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집터에 있던 못의 일부를 살려 정원에 연못을 만들었다. 덕분에 집 입구에 연꽃도 보고 시원한 바람도 맞을 수 있는 ‘명당’이 생겼다. 예전에 사용하던 빈티지 수납장에 정리해놓은 양철 물뿌리개 컬렉션은 시골집의 묘미를 살려주는 훌륭한 장식이다.
지난 30년간, 집이라는 캔버스 안에 소파와 침대, 책상과 의자, 커튼과 그릇 등 일상을 둘러싼 모든 것을 그려온 리빙 디자인 사업가 이현구·최순희 씨 부부. 일생을 살면서 마음속에 수없이 ‘아름다운 집’을 마련하고 꾸며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이 부부처럼 이를 평생에 걸쳐 여러 번 ‘실전 모의 고사’로 치른 사람은 많지 않을 터. 그래서 이현구·최순희 씨 부부가 경기도 한적한 마을에 집을 지었다는 소식은 흥미진진한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취향의 자유를 현실로 반영한 집 짓기
“그런데 이게 정말 시골집 맞나요?” 시골집이라는 표현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순진함에 이내 머쓱해졌다. 푸른 논 사이로 집이 보일까, 아니 옥수수밭 너머 뾰족지붕이 나타나지 않을까.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 그러나 목적지에는 가로로 기다란 박스형 집이 있었으니. 예측 불허의 반전이었지만 새로운 세상, 남다른 집을 만났다는 건 분명 흥미로웠다. “이렇게 긴 직사각 형태의 집을 본 적은 많지 않죠? 이런 집은 건축가라면 누구나 도전해보고 싶은 디자인이라고 할 만큼 멋진 데다 난이도가 높다고 해요.” 세상의 모든 스타일을 섭렵한 최순희 씨가 고르고 고른 결과는 순수한 결정체 같은 단순한 직사각형 모던 주택. 비례미 자체가 디자인의 전부인 이곳은 한마디로 ‘고수’가 즐길 수 있는 집인데, 그도 그럴 것이 길고 납작한 직사각형 집은 그 비례를 충분히 받쳐줄 만한 넓은 마당과 배경이 있어야하고, 공정 또한 까다롭기 때문. “언젠가부터 이러한 형태의 집을 지어보리라 생각하긴 했는데 막상 엄두는 못 냈죠. 그런데 때 마침 설계를 의뢰한 당 건축사무소의 박호견 소장이 집터를 보더니 지금 집의 모습을 제안하는 거예요. 이곳이라면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고. 그래서 흔쾌히 받아들였죠.” 그간 다양한 집을 지어본 경험이 있지만 이처럼 평범한 듯 세련된 집은 처음인 최순희 씨 부부와 동경해 마지않던 도전을 이루어낸 건축가의 만남. 남편의 오랜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로 많은 작업을 함께했던 박호견 소장의 제안은 지금 돌이켜 보건대 건축가와 건축주 모두 윈윈한 결과였다.
1 정원 일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듯 현관 입구에는 밀짚모자와 장화 그리고 호미 등을 걸어놓는 빈티지 옷걸이를 마련해놓았다. 마치 ‘시골집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를 하는 듯한 ‘웰컴’ 표지판이 잘 어울린다.
2 한국 젊은 작가 작품을 컬렉션하는 집주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1층 거실. 나무 테이블과 그림 모두 모던 아트 작가 작품이다.
3 정원의 연못과 푸른 잔디밭을 눈높이에서 즐길 수 있게끔 욕조를 바닥에 매입한 독특한 욕실.
4 최순희 씨가 유일하게 편집적으로 모으는 것은 바로 주전자와 피처. 2층 주방 앞에 있는 수납장에서 그 일부를 볼 수 있다.
손자를 위해 출장지에서 구입해 온 행잉 체어를 놓은 1층 침실. 이 행잉 체어를 제외한 모든 가구와 소품은 최순희 씨가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것이다.
검박하지만 세련된 시골 주말 주택
콘크리트 외벽에 회색으로 칠한 목재 패널을 길게 덧댄 외관. 길고 긴 집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까? “이 집의 하이라이트는 2층의 높은 천장이에요.” 네모반듯한 집에 들어섰다는 게 믿기지 않는, 아치형으로 드높은 천장은 확실히 차별화되는 부분. “밖에서 봤을 때 아치가 튀어나와 보이지 않게끔 설계하고, 시공하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건축적인 과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남은 고민은 인테리어였다. 최순희 씨는 주말에 쉬러 오는 시골집이라는 콘셉트에 맞춰 검박한 공간을 구상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그림은 역시 오랜 협력자, SBI디자인연구소의 김명길 대표가 완성했다. 흰색으로 도장한 벽면과 나뭇결이 살아 있는 마루, 미송 합판으로 만든 문과 수납장, 책장 등으로 마감까지 해결한 합리적이고도 단순한 인테리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공간이 넓어 보일 뿐 아니라 편안하니 세련된 느낌, 게다가 정원의 푸른 잔디밭과 눈높이를 같이하기 위해 욕실 바닥에 매립한 욕조, 창밖의 자연을 보듬기 위해 침대 머리맡으로 길게 낸 창은 이곳이 정말 시골집이라 불릴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된다.
1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벽면에는 벽돌 작가로 유명한 김강용 화가의 작품을 설치했고, 난간 앞에는 긴 나무 벤치를 놓았다. 그림과 의자, 플로어 스탠드 모두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것이라 그런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비행기 모형은 최근 친구에게 선물 받은 것인데, 2층에서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손자를 위해 천장에 매달았다.
2 30명 정도 모여 앉을 수 있는 긴 식탁은 최순희 씨가 오랫동안 꿈꾸던 것으로, 그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테이블 제작을 담당한 가구 디자이너 강정태 씨는 나무가 휘는 것을 바로잡기 까지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고. 아치형 천장이 공간을 웅장하게 연출한 가운데 벽면을 꽉 채운 책장, 넓은 아일랜드 조리대, 앤티크 그랜드 피아노가 조용히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4m에 육박하는 아치형 천장, 사다리가 있는 책장, 30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길고 긴 식탁.범접할 수 없는 어느 저택의 모습 같지만 우드와 화이트, 단 두 가지 요소로 연출한 집은 말 그대로 자연스럽고 검박한 시골집이다.
3 2층에 있는 주방. 11자형 이상적인 동선과 깔끔한 빌트인 시스템이 인상적이다.
4 우드 톤의 자연미는 욕실에서도 유효하다. 나무로 만든 세면대가 매력적인 1층 욕실.
긴 테이블을 따라 일렬로 무수히 많은 초를 놓아 불을 밝히고 많은 사람과 함께 식사를 즐기는 풍경. 최순희 씨가 꿈꿔온 라이프스타일 중 한 장면이다. 실제 이를 위해 테이블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 건 당연지사.
2층에 있는 침실. 미송 합판으로 만든 빌트인 헤드보드 위로 그와 같은 비례미를 지닌 길고 낮은 창문을 내어 녹음이 우거진 야외 풍경을 그림처럼 담아냈다.
넓은 정원 덕분에 가로로 긴, 수평선 같은 집을 만들고 그 매력을 십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정교한 설계를 통해 2층의 아치형 천장이 튀어나와 보이지 않고 수평선을 유지한 외관이 돋보인다. 콘크리트 외벽이지만 윗부분에 회색 우드 패널을 덧대, 가로로 확장된 느낌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게으른 자도 즐길 수 있는 자연
모든 것이 새로운 시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집 짓기. 예상보다 공사가 길어졌지만, 당시 최순희 씨는 이를 조금이라도 앞당기고 싶었다. 첫 손자의 돌잔치를 이 시골집에서 치르고 싶었던 마음이 컸기 때문. “그런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봐요. 아들 내외가 아직 어리고 젊어서 그런가, 이런 데서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요.” 1층 침실에 있는 행잉체어는 손자를 위해 출장지에서 공수해 온 선물. 그러나 정작 주인공은 무서워서 타지도 못했고, 세 살이 된 지금에야 관심을 보인단다. 그리고 2층의 책장 맨 아래 두 칸 역시 손자의 책과 장난감을 위해 비워놓았건만 이 집에 오면 그냥 뛰어다니기 바쁘다니. “역시 상상과 현실은 괴리가 있게 마련인가 봐요!”
하지만 그는 최근 이 집에서 상상했던 ‘시골 라이프’ 중 한 가지를 실천하며 새로운 재미를 찾았다. 스스로 말하길 “선인장도 죽이는 사람”일 정도로 생명을 가꾸는 일에 소질이 없다는 최순희 씨는 조경 전문가 오경아 씨의 도움을 받아 ‘키친 가든kitchen garden’을 만들었다. “텃밭이 작물 수확을 목적으로 한다면 키친 가든은 작물을 키우되 이를 감상하고 즐기는 개념이 크죠.” 땅에 채소를 심는 게 아니라 땅 위에 컨테이너를 올려 구획을 만들고, 각 컨테이너 안에 채소를 심는다. 컨테이너별로 푸른 잎이 올라오고, 꽃이 필때면 이곳은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정원. 작물을 밟을 일 없이 밭고랑 사이에 난 길을 따라 산책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텃밭은 밭일을 하고 나면 그 안에 앉아 쉴 수 없지만, 키친 가든에는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가 있어 특별히 밭일을 하지 않아도 앉아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죠. 게다가 화단에 물을 주는 것만으로도 채소가 쑥쑥 자라니, 이렇게 부담 없이 ‘밭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이 덕에 본격적인 주말 전원생활을 만끽하게된 최순희 씨. 지난 6월 마지막 주, 그는 키친 가든의 ‘오픈’을 기념하며 직원 가족을 초대해 브런치 파티를 열었다. 이미 이곳에서 여러 번 파티를 열었던 터라 이전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키친 가든에 대한 감흥이 남달랐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이는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만 유효한 이슈일 뿐. 이날 누구보다 신이 난 건 푸른 잔디에서 뛰놀고 연못에서 물장구를 치던 아이들이다. “그렇지 뭐! 시골집, 주말 주택에서 꿈꾸는 생활이 이런 거 아니겠어요?”
1 키친 가든에 있는 모든 식물에는 이름표를 붙였다.
2 잠시 쉬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쉼터이자 창고.
3 다육식물을 심은 우드 팔레트.
4 컨테이너로 구획을 나눠 따로 또 같이 채소를 심고 재배하는 키친 가든. 산책하듯 거니도록 통로와 의자를 마련해 휴식과 관상을 함께 즐길 수 있다.
5 키친 가든을 디자인한 오경아 씨(왼쪽)와 집주인 최순희 씨. 자연을 가꾸는 재미, 생명의 신비가 펼쳐지는 이곳에서 시골 생활의 묘미를 깨닫는 요즘이다.
브런치 파티에 참석한 직원 가족들이 연못에서 물놀이를 즐기며 기념사진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