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05월 봄날, 함께 걷는 행복 (서명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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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 씨의 첫 번째 글
봄에는 어딘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 내가 사는 서귀포의 봄은 황홀할 지경이다. 노란 유채꽃, 보랏빛 갯무꽃이 양탄자처럼 대지를 수놓는 가운데 머리 위로는 왕벚꽃이 눈부신 꽃그늘을 드리운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봄바람에 실려오는 공기는 청정하다 못해 단내가 난다. 절로 탄성이 나온다. “아, 공기가 참 달구나.”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도 홀로 보면 적막강산처럼 쓸쓸하다. 서귀포 올레길의 숨 막히는 풍광을 더 아름답게 수놓는 건 역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다.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사연, 저마다의 꿈과 좌절을 안고 길을 걷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그들은 걸으면서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그들의 고민을 먼바다에 흘려보낸다. 어떤 이는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노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더 행복했노라고 말하기도 한다.
혼자 걷는 이는 자신과 대화를 하지만, 동행이 있는 이는 상대방과 마음을 터놓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한번은 제주 올레 10코스에서 모녀처럼 보이는 두 여자를 만났다. 젊은 여자에게 물었다. “아이고, 친정어머니랑 오셨나 봐요?” 웃으면서 아니란다. 알고 보니 그들은 고부간이었다. 열흘 동안 하루에 한 코스씩 올레길을 걷고 있고, 오늘 아쉽게 서울로 올라간단다. 두 여자가 열흘간 길에서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러나 그들의
밝게 웃는 표정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길에서 서로 마음을 열어놓고 진심으로 소통했음을.
17년 동안 나눈 이야기보다 7일간 더 많은 이야기를….
소통이 필요한 게 어디 고부간뿐이랴. 친부모 자식 간에도 소통은 필요한 법이다. 역시 길에서 만난 한 중년의 남자는 고등학교 2학년 아들과 7일째 여행 중이었다. 게임 중독에 학교에서 말썽을 도맡아 피우는 아들, 대기업 중견 간부로 끝없는 업무와 잦은 회식으로 파김치가 되어서야 퇴근하는 아빠. 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애정 어린 질타에 아들은 문을 쾅 걸어 잠그는 것으로 대응하곤 했단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학교에 ‘부모 동행 현장 학습’을 신청해 아들을 무작정 끌고 제주로 내려왔단다. 처음에는 볼이 잔뜩 부어서 매사에 투덜대던 아들이 하루 이틀 지나면서 슬슬 바뀌더란다. 파란 올레 화살표를 함께 찾아내고, 길가에 숨은 맛집을 발견하고, 발밑에 핀 야생화 이름을 아비에게 묻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더란다. 그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이런 기회를 주셔서. 쟤랑 한집에 살면서 17년 동안 나눈 대화보다 요 7일 동안 나눈 대화가 더 많아요. 서로 너무 몰랐던 거죠.”
가족은 흔히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한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한집에 산다는 공간적 특성만으로, 함께 보내는 시간의 길이만으로 서로를 알고 이해하게 되는 건 아니다. 소통이 없는 동거, 따뜻한 애정이 수반되지 않은 핏줄은 어찌 보면 헤어날 수 없는 구속이자, 지긋지긋한 천형일 수도 있다.
그대, 가장 가까운 가족이 혹 너무 멀게 느껴진다면 반드시 한 번쯤 함께 걸어볼 일이다. 자
연 속에서 마음을 열고 한 번쯤 길동무가 되어볼 일이다. 굳이 제주 올레길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이 봄, 금수강산 어딘들 아름답지 않으랴.
길 없는 길을 걸어가는 우리 삶에 누군가 길을 좀 내줬으면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요? 서명숙 씨는 ‘길 내는 사람’입니다. 그는 나이 쉰에 23년 동안의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 제주에 산티아고 길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내겠다는 ‘말도 안 되는 꿈’에 빠져 길 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제주 한 바퀴를 잇는 올레길을 낸 후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올레 신드롬’과 걷기 여행의 열풍이 불어닥쳤지요. 사람들이 따라 걷기 시작한 길, 그 길을 내며 그는 삶의 어떤 울림과 흔들림을 경험했을까요. 우리는 그 길을 걸으며 또 어떤 삶의 길을 찾아낼까요. 그 이야기가 지금부터 이어질 네 번의 글에 담길 겁니다. 기대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