그런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일 것이다. 혼자 살지만 함께 어울리며 지내는 통의동집, 이곳에서 우리가 진짜 가족이 될 수는 없지만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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