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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노베이션 스토리 흔적 위에 다시 지은 집
잘 지은 건축은 도시에서 잘 만든 공예품과 같은 역할을 한다. 사무소효자동 서승모 소장, 라흰갤러리 정은진 대표, 그들의 가까운 지인이자 건축주인 정선희 씨까지 세 사람이 합심해 1959년 지은 목조 주택을 고친 집, 후암동 H 하우스는 건축이 공예가 되는 순간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붕 구조체를 그대로 드러낸 후암동 H 하우스 2층 거실에서 만난 프로젝트의 주인공들. (왼쪽부터) 건축주 정선희 씨와 사무소효자동 서승모 소장, 라흰갤러리 정은진 대표. 

건축가 서승모 1971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도쿄 예술대학 건축과에서 미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2년간 동 대학교 비상근 강사로 일했으며, 2004년 서울에서 독립했다. 현재 사무소효자동(
samusohyojadong.com)의 소장으로, 주요 작업으로는 띠어리 파사드 레노베이션, 현대카드 바이닐 앤 플라스틱 파사드 레노베이션, 이수화학 본사 로비 레노베이션, LCDC 서울, C하우스, SJ한옥 레노베이션 등이 있다. 
디자이너 정은진 파리 MJM에서 실내 건축과 실내장식을 전공하고, 한국에 돌아와 인테리어 디자이너 겸 가나아트센터의 아트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현재 라흰갤러리(@laheen_gallery) 대표로 전시 공간을 운영하며, 공간 디자인과 스타일링에 관한 업무도 담당하고 있다. 라흰갤러리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현대미술 작가를 소개할 뿐만 아니라, 고객의 공간에 어울리는 작품을 소개하는 데 힘쓰는 중이다.

정은진 대표가 구현한 셰이커 양식. 오리지널 디자인을 바탕으로 가구와 촛대, 단추까지 직접 계획했다.
남산과 서울역 철도 사이에 자리한 후암동은 역사의 흔적이 지층처럼 쌓인 동네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의 거주지였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 기지가 들어서면서 수많은 서양인이 자리 잡았다. 여러 역사가 혼재된 장소는 서로 다른 양식을 품은 독특한 건축물 또한 만들어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후암동 H 하우스다. “외관부터가 우리나라 집 같지 않았어요. 1층은 미국식 목조 주택, 2층은 일본식 가옥과 한옥이 뒤섞여 있었죠. 벽돌로 지은 연립주택만 가득한 동네에 보석 같은 집이 갑자기 솟아 있는 느낌이 좋았어요.”

당시 어머니와 함께 살 적당한 크기의 단독주택을 찾고 있던 정선희 씨는 색다른 분위기의 이 집을 발견하고 조금만 고치면 근사해질 것이라는 생각에 곧장 구입을 결심했다. “호기롭게 구입했지만,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원래 살던 아파트에 계속 지내게 됐고, 이곳은 한동안 세를 주던 상태였어요. 어느 날 서승모 소장님과 사석에서 대화하다 후암동 집 이야기가 나왔는데, 집을 둘러보고서는 작업하면 재미있겠다고 하셨죠. 라흰갤러리 정은진 대표님은 오래전부터 자매처럼 지내는 사이였어요. 처음 후암동을 알려준 사람도, 집을 보러 같이 간 사람도 언니였고, 인테리어 일도 하고 있었으니 같이 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웠어요.”


기존의 미국식 집 구조와 아치형 벽을 유지한 1층 거실. 셰이커 양식의 가구, 몰딩이 공간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1층 초입의 거실. 양쪽에 난 창으로 빛이 들어와 특히 밝다. 창밖으로 정원과 동네 풍경이 내다보인다.
서승모 소장은 동화 속에 나오는 집 같았다며 이곳의 첫인상을 소개한다. “현관에는 삼각형 모양 페디먼트 장식이 있고, 박공지붕과 자그마한 정원이 있는 모습이 마치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집 같았어요. 서울은 5백 년 고도라지만, 교토나 파리와 달리 한옥 아니면 아주 최근의 것만 있어요. 그런데 그사이 시기에 지은 집이 잘 남아 있던 거죠. 여러 차례 덧댄 흔적이 있지만 원래 모습이 유지되어 있었고요. 이런 집이 서울에 또 있을까 싶었어요.” 정은진 대표도 이곳에서 오래전 살던 동네의 정취를 느꼈다. “전부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직 남아 있더라고요. 전체적으로 온화하니 좋았어요.”

세 사람은 집에서 받은 좋은 인상을 바탕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용도는 정선희 씨의 세컨드 하우스. 기존 형식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각자의 언어를 더해갔다. 서승모 소장이 건축을 맡아 큰 틀을 잡았고, 정은진 대표는 인테리어와 작품 스타일링으로 톤을 입혔다. 정선희 씨는 그들의 건축주이자 지지자로 함께했다.


1층의 다른 공간과 마찬가지로 욕실에도 셰이커 양식을 적용했다.
1층 거실. 여러 겹의 아치 벽 사이로 우병윤 작가의 작품과 김규 작가의 달항아리가 보인다. 달항아리 뒤에 걸린 그림 속의 원이 달처럼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을 자아낸다.
미국 목조 주택 양식이 강하던 1층은 본래 구조를 최대한 유지했다. 가운데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양쪽으로 거실 두 개가 펼쳐진다. 문이 따로 나 있지 않아 전체적으로 한 공간처럼 느껴지는 거실을 지나면 좀 더 정적인 분위기의 거실 겸 응접실, 주방과 다이닝 공간,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실이 차례로 나타난다. 가장 밝은 전면의 거실에서 들어갈수록 조금씩 조도가 낮아지는데, 그에 맞춰 더 사적인 공간을 배치한 것.

1층 공간 속 다양한 요소를 하나로 묶는 장치는 셰이커shaker 양식의 가구다. 셰이커 양식을 오랫동안 좋아하고 연구해온 정은진 대표가 공간 전체에 통일된 스타일을 구현했다. “셰이커 양식은 검소한 삶을 추구하던 19세기 미국 셰이커 교도의 생활양식이에요. 가구도 기능에 부합한 형태로 간결하게 만들고, 불필요한 공간을 차지하지 않도록 벽에 걸어두는 것이 특징입니다. 모던하면서도 동양적인 느낌이 이곳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겠다 싶었죠. 오리지널 디자인을 참고해 거울이나 촛대 같은 소품부터 몰딩까지 비례를 맞추고 단추도 하나하나 손으로 깎아서 제작했어요.”


2층 주방과 다이닝 공간. 기존의 박공지붕 구조체를 다듬어 살리고, 구조 보강이 필요한 곳에는 철골 보와 기둥을 설치하고 하얀 색으로 도장했다.
2층 거실. 욕실 바깥쪽 벽면에 설치한 작품은 켈리 박 작가의 ‘러브’.
2층은 박공 지붕 구조체를 지키되 공간에는 많은 변화를 줬다. 서승모 소장은 우선 숨어 있던 박공지붕 구조체를 다듬어 살려냈다. 마치 깨진 기물을 이어붙이는 복원가처럼 과거의 흔적을 발견하고 새롭게 잇는 과정이었다. “대들보를 올린 것은 1959년인데, 철거하다 보니 1940년대 지어진 기둥에 심지어 흙벽도 나왔어요. 그전에도 다른 집이 있었던 거죠.” 그렇게 부재를 하나하나 매만져 지붕을 만들고 조명도 구조의 일부인 듯 느껴지도록 디자인과 재료를 맞췄다. 공간 한가운데에 욕실을 배치한 평면도 독특한 특징.

“2층에는 건축주가 소장한 작품을 설치할 벽면을 확보해야 했어요. 가운데에 욕실을 배치해 자연스럽게 네 개의 면을 만들었고, 영역도 자연스럽게 구분돼요.” 전과 확 달라진 2층을 정선희 씨는 특히 만족하는 공간으로 꼽는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라 벽으로 딱딱 나누면 답답할 것 같고, 그렇다고 방이 아예 없는 것도 원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순환하는 동선이 만들어지니 행위에 따라 유연하게 쓸 수 있어 정말 좋았어요.”


서재의 두 벽면은 미닫이문으로 계획해 그때그때 유연하게 바꿔 쓸 수 있다. 마루 면과 정확히 높이를 맞춘 문틀도 정교한 마감을 보여주는 디테일.
서승모 소장이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렸다는 외관. 외벽은 스투코로 마감하고, 현관과 페디먼트 장식에는 짙은색 페인트를 칠했다.
정교한 공예 작품처럼 건축과 인테리어가 딱 맞아떨어진 모습도 이 집만의 묘미다. 벽면은 작품을 걸 위치를 미리 정해 보강했고, 정은진 대표가 디자인한 커튼에 맞추어 창은 커튼 박스 없는 형태로 설계했다. 서로 긴밀하게 의견을 나누며 함께 일했기에 가능했던 것.

“이전까지의 일상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곳이 좋은 전환점이 되어주었어요. 이제 찬찬히 시도해보려 해요. 갤러리와 협업해 도예가와 다회나 가벼운 전시를 여는 것도 기획해보고 있어요. 그렇게 1층은 제 놀이터로, 2층은 언젠가 제가 온전히 거주하는 공간이 되어 함께 나이 들어가지 않을까 싶어요.”

잘 지은 공간이 주는 힘으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정선희 씨의 이야기를 듣고 서승모 소장이 마지막 말을 남겼다. “아무리 개인 주택이라도 건축은 완전히 사적일 수 없어요. 좋은 사회가 되려면 다양한 연령대와 젠더의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건축물이 하나하나 각자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고, 그렇게 똑바로 선 건축이 다양하게 모여 있으면 좋은 도시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암동 H 하우스는 이곳만의 고유함을 지닌 건축을 짓고, 또 거기에 집주인의 생각과 행위가 입혀져 오롯이 서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완성되어서 좋았습니다.”



세 사람이 각자 몰두한 순간이 하나의 공간으로 공명하며 만들어진 장면들

1 정은진 대표가 첫손에 꼽는 이 집의 공예적 디테일. 커튼의 형태와 거는 방식, 고리까지 손수 계획했다.

2 침실에 걸려 있던 양정모 작가의 한지 조명. 한지로 마감한 벽면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3 셰이커 양식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레퍼런스 삼아 디자인한 촛대와 단추.

4 콘솔에 놓여 있던 인센스 버너. 작은 소품 하나도 이곳에서는 분위기를 더하는 요소가 된다.

5 2층 거실 벽면에 설치한 작가 외르크 오베르크펠의 작품 ‘스트레인지 폴리 XI’. 바라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공간에 다른 인상을 준다.

사용할 일이 없을까 봐 고민했다는 말이 무색하게 정선희 씨는 1층 벽면을 가로지르는 몰딩에 가방도, 도구도, 식물도 척척 걸어놓는다. 몰딩 위에는 무늬목을 입혀 질감과 색감을 맞췄다.

셰이커 양식의 핵심은 의자다. 걸기 쉽도록 최대한 가볍고 간결하게 디자인했다. 제작은 이목원 가구공방에서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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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경화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