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07월 엄마의 비취 브로치 (김선주 한겨레신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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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곳은 중구 정동 27번지 2호다. 정동극장에서 고려병원(현 강북 삼성병원) 쪽으로 20미터쯤 가다가 왼쪽 언덕을 올라가서 제일 끝에 있는 막다른 집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엄마 친구인 산파아주머니가 나를 받았다.
네 딸 중에 막내로 태어난 나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딸은 아니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부산 출장 중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기대했다가 또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입을 다무셨다고 한다. 아들을 낳았으면 당장 돌아오셨겠지만 딸을 낳아서 볼일 다 보고 몇 달 만에 돌아오셨다고 한다. 출생신고도 무성의하게 해서 내 진짜 생일과 호적상의 생일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나는 투덜댔다. 형제들 모두 이름이 ‘동’ 자 돌림인데 나만 돌림자가 아니다. 큰언니 이름에서 한 글자, 꼬마언니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서 내 이름을 지은 것도 섭섭했다. 나는 내가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줄곧 했다. 조금만 서운한 말을 해도 울음을 터뜨렸던 나의 별명은 울래미였다. 언니들이나 친척들은 내가 우는 것이 재미있었던지 심심하면 “너의 엄마 저기 청계천 다리 밑에 있는데…”했다. 나는 어김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특혜를 받고 자란 큰언니, 몸이 약한 둘째 언니, 성격이 강해서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기절을 해버렸던 꼬마언니에 치여서 묵묵히 내 욕구는 드러내지 않고 지냈다. 언니들 모두 하던 외국어와 악기 과외도 받지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 혹시 데려다 기른 딸이 뭘 요구하면 안 되지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대신 나는 소위 유식한 아이로 자랐다. 언니들이 보는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 <사상계> 이런 것들을 초등학교 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었다. 신문은 사설부터 소설, 광고까지 샅샅이 읽었다. <파리마치>니 <타임>이니 하는 외국 잡지들도 글자는 몰라도 넋을 놓고 페이지를 넘겼다. 집 옆의 동양극장을 드나들었고 연극 공연, 음악회, 무용 발표회도 빠짐없이 다녔다. 누가 뭐래도 나는 할 말이 있는 아이였다. 내 별명은 벌집이 되었다. 나를 건드리면 끝까지 최후의 한 마리까지 쫓아가서 내 유식을 무기로 쏘아주었다. 조그만 것이 어른들이나 쓰는 단어와 지식으로 맞짱을 뜨니 주변 사람들은 어이없고 기가 막혀 손을 들었다. 그냥 기특하게 여겨 손을 든 척했을 것이다. ‘건드리면 재미없어’라는 중무장은 어쩌면 스스로 만들어낸 애정 결핍을 이겨내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인가 엄마에게 내가 데려온 아이인 줄 알았다고 했다. 엄마는 깜짝 놀라셨다. “아버지가 네가 아들이 아니어서 실망한 건 사실이지만 미안했던지 이 보석을 사 오셨다. 몇 달 만에 돌아와 네가 방긋방긋 웃는 것을 보며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른다” 하시며 연둣빛 브로치를 꺼내 보였다. 엄마의 모시적삼에 매달려 은은한 빛을 발하던 바로 그 비취 브로치였다.
그것은 우리 자매들이 사랑하던 엄마의 유일한 보석이자 엄마의 유일한 호사품이었다. 집 마당에 텐트를 치고 북쪽에서 내려온 엄마 친척, 강원도에서 올라온 아버지 친척, 수십 명을 거둬 먹였던 큰손인 엄마는 갖고 있던 보석을 모두 전당포로 보냈다가 결국은 팔았다. 그러나 어떤 때는 쌀로, 연탄으로, 학교 등록금으로, 아니면 누군가의 귀향 여비로 바뀌곤 했던 그 비취 브로치를 엄마는 나 결혼할 때 주려고 고이 간직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넉넉한 아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신감에 넘치는 성격으로 변했다. 벌집 특유의 성격도 누그러졌다. 언니들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사랑받은 딸이라는 느낌에 가슴속에서 환한 불꽃이 핀 것처럼 흐뭇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큰언니가 “엄마 비취 브로치 어디 갔지?” 했다. 내가 이만저만해서 결혼할 때 엄마가 나를 주었다고 했다. 큰언니는 자기는 그런 이야기 들은 적이 없는데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이 섭섭했나 보다.엄마의 유품인 비취 브로치와 엄마가 남긴 서른 권의 가계부와 일기, 편지질의 대가다운 수백 통의 편지는 지금 내가 간직하고 있다. 친정 오빠 집에 갔더니 새언니가 ‘막내고모가 언젠가 찾을 것 같아서 간직해놓았다’며 커다란 박스를 내주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엄마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 같은 뿌듯함에 어린아이처럼 기쁜 것을 보니 부모 앞에서 자식은 영원히 어린아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며칠 있으면 엄마의 4주기다. 모시적삼 대신 흰 블라우스에 비취 브로치를 꽂고 엄마를 찾아가야겠다. 엄마의 일기 중 가장 오래된 1968년도 것을 들고 가 읽고 또 읽고, 울고 울고 또 울고 싶다.
7월호의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는 전 한겨레신문 논설주간 김선주 님께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가슴 뭉클한 이 이야기를 들으니 사랑받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믿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혼자만의 생각이나 상상 때문에 그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네요. 오늘 저녁, 혹여 부모님께 섭섭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어떨까요? 사랑의 편지와 선물도 준비한다면 더욱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