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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세 개 문, 여덟 가지 마감이 있는 디자이너의 비스포크 홈
철저히 집주인에 맞춘 디자인, 공예가 공간의 일부가 되는 아트 인테리어로 집을 하나뿐인 작품으로 바꾸는 길연(kilyeon.com)의 이길연 대표(@kilyeon76). 그가 신혼 생활을 위해 꾸몄던 집을 새롭게 고쳤다. 가족의 생활에 맞춰 재탄생한 이길연 대표의 두 번째 홈 에디션.

새롭게 고친 집에서 만난 이길연 대표. 하나하나 마음을 담아 선정한 작품과 가구, 마감재가 조화를 이룬 거실은 집보다는 스튜디오처럼 느껴진다. 그가 앉은 소파는 체코티 콜레지오니의 D.R.D.P(Deux Reve Du Printemps) 소파. 앞쪽 아크릴 테이블은 윤라희 작가의 작품. 벽면에 걸린 세라믹 부조는 이은 작가의 작품. 왼쪽 벽면 옷걸이는 김무열 작가의 작품. 오른쪽 스툴은 신상호 작가의 작품.
거실 통창 앞에 놓인 스피커와 김재용 작가의 도넛 작품. 손수 수집한 크리스털 잔이 함께 모여 있다.
디자이너 이길연은 오래 전, 자신의 집을 고친 프로젝트가 계기가 되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했다. 획일적인 아파트도 그의 손길을 거치면 단독주택처럼 변신한다. 단순히 겉 표정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집주인의 생활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그에 꼭 맞는 공간을 꾸미기 때문. 식료품을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구입하는지, 온라인으로 대량 주문하는지, 생수를 마시는지, 아니면 정수기를 이용하는지 등 사소한 습관도 그에게는 디자인의 실마리가 된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라이프스타일 컨설턴트와도 같아요. 누구와 함께 사는지, 가족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이 그릴 미래까지도 꿰뚫어봐야 하죠. 그렇게 앞으로 일어날 변화까지 고민해서 고친 집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차이가 드러납니다.”

그렇게 20여 년 동안 수많은 맞춤 집을 지어온 그가 2년 전,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을 고쳤다(첫 레노베이션 작업은 <행복이 가득한 집> 2008년 7월호에서 소개했다). 그를 디자이너로 발돋움시킨 프로젝트가 같은 장소에서 다시 한번 이뤄진 것이다. “15년 전에는 제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것을 가족에 맞췄어요. 디자이너의 공간다운 면모는 덜해졌을지 몰라도, 생활에는 훨씬 맞는 모습이 되었죠.”


이윤정 작가가 작업한 금속 고리에 걸어놓은 쓰레받기는 류연희 작가의 작품.
USM 수납장을 뚫어 설치한 안방 세면대. 구본창 작가의 비누 작품과 조화를 이룬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대수선이 되어버린 4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탄생한 그의 두 번째 비스포크 홈. 이름하여 다섯 개의 세면대, 스물세 개의 문, 여덟 가지 마감이 있는 집이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아파트에서 흔히 예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등장한다. 리넨을 덧댄 유리 슬라이딩 도어를 열면 방인지, 거실인지, 주방인지 한눈에 용도를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이 양옆으로 펼쳐진다.

“핵심은 달라진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공간을 재정비하는 것이었어요. 현관이나 수납공간처럼 기능을 담당하는 곳은 최소한의 면적만 할애하고, 나머지 공간을 넉넉하게 쓰자는 생각이었죠. 주방도 가전을 정리하고, 일주일 먹을 정도의 식료품만 그때그때 구입하는 지금의 생활에 맞춰 크기를 줄였고요.”


다이닝룸에 있던 하이백 키아바리 체어. 네덜란드 빈티지 가구로 뒷면이 특히 아름답다.
침실에는 USM 수납장을 칸막이처럼 세워 프라이버시를 확보했다.
덜어낸 면적은 다이닝 공간이나 거실처럼 가족이 오래 머무르는 장소에 더해졌다. 그중에서도 다이닝 공간은 작품도, 가구도, 뷰도 가장 힘을 준 곳. 신상호 작가, 허명욱 작가, 윤라희 작가의 테이블이 줄지어 놓여 있고, 한강이 내다보이는 통창 아래 벽면에는 이헌정 작가의 세면대, 그의 제자인 김무열 작가가 만든 수건걸이를 설치했다. 세라믹과 옻, 아크릴까지 다채로운 가구 소재가 화이트 톤의 공간에 조화롭게 녹아든다. “다이닝 공간은 누군가를 초대해 식사하고 함께하는 자리잖아요. 낯설기도, 어색하기도 한 순간에 창밖으로 보이는 뷰와 벽에 걸린 작품은 좋은 대화 소재가 돼요. 그때그때 가구나 작품 배치를 바꾸면서 분위기를 전환하기도 하는 공간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변화는 공간의 분리다. “아이가 자라고 강아지와 함께 살다 보니 점점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게 필요해졌어요. 그렇게 스물세 개의 문이 탄생했죠.” 특히 복도와 거실, 다이닝룸을 가르는 커다란 슬라이딩 도어는 공간을 느슨하게 분리하는 문인 동시에 작품을 거는 벽면이 된다. 이 문 덕분에 거실 두 곳과 다이닝룸은 때로 프라이빗한 세 개의 방으로 재탄생한다. 가족과 대화하거나 손님이 왔을 때도 한곳에만 머물지 않고 옮겨 다니며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공간을 누리는 경험이 훨씬 풍요로워진 것. 이 외에도 주방의 슬라이딩 도어는 다이닝룸에 있는 손님이 주방에 쌓인 설거지 대신 대화에 집중하게 하고, 거실과 안방, 거실과 다이닝룸 사이에 설치한 문은 벽과 마감을 통일해 평소에는 닫아놓았다가 필요할 때 지름길처럼 사용한다고.


허명욱 작가가 날마다 다른 색으로 옻칠한 스틱을 모아 만든 설치 작품이 걸린 다이닝 공간. 신상호 작가의 테이블, 네덜란드 디자이너 피트 헤인 에크Piet Hein Eek가 스크랩 우드로 제작한 원 빔 벤치가 함께 놓여 있다. 폭 1.8m의 유리 슬라이딩 도어는 다이닝 공간과 거실을 오가며 프라이버시를 유연하게 조절한다.
거실 겸 응접실 또한 유리 슬라이딩 도어로 개폐를 조절해 방이 되기도, 오픈 스페이스가 되기도 한다. 문을 열면 다이닝 공간과 또 다른 거실이 내다보인다. 천장에 걸린 조명은 루이스 폴센의 PH120, 소파는 빈티지 가구를 커버링한 것.
생활에 맞추어 몸체를 탄탄히 짰다면, 그다음은 적절히 채우는 단계. 이길연 대표의 공예 감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아트와 공예 애호가인 그가 이용하는 장치는 바로 수많은 작가의 작품. 이를테면 우국원 작가의 미러 작품을 매립한 아이 방의 문처럼. “아이는 매일 문을 여닫을 때마다 작품을 보고 경험해요. 이런 장면이 킥포인트예요. 그동안 공간에 어울리는 작품을 제안하고 배치하는 컨설팅을 해왔다면, 이제는 더 나아가 작가를 처음부터 공간 프로젝트에 참여시켜 작품이 공간에 녹아들도록 하려 해요. 작품보다 공간이 중심이 되기를 바라는데, 저희 집부터 조금씩 시도해본 거죠.”

이혜미 작가가 빚고 은칠을 한 욕실 세면대도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다. “원래는 그릇이나 소반 같은 오브제를 주로 작업하는 작가인데, 개인적으로도 친한 사이다 보니 좀 더 큰 규모의 작업도 같이 해봤으면 싶었거든요. 그 시작을 우리 집으로 해보자고 제안했는데, 흔쾌히 승낙해줘서 작가도, 저도 새롭게 시도해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다이닝 공간을 재배치해 탄생한 또 하나의 거실. 라인의 반복을 지양하는 이길연 대표의 취향에 맞추어 바닥과 벽면의 모든 마감재는 삼베 위 도장, 스페셜 페인트 등 이음매가 생기지 않는 소재를 썼다. 안쪽 슬라이딩 도어에는 이배 작가의 작품을 걸었다.
슬라이딩 도어를 사이에 둔 다이닝 공간과 주방. 주방은 최소한의 면적으로 줄이고, 다이닝룸에 충분한 공간을 할애했다.
아이가 렌즈를 끼고 양치할 수 있도록 따로 세면대를 설치했다. 세면대 룸의 슬라이딩 도어에는 우국원 작가의 미러 작품을 매입했다. 이길연 대표가 추구하는 공간에 녹아든 작품의 대표적 사례다. 왼쪽 개구리 인형은 이지영 작가의 작품.
집은 그가 궁금해하던 소재를 테스트하는 실험장이기도 했다. 삼베 위에 페인트를 칠하는 길연의 시그너처 기법을 비롯해 한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스페셜 페인트 등 여덟 가지 소재로 벽과 바닥을 마감했다. “단순히 정보로만 자재를 이해하고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클라이언트에게 장단점을 이야기해줄 수 있었으면 해서 직접 써보게 됐어요. 자주 여닫는 수납장과 물이 직접 닿지는 않지만 항상 습한 욕실 벽면에 삼베를 써보고, 넓은 바닥에 페인트를 시공한 것, 폭이 1.8m에 달하는 유리 슬라이딩 도어 모두 그렇게 시도한 것이죠. 실패한 경우도 있어요. 바닥은 이렇게까지 오염될 줄 몰랐거든요. 저희 집이라 다행이었죠.”

건축과 공예는 모두 ‘실제 쓰인다’는 점에서 실용예술에 속한다. 감상이 주목적인 아트 작품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집의 장면은 생활하며 비로소 완성되고, 쓰이면서 더욱 아름다워져야 한다”는 디자이너 이길연의 말은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공예와 건축이 어우러진 집에 가족의 생활이 나날이 동기화되며 그의 집은 다시 한 번 완성되고 있다.



생활에 맞춰 조율한 공간과 그 속에 녹아드는 작품
직접 디렉팅한 마감재가 모여 완성한 공예로운 풍경

1 이헌정 작가의 세면대와 김무열 작가의 블루 훅, 판티니 수전을 설치한 다이닝 공간. 세면대는 공간에 적절한 크기로 작가가 맞춤 제작했다. 정지숙 도예가의 작품 ‘느낌의 덩어리’가 왼쪽 벽면에 걸터앉아 있다. 이곳에서 손님이 손을 씻거나 남은 음료를 버리기도 하고 얼음을 담아 와인을 칠링하기도 한다.

2 슬라이딩 도어에 설치한 윤라희 작가의 아크릴 오브제 손잡이. 아크릴의 반투명한 물성이 투명한 유리문과 은은하게 어울린다.

3 거실에 놓여 있던 벤치 겸 디딤대. S갤러리 대표의 소장품으로 힐로재에도 사용했다.

이혜미 작가가 손수 빚고 은으로 칠한 욕실 세면대. 이 집을 위해 처음 시도한 작업이다. 밝은 색감으로 거울과 함께 작은 욕실을 한층 넓어보이게 하는 존재다.

5 바퀴 달린 소파, 김상훈 작가의 페인팅 러그가 놓인 거실 겸 응접실. 오른쪽 발은 김수연 작가의 작품.

6 길연의 시그너처인 삼베 마감. 종이에 배접한 삼베를 도배하고 그 위에 페인트를 덧칠해 완성한다. 주방 수납장에도 적용했는데, 2년이 지나도 처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7 켈리박 작가가 이길연 대표와 그의 딸 버전으로 터치를 더한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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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경화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