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01월 키르티무카 (함성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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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함성호 씨의 첫 번째 글
인도의 시바 사원 입구에는 언제나 한 얼굴이 있다. 시바 사원에 들어갈 때 사람들은 먼저 입구에 있는 이 얼굴에 경배를 올려야 한다. 이 흉측한 얼굴이 시바 사원의 입구에 있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느 날 한 괴물이 시바신을 찾아 온다. 그리고 다짜고짜 이렇게 얘기한다. “당신의 아내를 내 애인으로 삼고 싶다.” 시바는 파괴와 창조의 신이며,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시바의 춤이다. 그럴 정도로 막강한 힘과 권능을 가진 신이 시바이다. 그런데 웬 괴물 하나가 와서 아내를 달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당연히 시바는 분노하여 이마에 있는 제3의 눈을 뜬다. 그 순간 제3의 눈에서는 벼락이 나와 땅을 때리고 불길과 함께 연기가 자욱하게 일었다. 그만큼 시바의 분노가 컸다는 얘기다. 그런데 연기가 사라지자 벼락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엉뚱하게 또 다른 괴물 하나가 나타난다. 이 괴물은 심한 뻐드렁니에 피골이 붙을 정도로 깡마른 데다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은 흡사 사자의 털 같았다.
바로 시바 사원의 입구에 놓인 그 얼굴이었다. 이 괴물은 나타나자마자 주체할 수 없는 허기에 시달렸다. 그래서 옆에 있는 먼저 온 괴물을 먹으려 했다. 그러자 먼저 온 괴물은 기겁해서 시바에게 도움을 청했다. “시바여, 이 몸을 신의 자비 앞에 던지나이다.” 신의 아내를 탐하던 자가 신에게 자비를 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 신화에서는 누구든 신의 자비 앞으로 몸을 던지면 신은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그래서 시바는 이 까닭 모를 허기에 시달리는 괴물에게 그를 먹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까닭 모를 허기에 시달리던 괴물은 시바에게 항변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당신이 나를 이토록 허기지게 만들었으니 나는 이 괴물을 먹어야겠소.” 그러자 시바는 이 곤란하고 어이없는 괴물에게 명령한다. “그렇게 배가 고프면 너 자신을 먹어라!” 그러자 이 괴물은 정말 자신의 발부터 시작해서 몸통, 팔까지 다 먹어치운다. 그러고는 얼굴 하나만 달랑 남는다. 시바는 이 어이없는 상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렇게 얘기한다.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준 예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내 너를 키르티무카라고 부르리라.” ‘키르티무카’는 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그러고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 너를 예배하지 않는 자는 나에게 올 자격이 없다.”
이 영광의 얼굴은 남의 생명을 먹고사는 생명의 이미지이자, 영원히 닫히지 않는 욕망의 무한 순환 궤도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욕망을 아는 것에 있다.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늘 비어 있고, 늘 허기에 시달리며, 늘 불행하다. 깨닫기 위해 면벽 수도하는 사람도 무엇인가를 강력하게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행복은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자기가 뭘 욕망하는지 아는 사람은 허기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욕망을 위해 준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한국 사회에 불고 있는 웰빙 열풍은 이런 행복해지기 위한 준비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행복함, 그것이 과연 아무 준비 없이 되는 일일까? 웰빙하기 위해서 몸을 만들고,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한 생각을 한다는 것 역시 준비하는 것이다. 여기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것 자체가 웰빙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좋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웰빙은 아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만족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행위를 통해 만족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욕망이 타자의 것일 때 우리는 결코 만족(행복)하지 못한다. 자기안의 욕망이 아니라면 만족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웰빙은 철저히 개인적인 말이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만족의 상태가 현대사회에서는 매스미디어라는 강력한 대중 조작 매체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인간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라면 매스미디어는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한 타자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라캉의 말을 이렇게 고쳐서 말하고 싶다. 인간의 욕망은 매스미디어의 욕망이다.
지상에 인간의 구조물을 세우는 것이 건축가의 일이라면, 마음이라는 들판에 생각의 구조물을 세우는 것은 시인의 일일 것입니다. 건축가이자 시인인 함성호 님은 폐허에서 다시 문명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계화되고 과속화되는 세상 속에서 ‘건축가 겸 시인 함성호’가 찾은 지상의 문명, 그 이야기가 이 글에 녹아 있습니다. 웰빙, 만족, 행복, 욕망. 그가 <행복> 독자에게 던지는 첫 번째 화두를 하나하나 찬찬히 곱씹어보세요. 함성호 씨는 1990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데뷔했고,1991년 <공간> 건축 평론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시집으로 <56억 7천만 년의 고독>, <성 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이 있으며, 티베트 기행 산문집 <허무의 기록>, 만화 비평집 <만화당 인생>, 건축 평론집 <건축의 스트레스>를 썼습니다. 현재 건축 실험 집단 ‘EON’의 대표로 일하고 있습니다.