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06월 물건을 살까, 추억을 살까 (서명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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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 씨의 두 번째 글
2006년, 23년간 매달려온 언론인이라는 직업을 때려치우고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걷기로 작정했다. 내 결심을 들은 지인들은 하나같이 뜯어말렸다. 여자 혼자서 800km에 이르는 길을 어떻게 걷겠느냐, 그것도 영어가 서툴고 ‘길치’에 덜렁이인 주제에! 2, 3년 뒤에 자기들과 함께 떠나자고 유혹하는 이들도 있었다. 굳었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오지 여행가에서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변신해 맹활약 중인 한비야 씨와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다.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그는 한마디로 명쾌하게 정리했다. “살까 말까 망설여지는 물건은 사지 말자, 갈까 말까 망설여지는 여행은 떠나고 보자. 이게 내 신조야.” 그러고는 덧붙였다. “자기는 감성이 풍부하니까 영어 달리면 보디랭귀지로 해결할 수 있을 거고, 길 헤매면 다시 찾으면 되고, 물건 잃어버리면 현지에서 조달하면 되지 뭐.”
결국 나는 혼자 떠났고, 산티아고 길을 36일간 걸으면서 모처럼 자유와 평화 그리고 행복감을 맛보았다. 그뿐인가. 그 길 위에서 인생의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고국으로 돌아가면 고향 제주로 돌아가 길을 내는 사람이 되리라. 그리고 실제로 그리 되었다. 단 한 번의 여행이 삶의 궤도를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이처럼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여행이 아니라 해도, 여행만큼 ‘후회하지 않는 투자’도 드물다. 아무리 값비싼 명품 백도 시간이 흐르면 만족도가 떨어지고 물건을 손에 넣었다는 성취감은 시들해진다. 그러나 여행의 추억은 시간의 흐름에 얹혀 새록새록 짙어진다.
내 몸과 내 머리는 아직도 절절하게 기억한다. 고단한 800km의 여정이 끝나는 지점인 산티아고 대성당 대리석 마당의 감촉, 그 위에 벌렁 드러누워 바라보던 우아한 첨탑과 흘러가던 구름을.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 때 새벽녘에 내 머리 위로 쏟아지던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과 마차푸차레봉의 우아한 자태를.
느린 여행에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 그러나 같은 여행을 떠나도 즐기는 방식에 따라 만족도는 크게 달라진다. 외국에서 혹은 제주 올레길에서 여행자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곳을 보려는 욕심 때문에 정작 여행이 주는 자유와 풍요로움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다. 유럽 여행 15일에 9개국, 10일에 5개국을 돌아다니는 식의 빠른 여행 방식으로 어떻게 평생 남을 추억을 만들고, 몸이 기억하는 여행을 할 수 있으랴.
여행업 종사자들에 따르면 한국 사람이 여행지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빨리빨리 와라” “여기 서서 한 장 박자”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건 사진밖에 남을 게 없는 여행을 했음을 의미한다. 사진 한 장 안 찍어도 가슴에, 머리에, 몸에 새겨지는 여행을 하는 게 진정한 여행인 것을.
같은 제주 올레길을 걸어도 오로지 종점에 빨리 도달하려는 욕심으로 앞만 바라보고 걷는 이는 주민들과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발밑에서 웃음 짓는 야생화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나이 든 해녀가 잡아온 해산물도 한 접시 먹고, 동네 강아지와 놀아주고, 쪽빛 바다가 펼쳐진 방파제에 앉아 한동안 상념에 빠지기도 하면서 하루에 코스를 절반씩만 걷는 기특한 젊은 여성도 있다. 어느 쪽이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기억을 안고 제주를 떠날지, 현명한 독자는 이미 눈치챘으리라.
‘길 내는 사람’ 서명숙 이사장이 ‘정말 하고 싶은’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그의 책 제목처럼 ‘놀멍 쉬멍 걸으멍’ 그곳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여행, 그 여행길을 ‘나만의 길’로 만드는 비법이 이 글에 숨어 있습니다. 천천히 걸으며 그동안 내가 걸어온 길과 지금 걷는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바라보는 여행, 그건 우리 인생을 걷는 방법이기도 하겠지요. 아름다운 계절, 놀멍 쉬멍 걸으멍 우리 삶의 울림과 흔들림을 경험하는 여행, 떠나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