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층의 공동 거실에 정근재 씨 부부(왼쪽)와 정익재 씨 부부가 모였다. 소파와 테이블, 암체어는 미션 스타일의 대표 격인 스티클리 가구로, 조정란 씨가 미국 생활 중 모은 것이다. 고가구는 정근재 씨가 오랫동안 수집해온 것들. 벽에 걸린 작품은 ‘맨드라미’ 작품으로 유명한 김지원 작가의 유화로 현재 누크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을 전시 중이다.
원래 물탱크가 있던 자리인 4층 계단실에는 형 부부가 모은 궤와 동생 부부가 수집한 1900~1920년대 미국의 생활용품(램프, 저울 등)이 함께 놓여 있다.
찬비 내리는 겨울날, 이 가족을 만났다. 밖에는 찬비가 어른거리는데, 카메라 조리개에 담긴 그들 주위엔 갓 구운 빵 같은 온기가 피어올랐다. 곧 미수米壽라는 귀한 나이가 찾아올 정우 옹, 큰아들 정근재 씨 부부와 손녀 정인경 씨, 작은아들 정익재 씨 부부가 한집에서 만들어내는 풍경. 함께 밥 먹고 함께 뒹굴고 함께 잠자는 식구食口라는 풍경이 뿜어내는 온기였다. ‘나와 너’만 있는 2인 가구도 모자라 ‘나’만 있는 1인 가구가 주류처럼 돼버린 이 세상에서 3대가 함께 사는 모습은 낡은 스웨터의 보푸라기처럼 참 아련하고도 정겨웠다.
두 형제, 합가하다 미국에서, 서울에서, 경북 김천에서 각각 따로 살던 이들은 얼마 전 합가合家했다. 흩어진 윷가락이 한목에 잡히듯 떠났던 형제들이 ‘아버지 곁’이라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애초부터 합가를 계획한 건 아니었어요. 오랫동안 산이 바라보이는 집을 찾아다니다 삼청동 골목 길의 20년 가까이 된 다가구 주택을 점찍었고, 4층짜리 집이니 이곳에서 가족들이 함께 살아도 좋겠다며, 막연히 생각했죠. 전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로있고 아내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미국에 머물렀던터라 2년 정도 그 다가구 주택에서 저 혼자 살며 삼청동이란 동네를 곰실곰실 맛보았어요. 아침 9시마다 트럭 행상이 골목길에 나타나고, 할머니들이 가꾼 고추 화분이며, 배추 화분이 집집마다 늘어선 동네, 몇십 년 동안 박스 모아 자식들 교육시킨 자랑스러운 반장님네 동네. 떡 한 접시 건네면 부침개 한 접시 되돌아오는 동네, 바로 ‘아파트 삶’이 시작되기 전의 풍경이 남아 있는 동네더라고요.” 동생 정익재 씨가 이태 정도 주민으로 살아보니 강남떼부자들의 습격이 한창인 한옥 동네, 일본인과 중국인 관광객의 행렬에 멀미가 날 지경인 삼청동 대신 늘임표 같은 삼청동의 매력이 눈에 잡혔다. 그는 다가구 주택을 통째로 구입하고, 김천의 본가에서 딱지 치며 함께 뒹굴던 빡빡머리 형제와 수십 년 만의 합가를 꿈꿨다. “언젠가는 형제가 같이 살게 되리라 생각했어요. 그저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레 이뤄질 일 같았죠. 구체적으로 합가를 실행한 건 우리 집사람과 형수님이에요. 아이들이 공부하러 품을 떠나자, 오랜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에서 갤러리를 해보고 싶다는 집사람, 그동안 고향에서 부모님 모시고 살았으니 이제 서울에서도 좀 살아보고 싶다는 형수님 덕분에 두 집 살림을 합칠 수 있었죠.” 중년의 삶을 거느린 두 가장의 합가에는 두 아내의 쿨한 응낙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부엌까지 공유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많이 놀라던데, 형님과 저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어요. 그저 ‘같이 살자고? 그래, OK!’ 했죠.” 함께 살며 새롭게 생겨날 관계의 주름까지도 ‘그래, OK!’로 포용할게 분명한 이 쿨한 동서지간.
이 집에서 가장 멋진 전망을 자랑하는 4층 다실은 조망을 오롯이 즐기기 위해 통창을 냈다. 다구는 다도를 즐기는 형의 살림이다.
위, 3 2층엔 동생 부부의 침실과 서재가 자리한다. 2층 갤러리와 맞닿은 공간으로 갤러리 천장을 노출하면서 침실과 서재의 천장도 함께 노출했다. 책꽂이는 스티클리, 책상은 이튼 알렌 제품이고, 의자는 미국에서 플로어 샘플 세일 기간에 한두 개씩 구입한 것이다. 침실에는 노출 천장의 차가운 느낌을 덜기 위해 캐노피 형태의 조명 박스를 설치했다. 침대와 화장대는 스티클리 가구.
1 3층 정익재 씨의 서재.
2 4층 공동 거실의 세크러테리 데스크secretary desk(우편물이나 세무 영수증을 정리할 때 쓰는 가구)에 앉은 정우 옹. 협탁 위에 조정란 씨의 작품이 놓여있다.
3층의 공동 식당에서 오붓하게 동서지간의 정을 나눈다. 왼쪽의 협탁은 1900년대 초 영국 제품으로 미국에서 인테리어 숍의 폐점 세일 때 구입한 것. 양 날개를 펼치면 식탁이 되고 접으면 협탁이 된다. 타자기는 1985년 동생 부부가 개러지 세일에서 5달러에 구입한 것. 식탁은 스티클리 가구, TV 콘솔은 고인의 유품을 판매하는 에스테이트 세일에서 구했다.
두 집 살림에서 한 집 살림으로 합가를 결정하자 삼청동 골목길에 조용히 웅크린 대지 면적 45평의 다가구 주택을 손보고, 두 집 살림(큰 아들이 모시고 살던 아버지 살림까지)을 옮겨오는 대사大事가 그들에게 남았다. “이 집의 가장 큰 장점은 인왕산이 바라보이는 ‘전망’이죠. 한데 이 집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자리가 계단이에요. 1995년인가에 지은 집이니 전망에 대한 엄청난 관심은 없었을 거고, 그러니 집의 한복판에 계단을들인 거겠죠. 어떻게든 전망을 살리고 싶었지만 계단이 집의 등뼈 역할을하다 보니 그걸 옮기는 건 비용 문제, 허가 문제(한옥 보존 지구인 삼청동에서는 한옥만 신축이 허용되고, 개ㆍ보수도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한다) 등에서 어려움이 있었어요. 계단은 그대로 두면서 전망은 살리기, 살림집에 갤러리 공간까지 보태기, 바람 세고 언덕 높은 동네이니 단열과 방풍에 힘쓰기, 갤러리가 있는 건물이니 외관까지 신경 쓰기…. 쉽지 않은 리모델링 공사였죠.” 전망을 살리기 위해 원래 있던 작은 창들을 통창으로 만들고, 갤러리 공간이기도 하기에 바닥까지 넓히려던 거실 창을 줄여 외관의 비례미를 맞추고, 2층에 갤러리ㆍ동생 부부의 침실과 서재ㆍ사무실ㆍ살림 집 화장실ㆍ갤러리 화장실까지 요목조목 끼워넣고, 2층 살림 공간과 갤러리를 분리하기 위해 벽을 만들고, 집의 겉껍데기는 온기가 느껴지는 나무로 마감하고, 집과 갤러리의 속내는 흰색으로 마감하고…. 그야말로 까다로운 리모델링 공사를 위해 가족들이 머리를 맞대었다. 1층은 갤러리, 2층은 갤러리와 동생 부부의 침실 겸 서재, 3층은 공동 부엌과 식당 그리고 정우 옹의 방과 동생의 서재, 4층은 공동 거실과 형 부부의 침실, 다실, 게스트룸. 이렇게 한 뼘짜리 집을 다시 벌집처럼 나눴다. 그렇게 요긴하게 자리를 매긴 4층 집에서 이들은 동거와 분가를 현명하게 절충해 살기 시작했다. 마음먹기에 따라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가장 사적인 쉼을 즐기다가, 또 마음만 먹으면 공동 부엌과 공동 거실에서 참견도 하고 딴죽도 걸고 소통도 하는 그런 가족으로. 걸레로 방을 훔치다가 문득 생각나면 3층의 아버지 방에 들러 어깨 주물러드리고, 풍란에 물 주다가 문득 생각나면 4층의 형님 다실에 들러 녹차 한잔 얻어 마시고 온다. 이렇게 매일매일 ‘헤쳐 모여’ 하며 사는 여섯 명의 식구가 됐다.
1 형 부부의 한국 고가구, 동생 부부의 스티클리 가구 그리고 동생 부부가 1980년대 말 하나씩 모은 오디오가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2 1980년대 가장 초기 모델의 애플 컴퓨터로 정익재 씨가 박사 논문을 쓸 때 사용했다. 그 옆 사진은 정익재 씨의 다섯 살 때 사진과 그 아들이 다섯 살 때 모습이다.
조정란 씨의 컬렉션인 20세기 미국의 저울. 채소 무게 달던 저울, 우체국에서 편지 무게 달던 저울, 달걀 무게 달던 저울 등 다양한 저울을 모았다. 저울 뒤를 보면 그 시대의 우편물 가격, 채소 가격 등이 쓰여 있어 그 시절의 생활과 물가를 알 수 있다.
‘한 귀퉁이에 있는 아늑한 공간’이라는 뜻의 1층 누크Nook 갤러리. 현재 개관전으로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해온 김지원, 박소영 작가의 2인전 <동질이형>이 열리고 있다.
삼청동 뒷골목 한 귀퉁이에 위치한 누크 갤러리. 미술을 전공하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조정란 씨가 ‘작가들의 참새 방앗간’을 만들겠다는 젊은 시절 꿈을 이룬 공간이다. 왼쪽부터 작은아들 정익재 씨, 그의 아내 조정란 씨, 정우 옹, 손녀 정인경 씨, 큰아들 정근재 씨, 그의 아내 김진희 씨.
동질이형 합가, 말 그대로 살림을 합치기 위해 김천의 형네 살림, 서울과 미국의 동생네 살림을 한데 모았다. 이거야말로 선택과 포기의 전술이 필요했으리라. “큰 전자 제품은 형님이, 소소한 전자 제품은 제가 쓰던 것들이에요. TV는 저희 것과 형님 것을 한 대씩, 오디오는 저희가 1980년 대 말 미국에서 하나씩 모은 것들이고요. 부엌살림은 제가 유학 시절부터 모은 것이 많아 대부분 제 것을 두었고, 다실용품은 다도를 하는 아주 버님이 하나씩 모은 것들로 채웠어요. 이렇게 두 가족이 관심 있는 분야가 다르니 자연스럽게 물건이 겹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었어요.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내 것에 대한 애착이 덜해 같이 사용하는 데 부담이 없어요. 젊을 때 합쳤으면 네 것 내 것 구분이 심했을 텐데, 나이 들어 합치니 서로 너그러워진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람과 사람이 살 비비며 사는 일이니 지금처럼 늘 화평하기만 할까 딴죽 걸고 싶지만, 조정란 씨의 자분자분한 설명에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이 집의 세간 중 가구야말로 명실상부한 ‘합가’의 증거물이다. 형 부부가 오래전부터 수집해온 한국 고가구들, 동생 부부가 1980년대 미국 유때부터 모은 미국풍 가구, 이 생경한 두 스타일이 한 공간에서 만났다. “저는 미션mission 스타일 가구(미국식 아트 앤드 크래프트 양식의 가구라 할 수 있는데, 종교적 색채가 밴 간결하고 직선적인 디자인, 견고한 목재와 튼튼한 짜임이 특징이다. 구스타프 스티클리Gustav Stickley가 가장 대표적인 미션 스타일의 가구 디자이너다)를 좋아해 유학 시절부터 꾸준히 사 모았어요. 미국에선 1년에 한두번 정도 플로어 샘플 세일Floor Sample Sale이라 해서 가구점의 전시품을 세일하거든요. 평소 마음 가는 스타일의 가구를 눈여겨봤다가 60% 정도 가격에 좋은 가구를 살 수 있는 기회죠. 제 가구들은 그때 구입한 것이 많아요. 앤티크 가구들도 좋아해 주말이면 집 전체의 가구나 살림을 파는 에스테이트 세일Estate Sale을 찾아 돌아다녔어요.
돌아가신 분의 가구를 모두 처분하는 세일인데 오래되어 값어치 있는 물건이 많아요. 특히 나무 가구들은 오랜 세월이 묻어나 느낌이 좋고요.” 조정란 씨의 가구 컬렉션에선 청교도적 건강함과 성실함이 묻어난다.
“고향인 경북 김천과 그 주변 동네는 그야말로 일반 농촌 마을이죠.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의 집집마다 고가구가 즐비했어요. 이미 그때부터 고가구에 빠져 김천 주변의 시골을 돌아다니며 가구를 사 모았죠.”
한때 고고학에 심취해 정신과 의사라는 생업을 제쳐두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연구하러 떠나려 했다는 정근재 씨. 그의 고가구 컬렉션도 예사롭지 않다. 두 가족이 모은 가구, 시대와 나라를 넘나드는 가구가 이 집 거실에서 만났 는데 묘하게도 한배에서 태어난 것처럼 그럴싸하게 어우러진다. “저와 형은 같은 엄마 젖으로 자란 형제라 개성은 달라도 형질은 동일한 것처럼 한국 고가구와 미국의 미션 스타일 가구도 동질이형同質異形의 물건인 거예요. 그래서 한데 놓으면 한 몸 같아 보이는 거고요.”
정익재 씨의 설명에 무릎을 치고 싶다. 어쩌면 세상 만물이, 세상 모든 이의 삶 자체가 동질이형인지도 모른다(2014년 1월 15일까지 누크 갤러리의 개관전으로 열리는 김지원, 박소영 작가의 2인전 제목도 <동질이형>이다. 맨드라미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김지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버려진 사물을 모아 일정한 형태의 ‘덩어리’를 만든 박소영 인하대 교수의 전시다).
수십 년 만의 합가를 감행한 이 가족. 어쩌면 이들은 앞으로 ‘나의 묵묵 부답’과 ‘상대방의 안절부절’이 범벅이 된 날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정겹게 웃고 말 것이다. 가족이니까. 사랑보다 오지랖 넓은 정으로 뭉친 가족이니까. 이들이 함께 맞은 첫 번째 겨울이 여우볕처럼 지나가 버릴 것 같아 서둘러 가족사진 한 방 박는다. 카메라 렌즈 안으로 헐겁기도, 도탑기도 한 그 이름, 가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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