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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부부의 집 오선지가五線之家 욕망하지 않는 건축가가 안긴 명작
“수시로 밖에 나와서 이 집을 보곤 해요. 제 작업실 쪽으로 개구부를 적당히 뚫은 것이나 창문틀 한쪽을 사선으로 처리한 것이나 볼수록 참 명작이구나 싶어요.” 이 집 주인인 작곡가 남편은 “다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이 집이 조남호 소장님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가 아닐까 싶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이 점잖은 건축가의 ‘욕망하지 않는 품위’ 덕분이라고 느꼈다.

밖에서 바라본 오선지가. 면으로만 간결하게 떨어지는 블록의 연대와 조합이 근사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구부의 균형도 놀랍도록 섬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관 주변 벽면에만 세로로 골을 파 디테일을 주었다.
집을 짓는 것은 욕망의 충돌이기도 하다. 건축주는 많은 돈과 노력을 들여 평생의 꿈을 실현하고 싶고, 건축가는 건축 주의 의뢰를 지렛대 삼아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다. 양쪽 모두 행복한 윈윈의 경우도 많지만, 어느 한쪽이 실망한 채로 끝나는 제로섬의 사례도 많다. 이 집의 주인 부부는 모두 음악가다. 아내는 피아니스트 이성주 씨이고 남편은 작곡가로 활동한다(개인적 이유로 이름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아파트에 살던 부부에게도 집 짓기는 많은 것을 건 모험이자 결단이었다.

남편은 전국을 돌며 이름난 건축가들을 만나러 다녔다. 휴, 하는 순간도 많았다. 유명하면 뭐 하나. 나랑은 안 맞는걸. 부산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지쳐가던 어느 날, 그냥 동네에서 찾아보자 하는 심정으로 검색창에 양재동, 건축가 하고 쳤다. 솔토지빈건축이 떴고 그렇게 조남호 소장을 만나러 갔다. 한 시간 가까이 면담을 했고 ‘이분이다’ 하는 확신이 들었다. “집에 왔는데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드디어 찾았다고.(웃음)” 아내의 말이다. 대체 어떤 대화가 오갔길래 점점 조급해지는 마음의 ‘뜨거운’ 건축주를 한 번의 만남으로 매혹할 수 있었을까?

건축주와 건축가의 그날 미팅에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돈 얘기였다. 모두가 핵심으로 묻는 ‘그래서… 비용은 얼마나 생각하고 계십니까?’ “고객분과 처음 만날 때는 어떤 집을 짓고 싶으신지 상담만 해드립니다. 계약과 홍보에 애착을 가지면 행복하지 않더라고요. 그저 도움이 되면 좋겠다 싶은 마음으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집에 대한 이야기를 편히 나눕니다.”


설계 당시부터 중요한 공간으로 논의된 피아노방. 별채처럼 개별적 분위기를 지니는 곳으로 통창 너머로는 정원이 펼쳐진다.
그렇게 집 짓기가 시작됐다. 위치는 주변으로 농원과 숲이 한적하게 펼쳐진 염곡동. 집을 둘러본 감흥부터 이야기하자면 근래 가본 집 중 유독 편안함이 돋보이는 곳이었다. 중정을 중심에 두고 반듯한 네모 상자를 입체적으로 연결한 구조.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으로 반듯한 정원이 펼쳐지고, 그곳을 눈에 담으며 직진하면 다시 큼지막한 중정이 선물처럼 드러난다.

정면의 녹색 풍경에 끌려 다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면 이번에는 오솔길처럼 소담한 담벼락과 정원. 한국의 건축을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환유의 풍경’이 직선의 동선으로도 살뜰하게 구현 가능하다는 사실이 새로운 발견으로 와닿았다. 둘레길처럼 에두르지 않아도 계속해서 새로운 풍경과 땅, 그리고 하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마감은 노출 콘크리트에 불소수지 코팅. 밝고 깨끗한 도화지 같은 색감과 질감으로 해가 정원을 비추면 넓은 벽면에 그림자가 일렁인다. 집 구조는 상공에서 보면 더 아름답다. 주차장 위로 네모 상자를 사뿐 들어올리고 그 옆으로 어깨동무하듯 안채가 펼쳐지는데, 역시 반듯하게 중정을 만들어 산뜻한 개방감이 느껴진다.


이 집에서 중정은 큰 숨구멍 역할을 한다. 중정 바닥과 내부 방의 단차가 거의 없어 시야가 더 편안하고 넓게 확장된다.

그 앞으로는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만나는 첫 번째 정원과 왼쪽에 별채처럼 자리한 아내의 피아노방. “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20년 넘게 쳐왔는데 이런 소리가 나오는지 처음 알았어요. 아파트에 살 때는 사방에 20cm 두께의 방음재를 넣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울림이 충분히 증폭되지 않더라고요. 이곳에서는 뚜껑을 닫고 연주해도 소리가 너무 풍성해서 연주회장에 와 있는 것 같아요.” 아내에게 작은 콘서트홀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은 남편의 확고한 바람이기도 했다.

“중정은 실패하지 않아요. 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에 가보면 주변부가 일상의 삶으로 편안하게 꾸려져 있는 걸 알 수 있어요. 내부에도 단차가 있고 광이며 부엌, 방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을 한 번에 통합하고 동시에 자유롭게 하는 것이 중정이에요. 일상의 공간이면서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우주의 공간이기도 하지요. 집에는 그런 곳이 필요합니다.” 조남호 건축가의 말이다.


피아노방과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첫 번째 정원. 시작과 끝을 단풍나무로 맞추었다.
“중정은 실패하지 않는다”
어떤 집이건 결과의 중심이 되는 하이라이트가 있다. 이 집에서는 바닥의 높이가 바로 그것이지 않을까 싶다. 조남호 소장은 무언가를 힘주어 강조하거나 자랑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런 성격이 설계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 집을 설계하면서 그가 가장 깊이 들여다본 곳은 땅이었다. 조선시대부터 존재하던 오래된 터이자 한국전쟁 때도 비교적 화마를 입지 않은 축복받은 부지. 단독주택 부지로 잘 보존되어 주변과의 조화가 중요하던 곳. 한 계절 또 한 계절을 지나며 이 집에서 나는 왜 이리 편안한가? 자문하던 건축주는 그 답을 땅 높이에서 찾았다.

“처음에는 많이 놀랐어요. 주변으로 키 큰 집이 많으니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집들은 토목 작업으로 지대를 높이는데, 소장님은 땅을 파서 바닥면을 구옥보다 50cm나 낮추시더라고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주차장 바닥면을 바깥 도로와 일자로 맞추신 거였습니다. 안쪽 마당과 정원도 그 높이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고. 여기 보시면(바깥쪽 마당을 가리키며) 집 내부와 바깥 마당의 높이차가 거의 없어요. 외부와 내부가 하나의 선처럼 편안하게 이어지지요. 덕분에 안마당이 더 풍성해 보이고 하나의 공간처럼 넓어 보여요. 이 집은 멋 부린 데가 없어요. 그래서 멋이 있어요. 제가 작곡하는 사람이다 보니 선율에 민감한데, 비유하자면 굉장히 멜로디가 좋은 집이에요. 인테리어는 편곡과 마찬가지여서 언제든 마음에 드는 쪽으로 바꾸면 돼요. 멜로디는 아니죠. 안팎으로 좋은 ‘소리’가 나는 집입니다.” 내겐 그 말이 사고와 체계가 융숭한 집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건축의 기본이자 핵심은 어디에서 닫고 어디에서 여는지를 결정하는 것. 이 부분을 섬세하게 조율한 집만이 건축주의 시공간을 아늑하고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상부 벽면과 화장실 한쪽에 작은 창을 낸 세심함이 돋보인다.
건축주와 건축가의 말을 차례로 들으면서 더욱 돋보이고 화려한 건물을 짓고 싶은 건축가의 욕망은 건축주의 행복과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까 생각했다. 물론 조남호 소장에게도 좋은 건물을 짓겠다는 욕망이 있을 텐데 그것이 투영되는 대상은 땅 위로 불쑥 올라온 외관보다는 땅 자체가 지닌 기운과 지세地勢였다. “집을 지으면서 편안함을 지향하지는 않습니다. 땅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지요. 땅은 고유함을 만드는 가장 강력한 요소잖아요. 건축주를 만나고 나서 땅을 조사했고, 지형과 역사 그리고 풍경을 들여다봤습니다. 그런 프로세스가 늘 첫 번째입니다. 그다음은 건축주의 이야기를 듣는 거죠. 모든 건축주의 요구 사항은 다 특별하지만, 무조건 담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 요구가 어떤 보편성을 갖는지 검증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곳은 네모반듯한 땅이 아니고 주변의 오래된 필지처럼 주변 구성도 복잡한 곳이었어요. 제 설계는 그 지형에 대한 기하학적 대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주차장과 작은 정원을 지나 만나는 중정. 땅은 물론 하늘과도 부드럽게 연결된 또 하나의 안전하고 쾌적한 땅이다. 조남호 건축가는 “중정은 틀릴 때가 없다”며 모든 건축 요소를 부드럽게 통합하는 중정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강조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온 건축주 부부가 또다시 탄성을 내뱉으며 “진짜 명작이에요”라고 말했다. 집을 지어준 모둔 건축가가 이런 호응을 받는다면 아파트 대신 ‘집짓기’를 결정하는 인구가 훨씬 많아질 텐데…. 함께 올려다 본 집은 과연 근사했다. 욕망이 드러나지 않고 겸손함이 드러나 담백하고 차분한 기품이 있었다. 이 집을 완공하고 조남호 소장은 건축 노트에 이렇게 썼다. “괴테는 건축을 ‘응고된 음악(Friedrich von Schegel)’이라고 했다. 건축과 음악은 전달 매체는 전혀 다른 영역이지만 구성 요소 사이의 조화에 바탕을 두고,요소 사이의 관계는 질서로 표현된다는 측면에서 가장 가까운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오선지가는 피아니스트와 작곡가 부부를 위한 집으로, 집의 모습이 특정한 음악 세계를 표현했다기보다는 음악이 만들어지기 직전의 빈 오선지五線紙 역할에 가깝다.”



조남호 건축가
는 솔토지빈건축을 이끄는 중견 건축가이가 목조건축 전문가. 정림건축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으며 서울시 건축위원회 위원, 서울시립대학교와 서울대학교 건축학부 겸임 교수 등을 역임했다. 최근까지 서울시 건축정책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솔토지빈率土之濱은 <시경詩經> ‘북산지계’ 편에 있는 말로 ‘온누리’라는 의미다. 인구의 대다수가 사는 도시에서는 건축이 자연의 일부가 되기 위한 노력 또한 필요하다는 마음을 담은 데서 알 수 있듯 홀로 우뚝하기보다 주변과 점잖게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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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성갑(갤러리 클립 대표) | 사진 윤준환,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