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개월간 손수 고친 컬렉터 이일규 씨의 집. 소파 대신 1인용 체어를 리듬감 있게 배치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낮은 고재 판이 TV 수납장을 대신하고, 폴 키에르 홀름과 핀 율의 가죽 체어에 고재 테이블을 매치한 감각이 돋보인다.
2 돌을 둥글고 곱게 갈아 문고리로 활용했다. 이일규 대표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디테일로 이 집의 트레이드마크다.
3 1층 현관문을 열면 마주하는 고재 중문과 ‘오월재’라 쓴 현판이 인상적이다.
4 세탁실에서 바라본 주방. 수납장과 와인 저장고 모두 이일규 씨가 디자인했다.
북유럽 관련 전시 열풍 속에서 비교적 조용히 신고식을 치른 가구 전시가 있었다. 지난 6월 10일까지 경기도미술관에서 진행한 <선의 아름다움-현대 가구의 시작>전. 규모와 인기 모두 비슷한 시기에 열린 핀 율 가구전의 흥행률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성과가 있었으니 바로 미국의 아트&크래프트 운동을 이끈 구스타브 스티클리Gustav Stickley 가구를 재발견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스티클리를 비롯해 동서양을 불문하는 현대 가구들이 모두 한 사람, 컬렉터 이일규 씨의 소장품이라는 사실!
패션 사업가, 앤티크 딜러, 리빙 저널리스트 등 이일규 씨를 수식하는 단어는 여러 가지다.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관심 있는 것에 충실해온 그는 보기 드물게 도량이 큰 진짜 모험가다. 오래된 도자, 축음기, 돌과 조각상, 조선 목가구, 20세기 빈티지 가구…. 아홉 살부터 오래된 물건을 모으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니, 그 빌라가 현대 가구 전시를 위해 자신의 소장품을 선뜻 내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스티클리부터 한국 고가구까지 미학적 일관성을 갖고 컬렉션한 자신의 소장품을 통해 대중이 ‘현대 가구 사조’를 경험할 수 있다면? 여기에 더해 가구는 요즘 미술계에서 가장 핫한 아이콘이자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오브제인 만큼 앉고 만지고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실제 사용하는 가구를 포함해 무려 2백 점에 가까운 소장품을 기꺼이 공개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번에는 자신의 취향과 기호를 투영했을 그의 집이 궁금해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사용하는 ‘가구’가 무엇인지 진면목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1980년대에 지은 벽돌집. 청담동 한복판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하며 창문 밖으로 울창한 나무가 펼쳐진 집은 들어서는 순간 오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전통과 현재, 수공예와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 한데 어우러진 이 집은 ‘컬렉터’의 이채로운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를 혼합한 것이 관전 포인트다.1층은 단순히 현관 전실 역할만 하고, 2층부터 4층 다락방까지 주거 공간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복복층 구조의 집. 절대 미각처럼 절대 공간감도 존재하는 법. 8개월 전 30년의 세월을 품은 이 빌라의 현관문을 여는 순간, 파노라마처럼 지금의 이미지가 펼쳐졌다는 그는 철거부터 전기 배선 작업, 마감까지 인부에게 하나하나 지시를 내리며 장장 6개월 동안 손수 레노베이션을 진행했다. “2층부터 4층까지 탁 트인 공간감을 완성하고 싶었어요. 1층 현관에서 3층 테라스까지 시야가 트여 있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셈이죠. 또 4층 다락방 천장을 통해 빛이 2층 거실까지 쏟아집니다.”
그는 건축과 인테리어에 관한 고정관념이 없었기에 더욱 다양한 시도와 구조적 실험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시쳇말로 ‘공기’가 있는 집이 완성되었다. 2층은 거실과 주방, 3층은 부부 공간, 4층 다락방은 아들을 위한 공간으로 구성했는데, 각 공간은 대부분 ‘벽’과 ‘문’을 생략한 것이 특징. 층과 층 사이, 방과 방 사이의 경계가 무너진 이 로프트 하우스를 둘러보니 “집이기 때문에 고수해야 하는 정석은 없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간다.
“공간은 거친 것과 미세한 것, 완전한 것과 불완전한 것, 소박한 것과 럭셔리한 것을 동시에 담고 있지요. 서로 극명한 대비를 이룰 때 그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하니까요.”
1 층과 층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려 개방감이 느껴지는 3층과 4층 다락방. 난간에 매단 1960년대의 버블 체어, 폴 헤닝센의 아티초크 조명등, 전통 한지 문의 조화가 이색적이다. 한지 문은 한옥의 열어 들개문처럼 끌어 올릴 방법을 고민 중이다.
2 이탈리아 주방 가구 브랜드 에르네스토 메다의 아일랜드를 거실과 주방 사이 통로에 배치해 아일랜드 조리대 겸 식탁으로 사용한다.
3 도자기만큼 좋아하는 오래된 스피커. 지멘스의 오리지널 빈티지 제품이다.
4 공간에 관한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총집합한 4층 다락방. 박공지붕을 살려 내추럴한 파벽돌로 마감한 벽이 인상적이다. 왼쪽은 화장실, 가운데는 옷장, 오른쪽은 샤워 부스로 사용, 계단은 소파 대용이다.
가구는 나의 삶을 채우는 퍼즐 조각
그는 실제 집에서 스티클리를 비롯해 핀 율, 한스 웨그너의 가구를 즐겨 사용한다. 거실에 그 흔한 소파 없이 1인용 체어를 리듬감 있게 배열하고 전시에서 선보였듯 서양 빈티지 가구에 우리 전통 목가구를 매치하길 즐긴다. 단정하고 깊이 있는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는 것. “좋아하는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그걸 상전처럼 모시는 게 아니라 생활하며 직접 써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티클리 제품은 실제 써봐야 진가를 알 수 있어요. 가구를 ‘명작’이라 하는 것은 모양만 갖고 되는 게 아닙니다. 편하고 튼튼하고, 사람 성격으로 치면 솔직하고 과묵해서 매력적이죠.”
강직한 인상의 직선 몇 개만으로 이루어진 스티클리의 의자는 1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데도 바로 만든 것처럼 참신하다. 이러한 가구는 현대적 인테리어와도 잘 어울릴 수 있는 장점을 갖추었다. 또한 오크 원목 특유의 결과 질감,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비 이음으로 짜 맞추는 기법 등 동양 가구와 통하는 부분이 많다(가만히 쓰다듬으면 손잡이나 작은 경첩 등이 거스르지 않는데, 가구에 필요한 모든 재료는 스티클리 공방에서 제작한다). 이일규 씨 집에서는 미드 센트리 북유럽 가구도 종종 눈에띈다. 폴 헤닝센의 PH 아티초크 조명등과 한스 베그너의 701체어, 폴 키에르 홀름의 PK22 체어가 그것. 특히 PH 아티초크 조명등은 이일규 씨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이다.
대학생 아들 역시 묵직하면서 정갈한 스티클리 가구를 좋아한다. 지붕 아래 좁은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낮은 가구를 배치하고, 창문 없이 막혀 갑갑하지 않도록 위아래 레일을 달아 칸칸이 접히는 폴딩 도어를 설치했다. 필요할 때마다 병풍이나 파티션처럼 활용하기 좋다.
“사람들은 제가 방대한 양의 가구를 모았으니 돈도 엄청 썼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니면 부모가 상당한 재력가였을 거라고 지레짐작하죠. 하지만 제가 가구를 모으기 시작한 20여 년 전에는 지금처럼 가구가 비싸지 않았어요. 따라서 돈보다도 관심과 열정, 좋은것을 알아보는 안목이 더 중요했죠. 당장은 버겁더라도 좋은 가구를 구해 소중히 아껴 쓰면 애착도 생기고 대대로 물려줄 수 있을거예요. 대학생인 제 아들 역시 선이 딱딱 떨어지는 스티클리 가구를 좋아하고 즐겨 사용하고 있어요. 뭐든지 빨리빨리 소비하고 변화를 기대하는 요즘 청춘 같지 않지요.”
그러고 보니 안방 침실의 침대, 사이드보드, 흔들의자 등은 지난 2000년 <행복>에 그의 성북동 집을 소개했을 때 본 가구 그대로다. 정말 좋은 가구, 매력적인 가구란 시간이 흐르면서 함께 나이들며 친구가 되는 법. 확실한 필요와 자신의 취향을 이해하고 신중하게 선택한다면 가구는 단순히 ‘가구’ 그 이상이다.
앞서 말했듯 이일규 씨의 직함은 다양하다. 앤티크 딜러, 가구 컬렉터, 리빙 저널리스트… 여기에 전시 큐레이터라는 수식어를 추가해야 할 듯. 이번 경기도미술관 전시를 좀 더 대중적인 전시로 기획해 풀어내고 싶다는 소감을 밝혔으니 그의 추진력이라면 내년에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